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진 (1)
“언제 오나 했다.”
심천검은 빙긋 웃으며 백무량을 맞이했다.
그는 두 망령에게 배우는 동안 구천화우검과 다른 무학을 엮을 방도를 찾아낸 것이 몹시 기꺼웠다.
한데 백무량의 용태가 좋지 않았다.
완전히 누더기가 된 상의, 짓이겨진 상처에서 흐르는 핏물.
누가 보더라도 중상이었다.
검해가 아니라면 두 발로 멀쩡히 걸어 다니는 게 불가능한 상처.
심천검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이만한 짓거리를 할 놈은 하나밖에 없었다.
“무명에게 얼마나 얻어맞은 것이냐?”
“진짜 저렇게 괴팍하고 성격 더러운 사람은 처음입니다.”
백무량은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린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이제 좀 때릴 만하면 다음으로 넘어가자고 그러고, 이제는 다른 무학을 배울 때가 되니…… 다른 스승을 모셔라? 하하! 다 때려치우고 생사결이나 할까 생각했습니다.”
“그 이유야 너도 이해하고 있지 않더냐?”
“그래서 더 짜증이 납니다.”
백무량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팔첨이란 수경의 심화(深化).
상대의 요혈과 약점을 시야에 두고, 자신이 궁구하여 익힌 무학을 동시에 쏟아 내는 살초였다.
지금 당장 익혀도 강해질 수 있었으나 모든 무학을 익히고 나서 팔첨으로 정립하는 것이 나았다.
‘백련교주와 칠성교주 같은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이해해야 한다.
백무량은 그들 뒤에 있는 고대의 마물과 싸워야 할지도 모르니까. 최강의 초식과 무리를 향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얻어맞고 물러났다는 게 백무량의 자존심을 깎았다.
백무량에게 있어 무명은 이제 스승보다는 이겨야 할 대적에 가까웠다.
“어서 시작합시다.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백무량은 호기롭게 대답했다. 얼른 무학을 완성하여 무명에게 한 방 먹이고 싶다는 의지가 강렬하게 불타는 듯했다.
하지만 심천검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네가 제일 싫어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백무량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내심이 쓰리기도 했다.
심천검이라면 다른 망령들과는 다르게 배려를 해주리라고 믿었으니까.
한데 그마저도 저렇게 말한다면…… 분명 쉽지 않은 수련이 될 게 뻔했다.
백무량의 불길한 추측을 방증하듯.
“따라와라.”
심천검답지 않게 무게를 잡았다. 백무량에게 무심코 던진 시선에 미안한 감정이 그득했다.
백무량은 앞서 걸어가는 심천검을 뒤따르며 주변을 살폈다.
한데 그들이 보이지 않았다.
백노와 주백천, 심지어 항상 가부좌를 튼 채 묵상하는 망검까지.
존재감이 없어졌다. 단 한 번도 이러한 적이 없었기에 백무량에겐 생경한 광경으로 자리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묻지 마라.”
“하하, 선배. 우리끼리 이러기입니까?”
“그릇이 비어 있어야 채울 수 있듯, 무지(無知)해야 많은 것을 알 수 있기 마련이라고 했다.”
그 한 마디가 심천검이 백무량에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였다.
그걸 백무량도 단번에 알아차렸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아니, 무슨 소리를 이리 어렵게…….’
가뜩이나 도학을 멀리해온 백무량에게는 심천검이 내준 단서가 헛소리나 다름없었다.
백무량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심천검에게 피식 웃었다.
“갑자기 무슨 선문답입니까? 당최 무슨 소리인지…….”
“겪어보면 안다.”
그 말에 백무량의 등골이 섬뜩해졌다.
무림에서 가장 들으면 안 되는 말로 꼽히는 것.
‘겪어보면 안다, 당해보면 안다…….’
대부분은 겪거나 당하면 죽는단 소리가 아닌가?
하물며 검해에서 유성백이나 무명에게 자주 듣기도 했다.
망치로 강철을 제련하듯, 제자인 백무량을 무식하게 두들기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백무량은 한쪽 입술을 씰룩였다.
