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진 (3)
검객에게 있어 검(劍)이란 무엇인가?
백무량에겐 의지였다. 검으로써 하고자 하는 것을 행했고, 강함을 증명하고, 멸문했던 사문을 다시 세웠다.
지금이라고 하여 다르지 않다. 오히려 그때보다 더 많은 것을 갈망했다.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마교의 절멸.
그들 뒤에 암약하는 마물과의 싸움.
그것을 모두 검으로 해내고자 했다. 의지의 증명이었다.
“검에 많은 것을 담고 있군.”
진무월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그의 시야에서 백무량의 검은 대해(大海)로 보였다.
기도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대해를 감싸 안은 대양(大洋)의 표상이 눈앞에 있었다.
그렇기에 진무월은 한 가지를 확신했다.
“그래서야 나한테 아무것도 배울 수 없어.”
“……?”
“화검이란 놈은 말이야…… 오묘한 놈이거든.”
진무월이 주먹을 꽉 쥐고서 비틀었다.
백무량은 두 눈을 의심했다.
화르르…….
진무월이 꽉 쥔 주먹.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매화가 흐드러졌다.
매향이 백무량의 인중을 스치고, 새하얗던 도화지에 매화의 문양이 그려졌다.
백노가 만들었을 환영진이 뒤흔들리는 감각.
백무량은 약간의 메스꺼움을 느꼈다.
대부분의 무학을 눈으로 베꼈던 백무량이었지만, 진무월의 화검은 격조가 너무나 높았다.
이에 진무월이 주먹을 펴며 말했다.
“눈이 좋구나.”
“……큭.”
백무량은 핏물을 내뱉으며 진무월의 손을 노려보았다.
매화가 흐드러지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새하얀 손바닥만 보였다. 내공이나 의념의 잔해조차 없었다.
그러나 백무량의 무재는 이미 실마리를 얻었다.
‘어렴풋이, 알았다.’
무엇이라고 딱 정의해서 말할 순 없었다. 하지만 진무월의 손장난에서 어떠한 형상을 보았다.
일천세맥이라는 토양 위에서 삼단전의 조화가 천주의 형상을 이루었듯.
진무월에게도 있었다. 그의 심중(心中)에 존재하는 형상이 있었다.
무공으로 쌓은 업(業), 무학, 정기신.
그것이 무언가를 단단히 받쳐 주는 것을 보았다.
찰나를 수없이 쪼갠 순간에 백무량이 직시한 것.
‘나무 하나.’
백무량이 품은 대해에 비하면 초라한 나무였다.
앙상한 가지에 말라비틀어진 매화가 가까스로 붙어 있다.
줄기가 물기를 머금고 있지 않았다면, 죽은 나무로 착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을까?’
백무량은 자신이 보았던 것을 속으로 갈무리했다.
진무월에게 직접 물을 수도 있었지만, 호의를 살 것 같진 않았다.
심상이란 곧 무인이 생각하는 무학의 종착지.
그것을 읽혔다고 하면 백무량이라도 부끄러워 몸부림칠 터였다.
그래서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눈이 쓸데없이 좋군.”
진무월이 인상을 찌푸렸다. 생전에 이룬 천이통의 이능이 백무량의 생각을 읽어 낸 탓이었다.
백무량은 머쓱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었다.
“알아채셨습니까?”
“……흥, 이래서 곤륜 놈과는 어울리고 싶지 않아.”
진무월이 고개를 홱 돌리자, 백무량이 눈을 빛냈다.
‘저 선배라면 바깥에 있는 선배들의 정체를 알고 있지 않을까?’
환영진에 나타난 존재는 백무량과 검해의 망령에게서 비롯되었을 터.
백무량은 입술을 달싹였다.
“진 선배가 만난 곤륜도가 누굽니까?”
“……뭐?”
“지금까지 선배한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니, 선배도 저한테 알려 주셔야지요.”
“…….”
그 말에 진무월이 잠시 침묵했다.
