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확 (1)
“…….”
백무량 선배가 떠났다.
총관인 나야 워낙 바빠서 배웅을 나가지 못했지만, 도사들한테 모범이 될 일 초식을 보여 줬다고 한다.
그 때문에 내 일이 더더욱 바빠졌다.
“……식비가 왜 이리 늘었어?”
현종휘를 비롯한 모든 도사가 열심히 먹고, 싸고, 자고, 수련하고.
백무량의 발자취를 좇으려는 도사의 몸부림이 타격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게 우스웠다.
‘도관을 세우는 것도 아니고, 먹는 것 때문에 곤란을 겪을 줄이야.’
돈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곤륜산의 산세가 워낙 험하다 보니 열흘 전에 필요한 물품을 말해야 했다.
한데 갑자기 먹는 양이 늘어난 탓에 곤란해졌다.
‘나무뿌리까지 긁어 먹게 생겼어.’
전에는 배부르면 수양을 쌓을 수 없단 소리를 하더니만.
현종휘와 철유, 유성한의 열의가 유독 돋보였다.
이 변화를 송 영감한테 말했더니 껄껄 웃는 게 아닌가?
“진즉 이랬어야지. 바짓가랑이라도 잡으려면 열심히 뛰어야 한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지!”
“……예?”
“예는 무슨, 너는 그놈들 뒷바라지나 열심히 해라. 나중에 분명 큰 도움이 될 테니까.”
“그,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 부분은 내가 잘 해결해 주마. 하지만 말이다. 이 노쇠한 몸뚱이를 부려 먹는 비용이 만만치는 않을 것이야.”
송 영감의 눈이 짓궂게 씰룩거린다.
보나 마나 결제서에 장난질을 쳐 놓을 게 뻔했다.
어찌 보면 연례 행사였다.
자기 제자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이만한 안건은 눈 감고도 처리해야 한다고, 수없이 채찍질받았던 바다.
“만금상단에서 처리해 주는 겁니까?”
“그렇지.”
“오래간만에 인맥 쌓고 좋겠군요. 어디 한번 마음대로 해 보십시오, 영감.”
“……허허.”
욕을 옴팡지게 던져야 할 영감이 음험한 미소를 짓는다.
‘젠장.’
나는 속으로 이마를 ‘탁’ 쳤다.
앞으로 보름 동안은 죽었다고 생각해야겠다.
보름 후.
갑작스레 생겨난 식량난은 해결되었다.
비록 내 몸은 일백 번……까진 아니어도 열 번은 죽었다만.
마음껏 수련하고 잠자는 도사들을 보니 일을 열심히 하긴 했구나 하는 감상이 들었다.
그러다 현종휘가 나를 찾아왔다.
“우 총관님!”
“응? 대사형 아니오?”
“연무장에 있는 목검이랑 수련 도구가…….”
“오늘 아침에 보았을 땐 이상이 없었소만?”
“하하, 제가 실수로 부숴 버려서요.”
해맑게 웃는 현종휘.
녀석을 꾸짖고 싶었지만, 조카뻘 되는 청년에게 짜증을 부릴 순 없는 노릇이다.
나는 눈만 몇 번 끔뻑였다. 그걸로 부정적인 감정을 거세했다.
송 영감에게 배운 몇 가지 잡술이 이럴 때 도움이 된다.
‘지금은 뛸 때다.’
언제까지고 영감한테 기댈 것인가?
나는 현종휘를 좋은 소리로 돌려보내고 봇짐을 챙겼다.
“내가 간다, 가.”
만금상단에게 기대지 않고 해결하리라.
그 마음으로 하산하였는데, 귓가에 신기한 소식이 들렸다.
“칠성교주를 격퇴하였다?”
백무량이 하산한 지가 이제 겨우 보름이다.
강호가 이토록 넓은 마당에 칠성교주와 우연히 마주쳤을 리 없으니, 그들이 선배를 습격했을 터.
나는 턱에 혹이 있는 매화자(賣話者)에게 다가갔다.
“그게 무슨 소리요?”
“아니, 그게…….”
매화자 놈이 어물쩍거리기에 엽전 몇 개를 던졌다.
그러자 그놈이 턱주가리에 꿍쳐 둔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백무량이 사천성으로 향하던 와중에 어느 노인과 마주쳤는데, 그것이 청노라는 마인이었다.
