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215화 (215/275)

망검 (3)

툭.

백무량은 팔첨이 적힌 비급을 무명에게 던졌다.

“뭐, 뭐냐?”

무명이 순간 크게 당황한 듯, 백무량을 휘둥그레진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렇게 화가 났었느냐?”

“……아니요.”

백무량은 고개를 내저으며 답했다.

단순한 호기나 아집 같은 것이 아니었다.

팔첨의 비급은 이제 볼 필요가 없다.

심상의 저변.

그곳에서 후회나 미련을 지우고 나니 눈이 맑아졌다.

‘나의 무학을 완성하는 것은 나다.’

유성백에게 천주부동세를 배웠으되, 유성백처럼 배우지 않았어야 했다.

유성백은 삼단전과 일천세맥에 국한했다. 그마저도 균형을 이루지 못했다. 하단전과 중단전이 너무나도 뛰어나, 상단전이 따라잡지 못한 예시였다.

하지만 백무량은 달랐다.

‘나는 삼단전뿐만 아니라, 검해까지 가지고 있다.’

유성백의 일 초식은 뛰어났다.

백무량의 이목과 감각을 가뿐히 넘어섰다. 어떠한 무인도 유성백을 이기지 못한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백무량이 상대할 적은 무인이 아니었다.

상식 따위는 무시하는, 마도의 정점에 이른 교주들과 마물.

그들과 맞서기 위해서는 유성백의 천주부동세로는 부족했다.

백무량만의 것이 필요하다.

그와 같은 맥락으로…… 공동파의 경파 또한 마찬가지였다.

‘매몰되어 있었다, 나는.’

다른 문파의 무학이라는 생각에 경도되어 있었다는 말이 정확하리라.

백무량은 망검과 여전히 시선을 마주한 채 중얼거렸다.

“모든 무학을 검해에 녹이겠다고 말했으면서, 정작 별개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백선신검에 손을 가져가면서, 백무량은 앞으로 걸었다.

무명과의 싸움에서 어렴풋이 펼쳤던 감각을 떠올렸다.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확실하게 알아차렸다.

수경의 심화.

팔첨을 한순간 펼쳤던 기억이 정신에 남아 있었다.

그렇게 세 걸음쯤인가.

“어딜 가느냐?”

심천검이 다짜고짜 백무량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로선 의아했을 터였다.

무명과 싸우려고 했던 후배가 비급을 내던지고 갑자기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하니, 그 의도가 궁금한 게 당연했다.

이에 백무량은 간단히 답했다.

“팔첨은 충분히 익혔으니, 망검에게 답을 들을 차례입니다.”

“충분히 익혀?”

심천검에게 한 대답이었건만, 무명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비급 한 번 보지 않고 그걸 네가 어찌 아느냐?”

“천중수 아래에서 한 비무. 그때.”

백무량은 무명에게 시선 한 번 던지지 않은 채 말했다.

“난 분명히 팔첨을 펼쳤소. 하지만 선배는 그걸 알려 주지 않았지. 왜였소?”

“……그건.”

“선배도 다른 선배들처럼 사연이 있겠지. 복잡한 과거가 있겠지. 하지만 그래선 안 됐소. 유 선배가 그러했듯, 마주하고서 가르쳐 주었어야지.”

백무량은 변명 따위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매몰찬 목소리로 말했다.

심천검이 듣기에도 백무량의 분노는 합당했다.

“왜 그랬는가?”

“……내가 가르쳐 주려던 것보다 더욱 원초에 가까웠으니까. 좀 더 보고, 확인해야 했네.”

그 말에 심천검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듣고 나니 다행이군.”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가 미련해서 지지부진해질 뻔한 것을, 후배의 재능이 뛰어나서 넘어가게 되었으니까.”

“…….”

무명이 할 말을 잃었다는 듯 고개를 떨궜다.

백무량은 그 모습조차 보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향했다.

망검이 있는 검해의 중앙으로.

수련의 끝을 향해서.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의문을 품었다.

‘방금 그건 뭐였을까?’