그가 은연중에 끌어 올린 자하진기가 새하얀 세상, 도화지를 연분홍색으로 물들였다.
그것만으로 환영으로 빚어진 고성진보다 월등히 뛰어난 존재임을 알아차렸다.
‘자의만 있는 게 아니라, 생전의 능력을 그대로 갖추고 있는 게 아닐까?’
무심코 떠올린 가정이지만, 구 할 정도는 확신하고 있었다.
백무량이 창졸간에 보았던 심상.
한 그루의 매화나무를 진무월에게서 보았다.
진무월이 단순한 환영이라면 심상이 있을 리가 없다. 환영진에서 나타났으되, 환영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백무량은 매화비원에서 마주쳤던 진무월을 떠올렸다.
성화교의 후인인 염화를 쉴 새 없이 몰아치던 모습.
그 압도적인 강함은 여전히 생생했다. 시간만 있었다면 자기 혼자서 염화를 무찌르고도 남았을 터였다.
‘평범한 사람은 아니겠지.’
백무량은 진무월이 생각을 정리하기까지 침묵을 지켰다.
곧 스승이 될 사람에게 보이는 존중.
그 모습을 본 진무월이 한쪽 입술을 비틀었다.
“오래 기다렸나?”
“예, 제가 언제까지 검해에 있을지 모르니 노심초사했습니다.”
백무량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반은 농담이었고 반은 진심이었다.
백노의 환영진이 뛰어나다고 하나 근본은 검해에 있다.
백무량이 검해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한계에 달하면, 강제로 떠나게 될 운명이었다.
그 사실을 어렴풋이 알아차린 진무월이 턱을 매만졌다.
“그렇군.”
“하면 이제 알려 주시지요.”
“내가 만난 곤륜도 말이냐?”
진무월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 나한테서 확신을 얻으려고 드는구나. 좋지 않은 버릇이다.”
백무량은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 망검입니까?”
“누군지 모르는 이름이다. 그놈이 가명을 썼다면, 나 또한 존중해야겠지. 이곳에서 나가거든 직접 물어라.”
그렇게 말한 진무월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딘가 해묵은 감정과 사연이 있는 듯한 숨결이라.
백무량은 그에게 재차 물으려고 했으나, 진무월의 반응이 더 빨랐다.
“검객이라면 검으로 대답을 들을 생각을 해야지, 언제까지 묻기만 할 테냐?”
“그 말을 후회하게 될 겁니다, 선배.”
백무량이 손목을 가볍게 휘돌렸다.
그것만으로 천주에 공력이 흘렀다.
처음에는 어색했던 운용이 수경의 묘리를 거쳐 윤택해졌다. 이제는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행공이다.
“후우…….”
지실혈을 스치는 차가운 감각.
태청신공의 공력이 양옆으로 퍼진다.
양옆으로 부옇게 피어오르는 모습은 검해, 대해라는 이름으로 불려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진무월이 오른팔을 들었다.
화르르…….
자하진기가 오른손에서 하나의 검으로 유형화하는 과정.
한 폭의 그림처럼 유려한 광경이었으나 백무량은 저 안에 든 것을 알고 있었다.
‘화산의 화검은 천변만화하여 눈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화검(花劍)은 곧 화검(化劍)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백무량의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유성백에게 배운 천주부동세를 처음으로 체화하는 순간이었다.
“신묘한 무학이로다!”
진무월의 감탄성이 귓가를 스쳤다.
어느새 다가온 매화의 꽃잎, 천변만화하는 칼날이 뺨의 솜털까지 치달았다.
그러나 백무량의 내면은 다른 곳에 있었다.
-자기가 익힌 무(武)를 완벽하게 펼치기 위해, 마보세를 취한다. 더욱 나은 초식의 형(形)을 그리기 위해, 묵상하고…… 허공에 그리는 것이다. 이렇게.
유성백의 가르침.
그리고.
-누구도 막을 수 없을 만큼 강하고,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면 돼.
유성백이 마지막에 펼쳤던 일 초식.
기를 초월한 이(理)의 영역.
