소설리스트

곤륜검해-233화 (233/275)

수확 (4)

세 도사가 의지를 다지는 동안.

백무량은 두 사람과 마주하고 있었다.

“오래간만이지?”

“허, 마지막으로 만났을 땐 후배처럼 편하게 대했는데…….”

쩝 하고 입맛을 다시는 거지가 바로 삼결제자가 된 철풍개.

“끌끌, 그동안 잘도 돌아다녔더구나. 소문이 워낙 커서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자신의 신분이 달라졌음에도 편안히 대하는 송우현이 바로 그 두 사람이었다.

특히 송우현의 얼굴을 보니 반가움이 컸다.

“노야는 요즘 어떠시오? 우 총관한테 들으니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하던데.”

“그놈이야 내가 얼른 꺼져 줬으면 하는 바람이 크겠지! 누가 사람답게 만들어 줬는지 벌써 까먹은 놈처럼 굴어, 쯧쯧.”

말은 저렇게 해도, 건실하게 자란 손자 이야기를 하는 할아버지처럼 웃는다.

그걸 보니 밤이 되기 전에 돌보았던 도사들.

특히 현종휘와 철유, 유성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요즘 후배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재미가 참으로 크지 않습니까?”

“종휘랑 철유 말하는 게냐?”

“성한이도 있잖습니까?”

“그놈은 아직 곤륜파의 도사라는 자각도 없지 않으냐! 게다가 예의가 없어, 아직 덜 야문 게지.”

송우현이 철골개를 흘낏 곁눈질했다.

아무 생각 없이 흘겨볼 노인네가 아니니, 철골개가 그동안 언짢은 짓을 했다는 뜻일 터.

아니나 다를까 철골개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노야, 저도 요즘 공사다망해서 자주 찾아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네가 무량이 저놈보다 바빠?”

“그건 아니지마는, 그보다 백 선배에게 그놈이라니요?”

“말 돌리지 마라, 이놈아!”

사람을 압도하는 눈빛.

오래전 상계에 몸을 담았을 적, 송우현이 어떤 상인이었을지 훤히 보였다.

‘개방의 삼결제자를 압도하는 기세라.’

저러니 만금상단에서 송우현을 다시 포섭하려고 했으리라.

가만히 지켜보다가 대화에 슬며시 끼어들었다.

“철골개가 노야한테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잘못? 했지! 저놈, 소식이 생기면 바로 알려 달라고 했더니만, 지 혼자만 알고 늦게 알려 준 죄!”

그 말에 철골개가 눈을 질끈 감고서 고개를 숙였다.

“그때는 절대 알려 줄 수 없는 기밀이었습니다, 노야!”

“허허, 절대 알려 줄 수 없는 걸 들으려고 지금까지 너한테 뭘 해 줬더라?”

“노, 노야!”

철골개가 황급히 고개를 처박는 모습을 보니 대충 감이 왔다.

백무량은 어깨를 가볍게 푸는 체하며 송우현에게 물었다.

“내가 좀 다져 놓으면 되겠소?”

“도사가 돼서는 다져? 허 참! 뭐,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다만.”

송우현의 눈가가 둥글게 휘어졌다.

“앞으로는 섭섭하게 안 그러겠지?”

“그럼요! 노야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은 없을 겁니다!”

“쯧…… 가만히 있으면 꼭 이빨이 빠진 줄 착각하는 놈이 있어서 문제야.”

송우현이 씨익 웃었다.

“이 늙은 몸으로 이렇게 곤륜파의 끈을 만들어 놓는데, 상벽이 그놈은 내가 노는 줄 안다니까?”

그 말에 백무량도 마주 웃었다.

“내가 따끔하게 말할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자길 괴롭힌 값으로 정당하게 받아 처먹을 놈이야. 이 끈은 내 맘에 드는 짓을 하면 알려 줘야겠어.”

저 말도 완전히 진심은 아니리라.

백무량은 송우현의 속내를 알면서도 모른 체했다.

다만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옛사람이고, 구천검임을 알면서도 태도가 변하지 않은 건 오직 송우현밖에 없었으니까.

“한데 노야는 나한테 자꾸 반말이시오?”

“아이고, 그럼 상판이라도 나이에 걸맞게 늙어서 오든가! 나도 되살아나서 젊어지고 싶구만 그래!”

송우현이 실실 웃으며 농담을 던지니, 백무량도 할 말이 없어서 웃어 버렸다.