백무량의 시선이 잠시 오른손으로 향했다.

아무렇게나 휘두른 행동에 검해 전체가 요동쳤다.

검해의 주인이 된 듯한 전능감이 한순간 있었다.

그때 심천검이 뭐라고 중얼거렸던가?

-저건…… 망검이 언젠가 보여 줬던…….

망검이 보여 줬던 광경이라고 하였다.

백무량은 그 말을 놓치지 않고서 환영진에서 있었던 경험을 연결했다.

‘환영진에 있었던 것은 심천검 선배와 망검의 기억.’

그곳에서 자의가 존재하던 진무월과 만났다.

누구의 기억인지 알려 주지 않겠다는 듯 말했지만, 백무량은 이미 알아차린 지 오래였다.

‘하늘의 뜻이 여기 임했다고도 했지.’

망검.

그가 정녕 곤륜의 개파조사이며 검해의 뿌리라면, 검해를 잇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쟁취할 수 있다.

백무량은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디며 중얼거렸다.

“하물며…… 검해에 모든 무학을 녹이려거든, 내가 주인이 되어야겠지.”

검해를 망검에게서 이어받는다.

그 생각으로 망검을 향해 걸어갔다.

***

망검은 혼란스러웠다.

백무량이 방금 보였던 움직임, 그에 따른 검해의 파도.

그건 백무량의 수련이 검해 전체를 아우르는 정도에 이르렀다는 뜻.

망검이 상정하지 않았던 성장이었다.

‘검해를 완전히 다루려는가.’

검해란, 망검이 후대에 천의를 전하기 위하여 만든 성지이자 심상.

그곳이 통째로 백무량에게 이끌리고 있었다. 인력(引力)이라고 봐도 좋았다.

‘불가능한 일이다.’

망검과 검해는 가히 천 년 동안 결속되었다고 봐도 좋았다.

이제는 이 짐을 놓고 싶어도 버릴 수가 없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백무량이 그 짐을 조금씩 덜어 내고 있었다.

“너…….”

백무량을 향하여 말하려는데 목소리가 떨렸다. 무슨 감정 때문인지는 망검 자신도 알지 못했다.

흥분인가, 떨림인가, 혹은 분노인가.

어느 것도 정확하지 않았다.

감정을 판가름할 정도로 뚜렷한 정신은 이미 더럽혀진 지 오래였다.

“왜냐!”

그저 분노를 쏟아 냈다.

망검에게 가장 익숙한 감정이었고, 검해를 짊어지려는 후배에 대한 책망이었다.

“죽기 전과 후를 합하여 백 년도 되지 않은 놈이 감히, 검해를 짊어지려는 이유가 무어냐!”

“…….”

“네가 실패하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느냐!”

망검의 눈동자에 불이 붙는 듯했다.

이에 백무량이 멀리서 자그마한 목소리로 답했다.

“모릅니다.”

“……네 대에서 모든 것이 끝난다. 네가 실패하면 마물이 부활하여 모든 성지가 부서질 것이다. 검해라고 다르지 않아! 아니, 나보다 더욱 못한 처지가 되겠지.”

앞으로 수천, 혹은 만 년.

다른 성지가 산과 함께 무너질지언정, 심상인 검해는 남는다.

누구도 잇지 못한 채, 홀로 고독하게 미쳐 갈 터였다.

망검은 그것을 감내하고자 했다.

수백 년 동안 후배를 ‘천의’라는 것에 밀어 넣은 자신이 감당할 죄라고 생각했다.

한데 그것을 빼앗겠다니!

망검의 분노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백무량에게 향했다.

“내 꼴을 보고도 검해를 잇겠다고 하느냐?”

“…….”

“네가 그토록 중요시하는 기억, 인연을 모두 끊을 각오가 있느냐?”

“…….”

백무량은 망검의 얼굴을 보았다.

침착하게 미친 무인.

자기 목표와 목적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를 마친 눈이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겠지.’

망검에게 잠시 연민을 느낄 뻔했으나, 금세 지웠다.

