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진 (2)
‘내가 알던 고 선배가 아니야. 무식할 정도로 강하다.’
위화감이 들었다. 백무량이 아는 고성진은 저렇게까지 강하지 않았다.
단순한 일 검에도 강자의 무도(武道)가 담겨 있다.
고성진이 펼치는 경파는 현천신검 척준환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를 압도하는 무게가 있었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네놈이 그러고도 감히 곤륜의 도사라고 할 수 있느냐? 내 친히 네놈의 사지근맥을 끊어 주마!”
환영진이 빚은 고성진은 끝없는 분노를 드러낼 뿐이었다.
정종 무예를 익힌 고수다운 품격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백무량에게는 이상하게 보였다.
‘내가 아는 고 선배는 저렇지 않아. 마치…….’
누군가가 악의적으로 고성진의 어두운 면을 불러낸 것 같다.
카앙!
백무량은 고성진의 살초를 받아넘기면서 전신에 깊게 고른 호흡을 불어 넣었다.
천주가 내공을 머금고서 강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용천혈과 지실혈, 천돌혈이 일체화하는 감각.
그 기류가 상단전까지 이어진다. 수경과 부동세가 엮이니 자그마한 전능감이 일어날 정도였다.
그러나 상대는 경파를 마음대로 다루는 지고한 경지의 검객.
백무량은 상대가 고성진이라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오직 검만을 보았다.
경파(鯨波).
공동파의 무학, 거대한 힘의 파도가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이해한 경파란 무엇이던가.’
백무량의 정신이 심유(深幽)한 영역으로 향했다.
천중수 아래에서 무명과 다퉜던 아미복호검의 수경.
그것만으로 백무량은 자신의 오판을 깨달았다.
그저 한 사람의 무학과 구결을 보았다고 하여 지난 세월의 흐름마저 좇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결국, 백무량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
공동파의 경파가 무엇을 목표하고 있는가.
경파의 극점이란 무엇인가.
또, 그 본질은 어디에 걸쳐 있는가.
‘어느 하나 똑바로 대답할 수 없어.’
백무량은 자기가 어떤 사람인 줄 알았다. 좋게 말해서 주제를 알고 있었다.
‘나는 도학을 배우지도 않았고…… 무학자(武學者)로서 지식을 갖춘 것도 아니야. 그저 단순한 검객일 뿐이지.’
백노가 왜 환영진에 자신을 밀어 넣었을까?
답이야 알고 있다. 백무량을 가르치기에 가장 적합한 방식이 바로 환영진이였으니까.
“하지만…….”
기분이 유쾌하지만은 않다.
백무량은 고성진의 경파와 마주했다.
산사태를 방불케 하는 무거움에 백무량이 손목으로 기교를 부렸다. 측면으로 힘을 흘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
능수능란하게 펼쳐진 화경(化境)의 검초.
고성진의 몸이 옆으로 쭉 기울었다. 경파의 힘을 미처 채 수습하지 못했을 때 백무량의 주법이 휘둘러졌다.
쩌억!
팔꿈치가 옆구리를 때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백무량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소리만 울렸을 뿐, 깊게 들어가지 않았다!’
“경파의 가르침을 검에만 국한하였느냐?”
고성진의 비아냥거림이 백무량의 귀 아래를 스쳤다.
기이한 일이었다. 백무량이 고성진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소리가 위에서 아래로 깔렸어야 마땅했다.
그 말인즉.
‘흐름이 달라졌…….’
쩌억!
고성진은 몸이 기울었던 자세 그대로 팔꿈치를 휘둘렀다. 백무량의 콧대가 순간 주저앉는 것과 동시에 검지를 한 바퀴 돌렸다.
휘르르…….
돌개바람이 백무량의 머리 위에서 일어났다. 한데 바람의 방향이 기괴하기 그지없었다.
한쪽으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포대에 갇힌 사람이 몸부림을 치듯이 사방팔방으로 굽이치는 모습.