그곳에 백무량이 또다시 발을 내디뎠다. 유성백에게 천주무극세를 펼쳤던 때와 같았다.
하지만 완전히 같지만은 않다.
‘그때는 무아지경으로 펼쳤지만, 지금은…….’
백무량은 천주를 통해서 모이는 공력의 감각을 느꼈다.
지금까지 익힌 무학의 총체, ‘베기’라는 개념을 가진 초식들이 손끝에서 합쳐지는 것을 인식했다.
검뢰벽천, 일섬운월, 비룡승운, 심지어는 창천명월까지도.
서로 다른 구결을 가진 초식들이 하나로 합해졌다.
하나의 휘두름에 수백 갈래가 담겼다. 초식의 깊이에 끝이 없었다.
‘따라서 무극(無極).’
백무량은 힘줄 하나, 살갗 하나의 감각까지 끌어올렸다.
“……!”
진무월의 미간이 찌푸려지고, 눈동자가 커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당황하지는 않았다.
그의 품행에는 여유가 있었다.
어떠한 초식일지라도 반응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
그 앞에서 백무량은 입술을 씰룩였다.
-검(劍)으로 붙이기엔 광대하고, 공(功)이라기엔 울림이 약하다.
따라서 세(勢)라고 작명하였으니.
백무량의 공력을 한가득 머금은 백선신검이 휘둘러졌다.
진무월은 그걸 보고서 뒤늦게 공력을 운용했다. 후발선제의 묘리로써 백무량의 콧대를 짓누를 계획이었다.
그러나 백무량의 일 초식은 선(先)의 선(先)에 있었다.
“이건……!”
진무월의 옷깃이 잘렸다.
천변만화한다는 화검마저도 백무량의 일 초식 앞에서 두 동강 났다.
***
“이래서였구나!”
백노의 동굴.
환영진의 진행을 지켜보던 무명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유씨 놈이 왜 졌나 했더니…… 이래서였어!”
유성백의 초식은 누구보다 빠르고, 강력하다.
신공절학을 익힌 백무량마저도 반응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백무량이 이긴 까닭은 역시 천주무극세의 강력함 때문이었다.
‘심지어 저것마저도 완성되지 않은 상태라니.’
무명은 진무월과 백무량의 비무를 계속해서 눈에 담았다.
‘언젠가 나한테 팔첨을 배우러 올 때,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파악해 두어야 한다.’
무명의 눈이 조금씩 백무량의 무학을 파헤쳐 갔다.
***
비무가 끝나고 백무량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진무월을 보았다.
“아무래도 화검은 배우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선배.”
“그게 무슨 망발이냐?”
진무월이 진노를 드러내자, 백무량의 목소리도 자연히 신중해졌다.
“솔직히…… 분심조화결을 계속 갈고닦다 보면 화검과 같은 극점에 도달할 것 같습니다.”
무공이 극에 달하면 하나로 통한다고 하였던가?
화검과 분심조화결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진무월의 화검과 싸우면서 큰 수세에 몰리지 않았다.
오히려 유성백이나 환영진이 빚어낸 고성진이 더더욱 흉험했다.
그들보다 진무월이 더더욱 뛰어난 무인임에도 그러했다.
‘하지만 대놓고 말할 순 없는 법이니.’
백무량은 최대한 속내를 누그러뜨리고서 말했다.
“선배에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덕분에 분심조화결의 발전을 모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실례가 안 된다면 다음 환영과 싸우고 싶습니다만…….”
“…….”
진무월은 인상을 한가득 찌푸린 채 침묵을 유지했다.
천이통의 이능.
그것이 계속해서 백무량의 생각을 전달해 준 탓에 진무월의 속이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스승으로 모시기엔 부족하더냐?”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차마 그렇다고 할 수가 없다.
백무량의 어쭙잖은 배려에 진무월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것까지는 가르쳐 주지 않으려고 했거늘…….”
“예?”
“초식 하나를 가르쳐 주마.”
진무월은 자신의 성명절기를 거론했다.
“유유무극검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