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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검해-231화 (231/275)

수확 (2)

잠시 후.

곤륜산 정상에 도착한 백무량은 뚱했던 마음을 지웠다.

생동감이 가득했다.

모두가 향상심을 가지고서 곤륜의 무학에 집중하고 있었다.

대곤륜이라 적힌 현판에도 먼지 한 톨 없다.

“내가 오는 것도 잊을 만하구나.”

백무량은 씩 웃으며 검해의 망령들에게 반격했다.

‘보십시오. 이게 제가 이룬 곤륜파입니다.’

[……쩝.]

[진짜 잊은 게 아니었구만.]

뭔가 아쉬워하는 심천검과 백노.

저 둘은 자신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려고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백무량은 둘에게 승리의 미소를 날리곤 정문 안으로 진입했다.

“사조님!”

가장 먼저 찾아온 도사는 가장 깊은 인연을 맺은 후학이었다.

“종휘야, 그동안 잘 지냈더냐?”

“예, 물론이죠!”

현종휘가 마주 웃었다.

옛날이었다면 까르르 웃었을 것을, 이제 나이가 드니 제법 훤칠한 태가 났다.

백무량은 눈동자를 위아래로 굴렸다.

“몸이 컸나?”

“잘 먹고 잘 수련했으니까요.”

“허…… 내 앞에서 자신감이 넘치네?”

바야흐로 칠 년 전.

이제는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과거처럼, 백무량이 슬쩍 현종휘의 정강이에 발끝을 대었다.

한데 현종휘의 반응이 다소 의외였다.

“하하, 사조님이 안 계신 동안 성취를 이뤘거든요.”

떠나기 전이었다면 기겁하면서 움직였을 녀석이 가볍게 웃어넘기는 게 아닌가?

그걸 보고서야 아이가 장성했음을 깨달았다.

저것이 허세일지라도 옛 사조를 상대로 담대하게 넘기는 법을 깨달았다는 뜻이니까.

백무량은 현종휘의 성장이 기꺼워서 크게 웃었다.

“하하, 하하하…… 녀석!”

툭, 툭.

현종휘의 어깨를 두드려 주는데 손에 조금씩 공력을 실었다.

간단한 시험이었다.

‘강한 힘이 코앞에 닥쳤을 때 어떻게 대처할까?’

그 궁금증이 불쾌함으로 다가와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현종휘의 반응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휘르륵!

현종휘의 어깨에 구겨져 있던 도복이 펴졌다.

고수라면 누구나 깨치는 화경(化境)!

그런데 기교를 부리는 솜씨가 대단했다.

자신의 공력을 옆으로, 아래로 흘리는데 미끄러지는 것 같았다.

“오호라!”

흥이 난 백무량은 예전처럼 현종휘의 정강이를 향해 후려 깠다.

몸짓은 단순하지만, 수경의 묘리가 깃든 퇴법이다.

정신을 화경에 집중하고 있으면 반응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는데, 현종휘의 눈치가 예사롭지 않았다.

“저도 이제 쉽게 당하지는 않지요!”

백무량이 검해에서 여러 망령에게 무학을 배우는 동안, 얼마나 깊은 고행을 한 것일까?

화경의 이치가 어깨에서 정강이로 이어졌다.

수없이, 많은 실전을 치르며 숙하게 익힌 움직임이었다.

‘곤륜에 저런 경험을 쌓게 해 줄 만한 고수가 있었던가……?’

백무량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에 현종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딜 보시는 겁니까!”

“이젠 사조한테 타박이라도 하려고?”

백무량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어디 한번 겨루어 보자. 네 성장을 눈앞에서 보는 맛이 있겠다.”

백무량은 손목을 탁 털었다.

내관혈이 찌르르 울리고, 공력을 머금은 소부혈을 무명지로 강하게 자극했다.

“해볼 테냐?”

“기꺼이……!”

현종휘가 발을 가볍게 굴렀다.

발아래에서 휘몰아치는 바람.

삼보의 묘리가 보였다. 백무량에겐 추억의 순간이었다.

산골 아이가 곤륜의 무학을 펼치는 것을 목도한 때.

어두컴컴하던 미래가 개는 기분이었다.

되살아난 목숨을 버리려던 과오를 씻을 수 있었다.

그래서 백무량은.

“오냐!”

현종휘의 선공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쩌억!

주먹을 손바닥으로 잡아채는 것과 동시에 현종휘가 허리를 뒤틀었다.