백무량의 피부에 닭살이 돋았다. 경파가 저런 식으로 발휘되는 모습은 처음 보았으며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에 고성진이, 아니 고성진의 탈을 쓴 심혼(心魂)이 히죽 웃었다.
“곤륜의 무학만이 존귀한 줄 알았더냐?”
콰콰쾅!
돌개바람이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굉음을 동반했다.
뒤이어 고성진이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돌개바람이 점차 아래로 움직였다.
‘이대로라면 백회혈이 찢길 터.’
아무리 이곳이 환영진이라고 한들, 상단전이 부서진다면 후폭풍이 어떨지 예상할 수 없다.
백무량은 곧바로 천주부동세와 수경을 동시에 펼쳤다.
돌개바람의 힘을 천주부동세로 다스리고, 수경으로 흘리는 묘리였다.
화경의 극한.
백무량의 코에서 핏물이 줄줄 흘렀다. 머릿속에서 윙윙거리는 소음이 동반될 정도로 무리한 운용이었다.
“크윽……!”
백무량은 신음을 흘리며 고성진의 하복부를 발로 찼다.
하지만 고성진의 반응은 노회한 고수처럼 치밀하기까지 했다.
“이까짓 잡스러운 권각술이 통용될 것 같으냐?”
고성진은 한 손으로 백무량의 발을 가볍게 잡아채고는, 다른 한 손으로 무릎을 내리찍었다.
빠득!
백무량의 무릎 관절과 뼈가 동시에 부러지는 소리였다.
“끄윽……!”
백무량의 눈에 실핏줄이 터지자, 고성진이 오른팔을 가볍게 휘돌렸다.
그 단순한 움직임에도 예의 돌개바람이 반원을 그렸다.
‘경파의 달인…… 척준환보다도 강하다……!’
백무량은 아랫입술을 꽉 앙다물며 의념을 집중했다. 수경의 묘리가 부러진 발을 억지로 움직이게 했다.
“검, 오직 검이다.”
백무량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꺾이려는 정신을 고양하고, 백선신검에 공력을 불어 넣었다.
그와 동시에 휘두른 일 검은 가장 익숙한 것.
무의식중에서도 펼칠 수 있는 초식.
“균천관일.”
고성진에게 한쪽 발을 붙잡힌 상태임에도 백무량의 출수는 평소와 같았다.
아니, 전보다 빨랐다.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이라.’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두어라, 얽매임 없이 알기만 하라.
고성진이 펼친 경파를 보고 무심코 떠올린 법문이다.
백무량은 왜 하필 지금 금강경을 떠올렸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펼쳤다. 균천관일의 검기가 길을 만들고, 경파가 흐름을 만들었다.
만상(萬象)이 백무량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
“허, 이놈.”
고성진이 인상을 찡그렸다.
“감히 공동의 종주 앞에서 경파의 가르침을 펼치느냐!”
고성진의 탈을 쓴 고수 아래에 분노로 가득한 심혼(心魂)이 있었다.
그가 재차 돌개바람을 휘두르려는 찰나에 백무량의 만상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꽈드득!
균천관일이 경파의 흐름을 탔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고성진의 거궐혈을 꿰뚫고, 머리 위에 있는 돌개바람마저 부쉈다.
여기에 수경과 천주부동세의 묘리가 뒤섞였다.
이 덕택에 균천관일의 검기는 소임을 다하고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니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풍화뇌동인가.’
백무량은 화산파에서 죽은 선배, 진자충의 무학을 떠올렸다.
무학의 고하를 따지자면 이번 출수가 훨씬 고등했다.
단순히 의념으로 검기를 휘두르는 것과 만상의 흐름을 만드는 것이 같을 리가 없었다.
다만, 백무량은 진자충의 뒷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죽는 순간에도 하늘을 논할 정도로 당당했던 진자충이었다.
‘이번에만 빌리겠소, 선배.’
풍화뇌동의 초식. 그 형태를 떠올렸다.
재구성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백무량의 성취가 진자충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었다.
“놈……!”
고성진이 꿰뚫린 가슴팍을 붙잡은 채 분노를 토했다.
그 모습을 본 백무량이 하늘을 보았다.