“그렇게 샘이 나면 노야도 젊어지든가.”

“거 놈, 참, 말 기가 막히게 한다!”

장난은 이쯤이면 됐다.

백무량은 본제로 들어가기 전에 두 주전자를 슬쩍 들어 올렸다.

“……흐흐, 차로 하시겠소, 술로 하시겠소?”

그 말에 송우현의 눈이 커졌다.

“여기 도문이잖냐? 술을 어떻게 마셔?”

“장문인이 있기야 하지만 내가 배분이 한참 높지 않소? 뭐라고 하면 뭐, 산문 밖에서 마셔야겠지만.”

“어허~ 한 도문의 큰 어르신이라는 작자가 참~ 이래서야 되겠나?”

입은 훈계를 떠벌리고 있지만, 눈동자가 술이 담긴 주전자에 못 박혀 있다.

백무량은 찻주전자를 슬쩍 내려놓았다.

“좀 솔직해지시오, 노야.”

“흐흐…… 얼른 따르지 않고 뭐 해!”

쪼르르륵…….

뜨거운 술이 잔에 담겼다.

허연 김이 부옇게 오르는 모습에 송우현의 얼굴이 말갛게 개는 듯했다.

“도관에서 마시는 술이라…… 이거 정말 진미겠구만.”

“진미? 얼마에 사 마시겠소?”

“옘병! 지금까지 해 준 게 얼만데, 값을 받아먹겠다고?”

“설마…… 노야한테 돈을 받을까!”

백무량은 송우현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철골개에겐 차를 따라 주었다.

어쩐지 놈의 표정이 서운해 보였지만, 괘념치 않았다.

‘처음부터 잘하든가.’

방금 일이 없었다면 똑같이 술을 따라 주었을 것이다.

백무량은 두 사람과 잔을 부딪치며 본제로 들어갔다.

“내가 강호에서 무얼 하고 왔는지 두 사람이라면 알 거요.”

“그래서?”

“칼은 뽑았고, 강함 또한 충분히 증명했소. 시간도 충분히 주었지.”

당장 청성파의 사대사행에서 나타났던 백련교의 좌호법이 있다.

심지어는 만금상단과 보타문에 침입하여 살육을 버리려고 했다.

그걸 본 현 강호의 강자들은 어찌 대처했던가?

문을 걸어 잠그고, 마교의 부활을 부정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이제는 끌어내서 수확해야겠소.”

곤륜의 도는 백련교와 성화교를 친 것으로 증명했다.

전과 다르지 않게 홀로 싸우지 않겠다는 뜻도 이번에 보여 주었다.

그렇다면 이제 걸음을 내딛는 일뿐.

“앞으로 아미파와 공동파, 사천당가가 합류할 겁니다. 사천당가에게는 한 번 더 주의를 시켜야겠지만, 제가 죽지 않는 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지요.”

“…….”

“그들을 하나로 모으고, 조율하는 데 노야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송우현이 말없이 술 한 잔을 들이켰다. 고민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백무량의 시선이 철골개에게 돌아갔다.

“너는 무림맹 쪽을 잘 살펴 줘.”

“무림맹주를 못 믿으십니까?”

“못 믿는 게 아니라, 칠성교가 다른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에 숨어 있을 경우도 생각해야지.”

칠성교.

그들의 술수는 사람의 정신을 혼탁하게 만드는 데 있었다.

일찍이 제갈세가가 그랬듯, 칠성교가 간자를 심어 뒀을 가능성이 컸다.

‘사 년 전부터 경고하긴 했지만…… 혹시 모르지.’

지금도 숨죽인 채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백무량은 칠성교의 특징을 다시 철골개에게 말해 주고는 의자에 몸을 뉘었다.

“이렇게 편안하게 있는 것도 참 오랜만이네.”

“……고생이 많았겠지.”

탁.

송우현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수심이 가득하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처럼 돌아와 있었다.

“그런다고 늙은이를 더 시켜 먹으려고 그래?”

“하는 김에 더하시지요. 이제 곤륜은 우 총관한테 맡기면 되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나 혼자서 꾸릴 걸 그랬어…… 쩝.”

“도와주시는 거요?”

“싫다 그러면 어쩌게?”

“우 총관한테 더 해 보라고 해야지.”

그 말에 송우현이 ‘켁’ 소리를 냈다.

