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확 (3)
“곤륜의 도가 천하를 뒤덮는다?”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현노윤의 시선과 마주치니, 진의를 제대로 묻고자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를 너무 고평가하는군.”
“사조님이지 않습니까?”
“그런가…….”
진지한 표정의 현노윤을 본 백무량은 숨을 내뱉었다.
하얀 입김이 시야를 한가득 채웠다가 사라졌다.
진지했던 그의 표정이 어느새 엷은 웃음으로 변해 있었다.
“부담스러웠는지요?”
“난 원래 큰 그릇이 아니었으니까.”
백무량은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천의를 알기 전에는 곤륜 아래에 천하를 일통하려고 했네. 기왕 되살아났으니 강자존의 논리를 내 손으로 펼치려고 했고.”
“그렇습니까.”
“큰 뜻은 없었어. 그냥…… 곤륜파가 허무하게 멸문당했던 과거를 갚아 주겠다는 심보였지.”
다른 문파나 세가가 말하듯, 힘으로 군림하려는 생각을 처음엔 품었었다.
백무량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도사도 아니고, 대협도 아니고, 그냥 무인처럼 굴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그걸 건져 준 사람의 이야기까지.
“사형이 나를 바꿨네.”
“사형이라면…….”
“장문인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분명히 있었네.”
어린 시절부터 영웅담을 속삭이던 사람.
주백천의 안배가 있었기에, 그것을 남긴 주연호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기에 마음을 달리할 수 있었다.
백무량은 숨을 내뱉었다.
“자칫 잘못하면 나도 운산보주처럼 변했겠지. 사문의 멸문에 이유가 있었고, 그것이 과거의 굴레라는 걸 몰랐다면…… 아마 강호를 원망했을 거야.”
“그렇습니까.”
현노윤은 백무량의 잔에 찻물을 따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참 다행이군요. 사조님께서 곤륜을 저버리셨다면, 저나 종휘는 살아남기 어려웠을 겁니다.”
“감사하게, 내 사형한테.”
“지금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 말에 백무량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예전에 죽어서 검해에 있다고 말하면, 언젠가 되돌리겠다는 의지가 희미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근거 없는 확신을 담아서 말했다.
“언젠가 다시 데려올 걸세.”
“그때가 금방 왔으면 좋겠군요.”
두 도사는 직감했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두 마교가 남아 있는 이상, 그런 미래는 찾아오지 않으리란 걸.
***
“하아.”
현종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반년 동안 각고의 노력을 들였는데…….’
백무량은 또 어디서 그렇게 강해졌는지, 어느 정도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던 생각이 산산이 부서졌다.
하나의 초식 안에 변화를 섞고 숨겼던 청운을 펼쳐 냈거늘.
‘어느 하나 먹히지 않았어.’
스으윽.
현종휘는 발로 연무장의 바닥을 긁었다.
기이하게도 그 움직임은 백무량의 보보(步步)를 형상화한 것이었다.
‘하나하나, 사조님의 움직임을 발가벗겨 보자.’
백무량과 똑같은 곤륜의 무학을 익혔다.
그러나 그 속에 무언가 다른 것이 담겨 있음을 깨달았다.
가끔 보이는 생경한 묘리가 자신을 압도했음을 보았다.
그것을 안 이상, 알아내야 한다.
베끼고 모방하여…… 무학의 길을 갈고닦아야 한다.
현종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걸음이 무당파랑 비슷한데?”
대련하는 도중에 볼 수 있는 건 제한적이기 마련이다.
하물며 어디서 신공을 깨쳤는지, 관절과 공력의 움직임을 보는 것만으로 벅찼다.
이른바 삼단전의 초고속 순행.
백무량의 상, 중, 하단전이 합쳐진 것 같았다.
‘공력을 기맥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짧은 의지로…….’
수 싸움의 속도부터 현저히 차이가 난 이유.
그것을 나름대로 예측하던 현종휘는 자신 옆에 두 도사가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냐?”
“저희도 너무 얻어맞았잖아요. 억울해서 나왔죠.”