두 가지였다.

힘을 그대로 실어서 찰 것이냐, 혹은 가까이 다가와서 주(肘 : 팔꿈치)를 휘두를 것이냐.

백무량의 눈이 현종휘를 훑었다.

“옳거니.”

무엇을 하려는지 환히 보인다.

백무량은 현종휘가 펼치려던 것을 그대로 흉내 냈다.

쩌적, 쿵!

두 팔꿈치와 정강이가 연달아 부딪치고, 수구혈을 노리고 피하는 몸짓마저 똑같다.

현종휘의 얼굴이 붉어졌다.

“저를 놀리려고 이러시는 겁니까?”

“아니, 보고 싶어서다.”

“……!”

흥분으로 붉어졌던 얼굴이 차분히 변하는 것을 보았다.

영민한 후배니까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알 것이다.

자신이 현종휘란 도사에게 기대하는 모습, 그것은.

“강적을 꺾기 위한 타개책이라.”

현종휘의 혼잣말에 백무량은 피식 웃는 것으로 대답했다.

아무리 무학을 닦고 경지가 올랐다고 한들, 마교의 주구에게 필적하긴 어려웠다.

그렇다면 그들을 꺾기 위한 수가 필요하다.

백무량은 현종휘에게서 그 해답을 보고 싶었다.

“자, 슬슬 패를 꺼낼 때가 되었지?”

휘르륵!

백무량의 우장에서 작은 파도가 유형화했다.

아주 작은 조각에 불과할지라도 검해의 일부.

현종휘의 내력으로는 쉽게 막을 수도, 흘릴 수도 없었다.

이것을 절묘하게 펼치어 내니.

“운룡비뢰장이다.”

쿠콰콰!

백무량이 펼친 파도가 곧 수룡이 되어 현종휘를 덮쳤다.

이마저도 봐준 것이긴 했다.

곤륜파의 무공으로 펼쳤으니 현종휘가 쉽게 파해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으니까.

‘그 경우에도 칭찬해 줄 생각이었는데.’

현종휘의 쌍장에 분광뇌운결이 강하게 맥동했다.

검을 들지 않았음에도 펼치는 걸 보면, 권각술도 검법 못지않게 수련했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좋은 대답은 아니다.

백무량의 낯빛이 굳어졌다.

“힘으로 꺾겠다는 게 네 대답이냐?”

가볍게 펼쳤던 것에 공력을 더했다.

조그마했던 운룡비뢰장의 크기가 팔뚝만큼 자랐다.

이래서야 현종휘가 전력을 끌어내도 막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단, 백무량이 기억하는 과거라면 말이다.

콰지직!

양손에 깃든 뇌창(雷槍) 속으로 태청신공의 공력이 깃들었다.

백무량이 보기에 무척 위험한 행동이었으나, 정작 합일의 순간이 매끄럽기 그지없었다.

수없이 반복한 장인의 솜씨.

‘너도 너만의 무리(武理)를 만들었구나.’

곤륜이라는 거대한 나무에 자라난 가지들.

그 가지들 사이에 현종휘의 무학이 진가를 드러내고 있는 듯했다.

백무량은 현종휘를 쓰다듬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서 외쳤다.

“아름다운 무학이긴 하나, 막아 내지 못하면 무용하다!”

“압니다.”

씨익 웃은 현종휘가 전신을 휘돌렸다.

언뜻 보면 회천각처럼 보였지만, 그 속에 있는 무학은 분명 곤륜의 것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 놀라운 점이 있었다.

‘구천화우검……?’

검이 아니라 박투로 응용한 일수.

백무량은 현종휘가 운룡비뢰장을 쳐 내는 것을 보고 손을 털었다.

“네가 이렇게 장성하여 자기 답을 드러냈으니, 뭘 더 볼 필요가 없다.”

“벌써 끝내시는 건가요?”

“더 보여 줄 거라도 있느냐?”

“더 있죠. 있긴 한데…….”

현종휘의 시선이 뒤에 있는 두 도사에게 향했다.

철유와 유성한.

두 녀석도 자기 무학을 보여 주고 싶다는 듯, 몸이 잔뜩 달은 듯했다.

“어디 한번 볼까?”

백무량은 환하게 웃었다.

***

세 시진 뒤.

해가 지고 나서야 백무량은 침소에 누울 수 있었다.

뛰어나게 성장한 삼인방을 제외하고도 무공을 봐 달라는 도사가 한둘이 아니었다.