그놈을 죽이려는 차에 백련교주가 나타났다.
백무량은 그들을 죽이지는 못했지만,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미사여구가 무척 길었지만 이런 내용이었다.
나는 매화자한테 엽전 하나를 더 던져 주고는 자리를 떴다.
‘선배 이야기라면 어떤 것이라도 좋아할 녀석들인데…….’
이런 통쾌한 무용을 나 혼자만 알 순 없잖는가?
서둘러 계약을 마친 뒤, 곤륜파로 허겁지겁 돌아갔다.
“헉, 헉.”
워낙 바삐 움직인지라 정문에 기대서 숨을 고르는데, 철유가 나타났다.
“현 사형께서…….”
“아니, 그건 됐어. 해결한 일이니까. 그것보다 말이야.”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백 선배가 벌써 사고를 친 모양이야.”
“예?”
“듣고 싶으면 모두 모여. 방금 듣고 온 거니 아주 싱싱할 거야.”
철유가 헐레벌떡 뛰어갔다.
한 달.
백무량의 소식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미파와 친교를 맺고, 화산파로 향하는 길이라고 했다.
가장 큰 선배가 벌이는 협행(俠行)에 모든 도사가 고양된 모양이었다.
“허이구…….”
나날이 지출이 늘어난다.
아무래도 날을 잡아서 회충약을 먹여야 하지 않나, 고민하던 차에 바깥에서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억!”
“대사형!”
‘……뭐지?’
무공엔 관심이 없었지만, 반응이 저렇게까지 격하면 궁금증이 일기 마련.
나는 찌뿌둥한 허리를 두드리며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그곳에는.
쿠르르르……!
태청신공을 전신에 두른 검객이 운함벽에 기다란 실선을 남겼다.
“허.”
가공할 정도의 성장이다.
아직 약관도 되지 않았지만, 검기를 의념으로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았다.
하물며 운함벽이 무엇이던가?
곤륜산에서만 나타나는 운함석이 층을 형성한 벽.
운룡대팔식을 수련할 정도로 단단한 돌을 검기로 갈랐다. 가히 강기에 가까운 검력이었다.
‘송 영감한테 하도 얻어들으니까 나도 이런 걸 아네.’
곤륜파의 총관으로서 이 정도면 뛰어나지 않나?
나는 히죽거리며 현종휘에게 다가갔다.
“대사형의 성취를 축하하는 바요!”
두 팔을 활짝 열며 다가갔는데, 현종휘의 반응이 어정쩡했다.
“아니에요, 이 정도로는…….”
아랫입술을 깨무는 걸 보니 단순한 겸양 같지도 않았다.
‘괜히 건드려 봐야 타초경사지. 내가 간섭할 정도로 어린 나이도 아니지 않나.’
그리 마음을 정리하곤 현종휘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격려만 했다.
그런데 다른 두 도사.
철유와 유성한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철유는 몰라도 성한이는 왜?’
겨우 열다섯밖에 안 된 아이.
하물며 곤륜파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저런 투쟁심을 불태우니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허허, 허허허!”
곤륜파의 총관으로 자리한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이런 문파가 망할 리가 없다.
나는 뿌듯함을 안은 채 집무실로 향했다.
반쯤 열린 문 사이를 보니 기분이 확 나빠졌다.
‘젠장.’
아직도 쌓인 문서가 너무나도 많았다.
이래서 급성장은 좋지 않다.
석 달.
화산파에서 큰 싸움이 일어났다고 했다.
백무량이 마교의 후예를 죽이고, 폐인처럼 지내던 낙매신검을 치유했다고 들었다.
나는 이제 놀라지 않았다.
‘워낙 터무니없는 짓을 벌이곤 했으니까.’
당장 운산보만 하더라도 무림맹의 소식통을 끊을 정도로 강세하던 흑도였다.
그걸 단신으로 부순 것이 바로 백무량이었고.
따라서 그는 무적이다.
……반쯤은 농담이지만, 그만큼 신뢰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뼈를 묻을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나날이 풍년이야, 풍년.”
청성파의 사대사행을 보고 나서 백무량이 만들었다는 고행(苦行).
그곳에 오르는 도사가 오늘따라 많았다.
‘예전에는 연무장에만 사람이 많았는데 말이야.’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미간에 힘이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도사의 고행은 곧 나의 고행과 같다.