“대사형께 무슨 말버릇이냐?”
유성한과 철유.
두 후배가 멍이 든 얼굴을 드러낸 채 쭈뼛거리고 있었다.
현종휘는 그저 껄껄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하, 하하하…… 사조님이 강하기는 하지.”
“대사형께선 사조님보다 약하고요.”
유성한의 말에 현종휘는 말을 순간 더듬었다.
“그,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
그렇게 말해 놓고서 후회했다.
당연한 일.
칠십여 년 전 영웅이라 불린 백무량 사조에 비하면 약한 것이야, 당연한 일.
그 생각을 기저에 품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당연함이었다.
‘이래서였나.’
뇌리에 벼락이 친 것 같았다.
‘붙기 전부터 질 것을 상정하고 있었으니…… 약할 수밖에 없었어.’
이래서야 착한 후배가 될 수 있을진 몰라도, 의지할 수 있는 무인은 될 수 없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현종휘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뒤이어 하늘을 보았다.
과거에 백무량과 함께 보았던 별빛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검게 물든 하늘, 겨울이 부쩍 가까워져 차가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들…….
황량해진 산의 정경에 현종휘라는 도사가 헤매고 있었다.
이렇게 간단한 답을 두고서, 방황하고 있었다.
“……성한아, 유야.”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두 후배를 불렀다.
이에 유성한과 철유가 침을 꿀꺽 삼켰다.
평소에 온화하고 착한 대사형인 현종휘지만, 저럴 때면 살얼음보다 차가워지곤 했다.
“왜, 왜 부르셨습니까?”
“말씀하십시오.”
타고난 근골로 빠른 쾌검을 펼치는 유성한.
진중한 성격이 무공에 그대로 묻어 나오는 철유.
그들을 본 현종휘가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인상과 무공을 모두 지웠다.
그저 처음으로 돌아갔다.
“너희는 사조님을 이길 작정으로 싸웠느냐?”
“그건…….”
늘 말하길 좋아하는 유성한의 입술이 막혔다.
무거운 물음에 제대로 대답한 건 다름 아닌 철유였다.
“그러지 못했습니다.”
“왜냐?”
“저희는 사조님께서 이룬 업적을 보고 듣기만 하였으니까요.”
철유답지 않게 말이 길어졌다.
“옆에 서 본 적 없이, 반년 동안 사문에서 수련만 한 제가 감히 대등하다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나도 그렇다.”
현종휘가 허심탄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도 그래. 이긴다기보다 사조님에게 성취를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그저, 내가 개척한 곤륜의 무도를 보이고자 했지.”
“…….”
“그건 도사의 덕목이지, 무인의 투쟁심은 아니었다. 이해하느냐?”
“예.”
철유가 고개를 끄덕이니, 유성한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게 왜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저희가 어찌 사조님의 경지에 감히 범접할 수 있겠어요……?”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품어 본 적 없다는 듯.
유성한의 대꾸가 끝에 가서는 줄줄 늘어졌다.
그걸 본 현종휘는 웃었다.
이해했다. 백무량과 비견될 경지에 오르겠다니, 말만 앞선다고 욕을 먹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고금제일인이라 불리는 사조님께 다가가겠다는 게 이상한 말처럼 들리겠지.”
“대사형도 그렇게 생각하시잖아요.”
“하지만 말이다. 성한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어찌 사조님 옆에 설 수 있겠느냐?”
현종휘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조님께서 칠성교와 천마신교를 멸하러 가시는 길에 네가 없어도 아무렇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
유성한은 즉답할 수 없었다.
사실, 곤륜파에 입문한 것은 겨우 반년을 넘었다.
보타문에서 눈으로 배운 세월이 더욱 길었다. 곤륜파의 역사니, 무학이니, 깊숙이 와닿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저도 싸우고 싶어요.”
보타문의 여승들을 상처 입히던 마교도들.
그 생각을 하면 아직도 피가 거꾸로 솟았다. 잊을 만하면 꿈에서 나오기도 했다.
그놈들에게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하고 끝나는 건, 싫다.