그에게 연민이란 감정은 어울리지 않았다.

투쟁과 분노가 어울렸다. 그러한 감정이 아니면 수백, 혹은 천 년 동안 검해를 지탱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렇기에 백무량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뭐?”

“뭐 하러 그래야 합니까?”

“사교와 마물을 죽이겠다는 놈이, 그만한 각오도 없이 여기까지 왔느냐?”

망검의 전신에서 기류가 일렁였다.

수많은 고수와 싸우고, 승리하여 무학을 갈고닦은 무인의 살기가 살갗을 쿡쿡 찔렀다.

환영진의 수련 이후, 이제 막 닿은 천애의 경지를 일찍이 도달한 남자가 바로 망검이었다.

“역시, 강하지만.”

백무량은 망검의 강함을 인정했다.

감정, 기억, 인연.

그 외에도 모든 것을 버리고 성장한 무인이 약할 리가 없었다.

유성백마저도 수십 초식을 교환하는 것이 고작이었던 망검이었다.

그의 무학을 검해를 통해 이어받는다면 큰 도움이 될 터.

백무량의 입술이 가늘게 열렸다.

“선배는.”

백무량은 숨을 갈무리하며 망검의 부족한 점을 꼬집었다.

“여기 너무 오래 있었던 나머지 미쳐 버렸습니다.”

“……허.”

“내가 검해를 잇겠습니다. 그러니 짐을 내려놓고 떠나 하늘에서 결과를 지켜보십시오.”

“내 말을 듣지 않은 것이냐?”

금방이라도 칼을 뽑을 듯한 망검의 모습에 백무량은 고개를 내저었다.

“들었습니다. 내가 실패하면 선배보다 못한 꼴이 될 거고, 완전히 미쳐 버릴 거라고.”

“그 짐은 내가……!”

“역시 대화가 통하지 않는군.”

백무량은 백선신검을 쥐었다.

“검으로 끝냅시다.”

“……!”

“선배의 오랜 망념을 끊어 주는 것이 후배 된 도리일 테니까.”

그 말을 하고서 백무량은 전신의 근육을 잔뜩 긴장시켰다.

곧바로 망검이 선공을 취해 오리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뜻밖에도 망검은 선공을 취하지 않았다.

혼탁하지만 심지가 남은 눈동자로 백무량을 훑어보다가, 한 가지를 물어 왔다.

“후회하지는 않느냐?”

“그게 무슨 말이오?”

“평범하게 살 수도 있었고, 천의를 잇지 않고서 안식을 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거창한 대의 따위 모르는 삶이 편할 터인데…… 후회는 하지 않느냐?”

“…….”

백무량은 잠시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나 길지는 않았다.

“천의를 잇지 않았다면 자유롭게 살다가 죽었을 테고, 그것도 제법 재밌는 삶이었을 테지요.”

“…….”

“하지만 훌륭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과연.”

망검이 중얼거렸다.

“네가 왜 유일하게 검해에 들어서고 나에게서 검해를 이을 수 있는 것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구나.”

“…….”

백무량은 망검의 눈을 보았다.

혼탁하던 눈동자가 약간은 맑아진 채 자신을 또렷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먼 옛날, 곤륜파를 만든 조사의 일면.

그것을 본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지금은 미쳐 버렸다지만 망검은 존경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도사였다.

그 모습을 본 망검이 걸걸하게 웃고는 검을 잡았다.

“나는 그 인사를 받을 자격이 없다.”

“…….”

“검부터 쥐어라, 어린 도사.”

두 도사의 신형이 서로를 교차했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파도가 사방팔방에서 솟구쳤다.

“이게 무슨……!”

백노가 기겁하여 내공을 운용했다.

그러나 심천검과 무명은 달랐다. 파도 내부에서 느껴지는 충격과 소음을 모든 감각으로 느끼면서 깨달았다.

“평범한 싸움은 아니군.”

“검해의 주인을 두고 다투는 것이니, 아마…….”

심천검이 뒷말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둘 중 하나는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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