저걸 유지하고 보수하는 비용.
사실상 기관진식에 가까운지라 특수한 목재나 수리가 뒷받침되어야 했다.
“내가 굴러야 문파가 굴러가는 거겠지.”
누구도 들어주질 않을 투정을 중얼거리면서.
일벌레는 오늘도 굴로 향한다.
넉 달.
무당파를 향한 것으로 백무량의 소식이 사라졌다.
설마 마교도에게 급습당한 게 아니냐며, 도사들이 걱정스러운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나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만금상단이 지금까지 돈을 안 끊은 걸 보면 안전하단 뜻이야.’
만금상단이 왜 강호의 최고 노른자를 먹었겠는가?
귀가 밝고 머리가 잘 돌아가서다.
진짜 백무량이 횡액을 당했다면 뭐라도 일이 일어났을 터였다.
‘나야 근거가 있다지만, 저 세 도사님은 참.’
밖에서 무슨 소문이 들리든, 들리지 않든 묵묵히 자기 수련을 행하는 세 도사가 있었다.
현종휘, 철유, 유성한.
그 셋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진지하게 무공을 논하고, 밤잠을 줄여 가며 수련을 이어 갔다.
나에게는 골칫거리를 만드는 주요 인물들이지만, 어느새 세 청년을 중심으로 문파가 결집하고 있었다.
하물며 무공을 숨기려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이건 이렇게 펼쳐야 힘이 제대로 전달이 되지.”
“호흡, 호흡부터 지극하게 길어 와야 해. 나 때는 정강이를 얻어맞으면서…….”
긍정적인 방향이었다.
먼저 가는 삼인방이 뒷사람을 끌어 주고, 그 뒷사람은 어린아이를 가르친다.
‘무림의 문파가 이처럼 청정 무량하게 돌아갈 수가 있나?’
비록 장부는 마구잡이로 불어나고 있지만, 저런 모습을 보니 없던 힘이 난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반년.
소식이 끊겼던 백무량이 호광성에서 나타났다.
그는 진정한 영웅이 되었다.
만인이 공포에 떨던 백련교주를 무찌르고, 세상을 향해 자기 뜻을 당당히 밝혔다고 했다.
“역시…….”
현종휘의 눈빛이 그렁그렁하다.
사조님이라면 과거를 극복할 줄 알았다며, 보는 눈이 없었다면 엉엉 울 것처럼 보였다.
나는 어른답게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곧 돌아오신다고 하니 그동안의 성취를 보여 주면 되지 않겠소?”
“그래야죠. 우리가 사조님의 발자취를 좇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요.”
현종휘의 말에 철유와 유성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다가 문득 장문인, 현노윤과 눈이 마주쳤다.
“홍복이지 않습니까?”
“예, 제가 총관이 된 게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현노윤의 얼굴이 예전 같지 않았다.
상처 입은 바위처럼 구멍이 뚫려 있던 인상이 이제는 도가적인 향취가 났다.
어려웠던 시간을 어떻게 극복했을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백 선배겠지.’
과거 구천검으로서 살았던 선배.
그가 곤륜파의 등불이 되었다. 어려운 길을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 나갔다.
후배들은 그저 그 길을 좇았을 뿐이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 그것도 복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백무량 선배께서 돌아오면 기뻐하실 겁니다.”
“……?”
“자리를 비운 지 오래되었지만, 누구 하나 풀어지지 않고, 자기 할 일을 묵묵히 이어 나가지 않았습니까?”
“그렇지요.”
나는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의 곤륜처럼 있으면 될 겁니다.”
“총관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요.”
나는 현노윤과 껄껄 웃었다.
***
“이게 뭐야?”
백무량은 텅 빈 곤륜산 등산로를 보며 허허 웃고 말았다.
“아무도…… 마중이 없어?”
이러려고 대놓고 곤륜으로 돌아간다고 한 게 아닌데.
속내가 복잡해진 백무량을 검해의 망령들이 실컷 놀려 대기 시작했다.
[거의 반년 동안 안 갔으니 잊을 만도 하지.]
[나도 저런 취급은 당한 적이 없는데, 쩝.]
‘시끄럽습니다, 선배들.’
백무량은 인상을 찌푸린 채 천천히 곤륜파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