“수틀리면 도망갈 수도 있습니다?”
백무량의 농담에 심천검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가 속으로 생각한 것을 백무량이 안다면, 즉시 도망치고도 남으리라.
‘도망도 못 칠 곳으로 네가 가고 있지 않으냐.’
심천검은 말없이 백무량에게 엷은 미소를 보였다.
미안한 마음이 크긴 했지만, 대의와 천의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백노가 선을 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이 동행하고 있으니까. 아무렴 괜찮을 터였다.
아마도.
***
검해의 경계선.
본래라면 아무것도 없어야 할 자리에 백노가 둥지를 틀어, 의념으로 동굴을 하나 만들었다.
그것이 어언 백팔십 년 전의 일이다.
또옥, 똑.
축축한 습기, 칼처럼 날카로운 종유석.
검해에 있어선 안 될 지형이었으나 백노의 집념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예전에는 심천검에게 의미 없는 짓이라고 타박을 들었지만, 백무량의 등장으로 인해 달라졌다.
‘이마저도 하늘이 제시한 길이요, 뜻일지니.’
백노는 심천검과 백무량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언젠가 아무 의미도 없이 사라졌을 동굴이 백무량의 존재 덕택에 쓸모를 찾았다.
‘홍복이다.’
백노는 백무량에게 큰 호의를 품었으나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그 역할은 옆에 있는 주백천으로 충분했다. 자신은 진법을 개발한 옛 선배로서 채찍을 휘두르는 역할로 남아야 했다.
무엇보다…… 이번 수련은 무명이 했을 수련법보다 더욱 흉악했다.
괜히 잘해주는 척 해봐야 악의만 더 살 뿐이었다.
두 도사가 완전히 가까워지자 백노의 입가가 가늘게 열렸다.
“제자 백무량은 동굴 중앙에 앉아 묵상하라.”
“……무슨 수련인지는 말씀해주지 않는 겁니까?”
“네가 익힌 구파의 무학을 숙련되게 익힐 기회가 될 것이다. 그 외에 더 들어야 속이 시원하겠느냐?”
백노의 목소리가 높은음을 냈다. 더 많은 호기심은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것이란 경고처럼 울렸다.
이에 주백천이 백무량에게 조언했다.
“긴장을 풀어라.”
“사형마저도 저한테 뭘 더 숨기시렵니까?”
“숨기려는 것이 아니다. 네 수련에 방해가 될까봐 말하지 않는 거지.”
주백천이 백무량에게 평소처럼 따뜻한 시선을 보냈다.
과거, 백무량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광경이었다.
백무량의 입술이 느릿하게 어물거렸다.
“허, 그러면 사형만 믿겠습니다.”
“……그래.”
주백천의 대답이 묘하게 느렸지만, 잔뜩 긴장한 탓에 느끼지 못했다.
앞으로 다가올 수련이 무엇일지 호기심이 일었다.
툭.
백무량은 차가운 바닥을 엉덩이로 깔아뭉갰다. 호흡을 고요히 정돈하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다음 순간.
백무량이 눈을 떴을 때 예리한 날붙이가 목덜미에 달라붙어 있었다.
“……컥!”
서걱!
백무량의 목이 칼날에 베였다.
일검일살. 경쾌한 파음이 허공을 울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앉아있었던 동굴은 온데간데없었다.
새하얀 도화지 같은 하늘, 바닥.
천지를 분간할 수 없는 공간 속에서 백무량의 시뻘건 핏물만이 흐드러졌다. 텅 빈 도화지에 적색이 번졌다.
“커윽, 컥.”
목이 완전히 베이지 않은 것은 천주 덕택이었다.
백무량은 한 손으로 상처를 막고서 고개를 억지로 들었다.
자신을 습격해온 칼날의 주인.
그 남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도사였다.
“고…… 선배.”
유운검룡 고성진.
그가 분노로 가득 찬 모습으로 백무량을 노려보고 있었다.
“감히 네가 공동파의 무학을 훔쳐 배워?”
‘정당한 내기로 얻은 것이 아니던가.’
백무량은 입술을 어물거리려다가 멈췄다. 검해에서 갑자기 고성진이 나타나 칼을 휘두른다니, 불가능한 일이었다.