유성한이 보인 의지에 현종휘가 빙긋 웃었다.
“네가 싸우는 이유가 그렇듯, 나도 그렇다. 곤륜을 되살린 사조님에게 은혜를 갚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이다.”
그 말에 유성한의 눈이 커졌다.
현종휘라면 도의(道義)나 대의를 말할 줄 알았으니까.
생각지도 못한 현종휘의 발언에 굳어 버리자, 철유가 껄껄 웃었다.
“요놈, 대사형은 속이 꽉 막혔다고 투덜거리기만 하더니만, 네 생각이 틀리니까 이상하더냐?”
“그게, 저.”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지 말라고, 보타문주에게 들었던 가르침이 이제야 다시 생각났다.
유성한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붉어졌다.
이에 현종휘도 껄껄 웃었다.
“천둥벌거숭이처럼 굴던 후배가 사람 속 어두운 걸 이제 알았구나.”
“그, 그럼…… 대사형께서는 사조님에게 힘이 되고 싶어서 지금까지 이랬던 거예요?”
“그래.”
현종휘는 짧게 대답하고는 땅을 보았다.
“지금은 연무장이지만, 칠 년 전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
서두를 꺼내니 한숨이 나왔다.
“나와 할아버지는 운산보에 핍박당하며 빈곤하게 살았지. 세상에 반항하는 일 없이 조용히 사는 것이 순리라고 여겼다. 곤륜의 도맥을 잇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거든.”
“……대사형.”
“그게 어리석다고 말한 게 누군지 아느냐? 사조님이다. 절대 이길 수 없다고 여긴 운산보를 지워 주신 사람? 사조님이다.”
현종휘의 시선이 위로 올라갔다.
지금이야 평지로 밀어 버린 연무장이라지만, 현노윤과 함께 운산보의 무인을 피해 숨어 다니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이 알알이 떠올랐다.
“난 며칠 노숙하는 것만으로 앓아눕는 어린아이였고 말이다.”
“약하셨네요.”
유성한이 무심코 뱉은 말에 현종휘가 피식 웃었다.
“그랬지, 하하……. 그때 나는 사조님께 평생 갚지 못할 빚을 졌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현종휘의 눈이 태청신공의 공력을 머금고 시퍼렇게 빛났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예?”
“처음부터 사조님은 나한테 빚을 갚으란 말도 하시지 않았어. 그냥 내가 만든 생각에 갇혀 있었던 거지.”
이걸 칠 년이나 지나고서야 깨달았다.
현종휘는 야속하게 흐른 시간이 너무나도 아쉬웠다. 하지만 노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백무량이 구원한 삶을 허투루 보내지는 않았으니까.
그 자긍심을 가지고서 입을 열었다.
“사조님이 언제까지 여기 계실지 몰라. 떠나시기 전에 확실하게 각인시켜 드리자. 우리가 마교와 싸울 수 있는 재목이고 고수라는 걸 말이야.”
“예.”
철유가 고개를 끄덕이니 유성한도 자연스레 ‘예’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표정엔 여전히 확신이 없었다.
백련교주를 무찌른 백무량에게 인정을 받자?
“……허.”
유성한의 머릿속이 벌써 복잡해졌다.
그것을 본 현종휘가 두 후배를 향해 말했다.
“일단은 산맥부터 쭉 돌아보자!”
“이, 이 밤에요? 자칫 잘못하면 발목 돌아가고 무릎도…….”
유성한의 엄살이 한 바가지 쏟아지자, 철유가 먼저 뛰기 시작했다.
현종휘가 그 뒷모습을 턱짓했다.
“네 사형이 뛰기 시작했는데, 너는 가만히 있을 거냐?”
“아니, 그게 아니라…….”
“나도 뛴다. 늦으면 대사형의 권한으로 볼기짝이라도 때려 줄 거야!”
“아니!”
유성한이 무언가 변명하기 전에 현종휘가 먼저 뛰었다.
운중용형보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산행이었으나, 유성한 또한 타고난 근골과 가전무공으로 금세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곤륜의 도사들은 거목과 호수가 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