쿠궁, 쿠구구…….
새하얗던 도화지가 완전히 붉게 물들어, 점차 무너지고 있었다.
한데 그 안쪽에 연보라색 속지가 비치고 있었다.
환영진이 한 꺼풀 벗겨지는 모습이었다.
‘고 선배 다음에…… 무엇이 더 있구나.’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선배의 역할은 여기서 끝났나 보오.”
그 말과 동시에 백무량이 오른팔을 휘둘렀다.
균천관일의 검기가 고성진의 몸을 꿰뚫는 순간, 그가 입술을 어물거렸다.
“……임은 아직 끝나지, 않아. ……못되었다는 것을, 알아도.”
“……?”
백무량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아는 한, 고성진은 저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환영진을 구성한 누군가의 기억이라는 것인데…….’
과연 누구일까?
백무량이 호기심을 드러내는 찰나에 다음 상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은…….”
***
같은 시각.
백노가 마련한 동굴 안에 세 명의 도사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심천검, 주자령, 망검.
세 도사의 정신력과 기억이 환영진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 백무량의 적수를 구성하고, 구파의 가르침을 덧붙이는 데 집중했다.
그러다 고성진의 탈을 쓴 심혼이 죽는 순간.
한 도사가 눈을 떴다.
“이만하면 되었다.”
망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백노가 황급히 다가갔다.
“하지만 아직 후배의 수련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두 번 말하지 않겠다!”
망검은 인상을 한가득 찡그리고는 동굴 밖으로 나갔다.
***
매화동인 진무월.
매화비원에서 갑자기 나타나 염화를 상대했던 옛 고수.
백무량은 그의 등장에 곧바로 기수식을 취했다. 고성진이 그랬던 것처럼 곧바로 공격해 오리란 생각이었다.
한데 그의 신색이 고성진과는 다르게 평온했다.
“뭐 하고 있나?”
“……?”
“싸우자는 건가?”
“대화가 됩니까?”
생각지 못한 반응에 백무량도 어안이 벙벙했다.
이에 진무월이 껄껄 웃었다.
“내가 요괴처럼 보였나? 잔망스러운 후배로다.”
“하면…… 화산파에서 만났던 걸 기억하십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매화비원에서 선배께서…… 염화교의 마인과 싸우셨지 않습니까?”
“그랬던가?”
진무월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옛일을 잠시 더듬는 듯했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는 듯 고개를 털었다.
“그런 기억이 없네. 이상하군. 매화비원에 마인이 발을 들였다면 반드시 베었을 텐데 말이야.”
“저에게 화검의 무학을 가르쳐 주시기도 했습니다.”
“내가? 자네에게?”
진무월의 표정이 굳었다.
“아무리 자네가 유망한 후배라고 해도…… 다른 문파의 제자에게 무학을 가르쳐 주진 않았을 터인데.”
“남은 시간이 몇 없으니 저한테 눈으로 훔쳐 배우고, 입으로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음.”
한숨을 푹 내쉰 진무월이 백무량에게 한 가지를 물었다.
“스승의 함자가 무엇인가?”
“주자령 되십니다.”
“처음 듣는 이름이군.”
그 이후로도 진무월은 백무량에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이곳에 존재하는 까닭.
세상에 나타난 마교들.
백무량이 목표하는 파천황의 초식.
모든 궁금증을 해소하고 난 뒤, 진무월이 피식 웃었다.
“그럼 지금의 나는 누군가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환영이란 건가?”
“그렇습니다. 한데 아까까지 싸운 환영과는 다르게 선배께선 자의가 있어 보입니다.”
“그야 당연히…… 흠, 여기까지 말할 필요는 없어 보이는군.”
진무월이 팔짱을 끼고는 유쾌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어떤 놈의 기억에서 나왔는지도 알겠고, 하늘의 뜻이 여기 임했다는 것도 알겠다. 하면 할 일은 정해져 있구나.”
“그게 뭡니까?”
진무월이 왜 그런 걸 묻냐는 듯, 당당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검을 들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