‘환영진이구나!’
백노가 만든 동굴 안에서 앉아서 묵상을 취하고 벌어진 일이다.
이번 습격에 존재하는 인과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이런 수련이라고는 말하지 않았…….”
쩌억!
고성진의 칼날이 백무량을 완전히 베고 지나갔다.
***
세 도사는 백무량의 사투를 지켜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공동파의 경파, 화산파의 화검, 보타문의 금강, 무당파의 태극까지…….
백무량이 배운 구파의 무학은 쉽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도학의 배움이 부족한 백무량에게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이에 백노가 한 가지 제의를 꺼냈다.
기억의 재현.
백무량이 기억하고 있는 구파의 도사들에게 심천검과 망검의 경험을 불어넣었다.
그 무학을 완전히 깨닫기 전까지는 탈출할 수 없다. 어찌 보면 고독을 만드는 과정과 같았다.
“도사가 이래도 되는 겁니까?”
주백천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백무량의 패배를 지켜보았다.
어디까지나 환영진이기에 실제로 죽는 건 아니겠지만, 정신적인 충격이 크나클 터였다.
하물며 심천검과 망검이 보통 인물이던가?
구파의 최강자들과 끝없이 싸워야 하는 셈이었다.
망검이 고대의 무인임을 생각하면 백무량은 듣도보도 못한 무공과도 마주해야 했다.
하지만 백노의 표정은 냉정하기만 했다.
“구파의 무학을 완전히 습득하는 것이 쉬운 일인 줄 알았느냐? 이러지 않고서는 단기간에 익히기 어려울 거다.”
“……하지만.”
“망검이 허락했다.”
그 말에 주백천이 망검을 흘낏 쳐다보았다.
감히 예상하기로는, 곤륜파의 개파조사.
이름조차 잊었다고 하는 고대의 도사는 조용히 묵상한 채 백노의 환영진에 기억을 불어넣고 있었다.
한데 그 양이 초월적이었다.
수백 년. 아니, 천 년.
고대에서 싸우고, 어떻게든 장생하여 무공을 습득하고, 검해에 온 무인들과 다투며 무공을 정돈하는 과정.
그동안에 망검은 구파를 비롯하여 사파의 절대고수와도 싸운 경험을 지니고 있었다.
‘저 환영진에서 그들을 모두 이길 때까지 싸워야 한다?’
주백천은 백노에게 한 가지를 물었다.
“선배가 생각하기에 사제가 환영진에서 나오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적어도 이백 년.”
“……그랬다가는 사제의 정신이 망가질 겁니다. 언제까지 검해에 있을지도 모르고요.”
“내가 설마 그걸 모르겠느냐?”
백노가 자신 있게 말했다.
환영진의 시간 흐름은 한없이 느리고, 백무량의 정신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도 설치해두었노라고.
하지만 그것이 정상처럼 보이진 않았다.
무명이 그렇듯 백노 또한 오랫동안 망령으로 지내면서 무언가 결함을 품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무량이가 못 빠져나올지도 모른다.’
주백천이 재차 백노를 설득하려는 차에 심천검의 전음이 들려왔다.
[내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라.]
그 전음에 주백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불안함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백무량은 새하얀 도화지가 붉어졌다가 다시 새하얘지는 광경을 수없이 겪었다.
분노와 짜증 같은 감정이 점차 무뎌지는 것을 느꼈다.
목이 베이는 아픔도 적응이 되었다.
‘이러다가는…….’
저 밖에 있는 망령들처럼 돌아버리는 것이 아닐까?
백무량은 피식 웃었다.
다행히도, 미칠 것 같을 때마다 운룡의 문양이 자그마한 진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자, 어디 한 번 해보자고, 고 선배.”
“놈!”
고성진의 눈에서 귀화가 빛났다.
그것을 본 백무량은 농담을 입에 담았다.
“그렇게 강했으면 마교의 좌호법 정도는 혼자서 이겨 주지 그랬어.”
그랬다.
백무량은 아직 고성진이 망검의 기억에 덧씌워진 것을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