“아이고, 삭신이야.”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며 피식 웃었다.

자리를 오래 비웠으니까 혹여나 나태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완전히 사라졌다.

‘보셨습니까, 대곤륜의 부활을?’

[…….]

타문인 무명을 제외하고는 감회가 깊은 듯했다.

그야 당연했다.

공멸하거나 멸문했던 사문이 후대에 이토록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특히 가장 먼 선배인 심천검의 감동이 컸다.

[허, 허허…… 칠성교 때문에 많은 동문이 죽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어.]

항상 장난으로, 그리고 짓궂은 농담으로 분위기를 깼던 심천검답지 않았다.

백무량은 그들 모두가 지금의 곤륜을 보고 평안을 찾았으면 했다.

그건 타 문파인 무명도 마찬가지였다.

‘아미파에도 한번 찾아가면 어떻겠소, 선배?’

[……어차피 나한테 아미파에 관한 기억은 남아 있지 않아. 내가 익힌 무공이 아미복호검 정도인 것뿐이지.]

무명의 목소리에서 툴툴대는 게 느껴졌다.

하기야, 다른 망령들은 감동에 겨워하는데 자기만 공감하지 못하는 상황이니까.

백무량은 무명의 사연이 궁금해졌다.

‘정말 기억하는 게 아무것도 없소?’

[없다.]

짧게 대답하는 무명의 목소리에 적잖은 아쉬움이 있었다.

[나한테 그런 기억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너한테 부탁을 했겠지. 뭐, 나야 아미의 사람이었을 테니까…… 어려운 부탁이었을 거야.]

‘빙빙 돌리지 마십시오.’

[그래, 부럽다. 됐나?]

그 말을 끝으로 무명이 고개를 홱 돌렸다.

이번 반응을 보아 앞으로 열흘은 목소리도 듣기 어려울 것 같았다.

‘아미파에 전서구를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무명의 가르침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과격했다.

하지만 그에게 아미복호검의 수경과 팔첨을 제대로 배운 것도 사실이었다.

빚을 진 이상 갚아 주는 것이 인간의 도리.

서신을 준비하려던 차에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장문인인가?”

“그렇습니다.”

현노윤의 노쇠한 목소리가 들렸다.

칠 년 전에는 운산보에게 노호도 칠 만큼 정정했던 도사가 어느덧 세월에 밀려나고 있었다.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안쓰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오게. 날이 추워.”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조님.”

그걸 알아채지 못하길 바랐는데 현노윤의 몸짓에 억지로 꾸민 강건함이 있었다.

물론, 그도 상승 고수의 이목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서로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침묵할 뿐이었다.

“…….”

차를 따르고, 마시고, 이따금 하늘을 보고.

소일거리 없는 사람끼리 모여서 다도를 즐기는 꼴이었다.

그러나 그동안에도 감정의 교류는 이어졌다.

백무량의 전신에 늘어난 상처, 고된 싸움에 더러워진 도복.

현노윤의 얼굴에 늘어난 주름, 쪼그라든 몸에 맞지 않는 도복.

서로를 살피며 속으로 생각을 갈무리하고 눈을 마주쳤다.

그것이면 대답이 되었는데.

백무량이 침묵을 깨었다.

“……이제 몇 년이지?”

“사조님을 무덤에서 꺼낸 지 칠 년이지요.”

“길군.”

“저한텐 짧았습니다.”

“왜?”

“고통과 모욕을 참는 것은 길게 느껴지지만, 사조님이 되살린 곤륜의 역사를 옆에서 지켜보는 건…… 무척 즐거웠으니까요.”

그 말에 백무량이 잠시 침묵했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영약이나 구해 줄까?”

“얼마나 더 살게 해 주시려고 그럽니까?”

“그야…… 다음 장문인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니까.”

“사조님께서 오르시면 되지요!”

“내가 그랬다가는 얼마나 큰 사고를 칠지 몰라.”

“허허, 허허허…….”

너털웃음을 흘린 현노윤이 찻잔을 놓았다.

“거목이 자라난 자리에 호수가 생기고, 산짐승이 돌아다니며, 만물이 생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낡고 닳은 바위는 슬슬 떠날 때가 되었지요.”

“그 바위도 나름의 향취가 있는 법인데.”

“바로 떠나진 않을 겁니다. 지켜봐야지요.”

현노윤은 백무량과 시선을 마주쳤다.

“곤륜의 도가 천하를 뒤덮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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