“아이고, 당장 곤륜파를 꾸리는 것만으로 힘들어하는 놈한테 뭘 더 시켜? 내가 하고 말지.”

송우현이 탁자를 툭툭 치고는 씩 웃었다.

“내가 은퇴할 때 얼마나 잘해 주려고 이렇게 시키나?”

“섭섭지 않게 챙겨 주지요.”

“강호의 상권을 달라고 하면 어쩌게? 줄 테냐?”

갑작스러운 발언에 철골개가 찻잔을 꽉 움켜쥐었다.

만금상단이 존재하는 한 불가능할 말이지만, 백무량이 돕는다면?

누구도 불가능하다고 단언하지 못한다.

철골개가 눈알을 살살 굴리는 동안 백무량은 조용히 술을 삼켰다.

그러고서 송우현에게 물었다.

“진심으로 바라십니까?”

“내가 헛소리하는 사람으로 보이냐?”

송우현과 시선을 마주했다.

아주 짧은 순간, 많은 감정이 그의 눈동자에 드러났다.

이쪽에서 읽었으니, 저쪽에서 읽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하하.”

“……클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왜 생각에도 없는 말씀을 합니까?”

“생각이 없다니? 내가 그러려고 한다면 가능한 자리잖냐.”

송우현이 히죽 웃으면서 말을 이어 갔다.

“천하제일인이 보증하는 상인! 심지어 만금상단의 상단주와 친분이 깊다! 주변에선 내가 상권을 먹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일 게다.”

“불만 있으면 싸우러 오라고 하지요.”

“……클클, 골 때리는 소리 하기는.”

“그래서 해 주실 겁니까?”

그 물음에 송우현이 더욱 짙은 웃음을 보였다.

“내가 안 하면 누가 하겠냐? 네 성질머리를 받아 줄 사람도 나밖에 없는데.”

“고맙습니다, 노야.”

백무량은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상대로 목소리를 낸다는 건, 그 자체로 화가 쌓이고 머리가 복잡할 일이다.

하물며 자신 대신에 마교와 싸울 준비를 마쳐야 하는 중간 관리인.

많은 위협과 회유가 들어올 자리를 맡길 사람은 송우현밖에 없었다.

그걸 알기에 수락해 준 것이리라.

쪼르르…….

백무량은 감사를 담아서, 송우현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

한때 감우상인(甘雨商人)이라 불린 남자.

송우현은 백무량을 대리하는 상인으로서 차례대로 착석하는 무인들을 지켜보았다.

개중에는 익숙한 얼굴도 있었다.

‘옳거니, 너도 왔구나.’

중소 문파의 총관을 위장했다지만, 저렇게 부리부리한 눈깔은 쉽게 잊을 수 없다.

상왕 조원양.

만금상단의 주인이 여기까지 온 것은 자신을 관찰하고, 변화하는 천하를 지켜보기 위해서일 터.

“점소이.”

“예, 어르신.”

“저기 구석에 있는 염소수염한테 나 대신 물이라도 따라 주게.”

“……알겠습니다.”

점소이가 조심스럽게 조원양한테 다가가서 조용히 물을 따랐다.

조원양은 그 행동에 놀라지 않았다. 점소이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길 숨길 생각도 없었다는 듯, 자신에게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염병할 놈.’

여전히 얼굴에 철판을 깔아 놓은 놈이다.

송우현은 고개를 홱 돌리고서 이곳에 모인 무인들을 둘러보았다.

‘아미파, 공동파, 사천당가, 무림맹…… 중소 문파와 권문세가까지 잘도 모였군.’

백무량이 처음으로 대리자를 보냈다.

그 이유와 뜻을 판단하기 위해서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놈들로 보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들은 한 가지 착각하고 있다.

드르륵, 쿵.

마지막 한자리까지 채워졌을 때, 송우현은 입을 열었다.

“다들 공사다망한 양반들이니 간단하게 말하겠소.”

“……?”

“총력을 기울여서 마교와 적대할 준비를 마치고, 은둔하고 있는 강호십대고수의 소재를 찾아 주시오. 그들이 큰 도움이 될 테니까.”

겨우 저 말이 전부인가?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운데, 송우현은 비릿하게 웃었다.

우연히 내린 단비를 팔았던 상인.

옛 악명에 어울리는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또, 백련교의 난에서 제대로 정산받지 못한 혈채가 있다던데…… 이번에 이자까지 쳐서 받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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