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 (7)
유성백의 청량한 목소리가 귓전을 두들겼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냉정과 짜증, 한이 씻은 듯 없어진 소리였다.
백무량은 말없이 유성백의 미간을 보았다. 언제나 구겨져 있던 이마가 이제는 주름살이 없었다.
‘체력이 부족해진 것, 기침이 잦아진 것 모두.’
이제는 이곳에 집착하여 남아 있을 감정이 쇠한 것이리라.
백무량은 그 과정을 이해했다.
다행이었다. 언제까지고 이곳에 남아 있으면 망검처럼 미치거나, 점차 자기(自己)를 잃었을 터였다.
그러나 그와 수련한 기억이 있다. 천주부동세라는 절학을 나누면서, 점차 욕심을 버리는 그를 보았다.
그리고 지금.
유성백의 얼굴에 제자를 보는 따뜻함만이 남았다.
“네가 나 대신 백련교주와 싸우기 전에 얼마나 기둥을 잘 쌓았는지 봐야겠다.”
“예, 그럽시다.”
백무량은 무정한 척 감정을 절제하여 대답했다.
백선신검을 쥐는 손에는 약간의 떨림이 있었지만, 소매로 가렸다.
쥐는 것과 뽑는 것.
두 행동은 하나로 이어졌다. 두 무인은 그 과정을 순식간에 생략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카가강!
검과 검이 부딪쳤다.
풍파가 일어났다느니, 검해에 파문이 인다느니, 외적인 변화는 없었다.
오로지 백무량과 유성백.
검해에서 끝없는 수련으로 두드린 두 정기신, 두 소우주만이 요동쳤다.
그러나 그 소리는 검해 바닥에서 크게 일어나.
콰콰쾅!
백무량과 수십 보 떨어진 거리에서 물의 기둥이 솟구쳤다. 삼단전과 일천세맥으로 이어진 기둥에 자그마한 상처가 생겼다.
“……큭.”
백무량의 입가에서 신음이 새었다. 만일 이곳이 검해가 아니었다면, 엄청난 내상을 입었을 터였다.
하지만 아직 패배하지는 않았다.
‘아직은 스승에 비해 단단함에서 부족함은 있지만.’
유성백이 가지지 못한 기발함과 기교는 있다.
백무량은 씩 웃었다. 유성백의 손목이 꺾여서 힘줄이 늘어난 것이 보였다.
이것이 바로 유성백의 천주부동세에서 배운, 무아일체(武我一體).
검의 움직임과 기세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백무량이 행하려는 의지가 의념을 일으켜 유성백의 육신에 뚜렷한 상처를 입혔다.
그 과정에서 상당한 내공이 빠져나갔지만, 아무렴 어떤가.
‘나에게 있는 신공을 부정하지 않고 써먹는 것도 실력이지.’
태청신공의 자연 치유력과 응집 능력은 유성백이 익혔을 심법보다 압도적이다.
그걸 알기에 유성백도 큭큭 웃고 말았다.
“재수 없는 제자 놈 같으니.”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면, 이기는 것이 제자의 선물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유성백이 피식 웃고는 발을 놀렸다.
그러자 두 검이 부딪친 공간 사이로 나타난 단창이 시야를 차지했다.
발가락을 한데 모아 만든 단창이라.
기(氣)를 초월하여 이(理). 천주로써 일체, 소우주를 이룬 유성백의 기습이었다.
‘빠르다.’
백무량은 서둘러 몸을 옆으로 움직였다. 창졸간의 움직임이었지만, 지극하게 고른 숨이 폐부를 거쳐 전신을 순환했다.
뒤이어 백무량의 눈에 시퍼런 안광이 벼려졌다. 천주가 분심조화결을 소화하며 일어난 공능이었다.
기의 흐름뿐만 아니라, 소우주마저 읽을 수 있는 ‘이’에 도달한 안력이라.
아무리 유성백일지라도 그 눈을 피할 순 없었다.
백무량의 검격이 자연스레 유성백의 발을 긋고, 목의 맥을 향해 나아가려는 순간.
“언젠가 말했었지, 기습은 두 번째부터 효용을 발휘한다고.”
유성백의 느긋한 어조가 귓전을 스쳤다.
단창을 이루었던 발가락이 장난스럽게 꼼지락거리다가, 옆으로 기울었다.
창이 아니라 도(刀).
단숨에 형체를 바꾼 권각술이 백선신검의 검 면을 때렸다.
우우웅 울리는 소리가 칼에서 손목을 타고 흘렀다. 깊게 세우지 않은 백무량의 천주가 뒤흔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백무량의 정신까지는 흔들지 못했다.
‘상대에게 읽히고 있다는 착각과 불안을 머금어서는 안 된다.’
이 또한 유성백의 가르침이니.
백무량은 배움이 빠른 제자였다. 유성백의 공세가 도로 바뀐 것을 본 이상, 휘말리지는 않았다.
도리어 선의 공격을 면으로 짓누르기로 한다.
백무량의 공력이 백선신검을 타고 시퍼런 색을 흘렸다.
“삼초, 호천풍연.”
백무량이 의도적으로 흘린 초식명에 유성백이 흠칫 놀랐다.
백무량에게 천주부동세를 가르치는 동안, 유성백은 백무량의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지금 떠올린 점은 딱 하나.
“그 초식으로 날 이길 자신이 있다는 뜻이렷다?”
“…….”
백무량은 대답하지 않았다. 공력을 원하는 대로 이끌고, 의념으로 다듬는 과정을 줄이는 것만으로 벅찼다.
완성까지 걸리는 시간은 겨우 찰나.
태청신공의 공력으로 빚어진 경파가 유성백의 하복부와 한쪽 허벅지를 동시에 점했다.
“좋다!”
유성백의 눈동자가 일그러졌다. 빠르게 움직이면서 생긴 잔상이 검해의 표면에 일렁거렸다.
쩌저적!
방어와 공격이 일 초에 뒤섞였다. 경파가 무너지는 것과 동시에 칼날이 백무량에게 향했다.
초식의 정체는 제자인 백무량마저 몰랐다.
유성백이 펼치는 무공이 태을검법과 삼재검법에 한정되어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했다.
-누구도 막을 수 없을 만큼 강하고, 피할 수 없는 정도로 빠르면 돼.
유성백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던 말.
백무량은 그것을 똑똑히 기억했다.
전력을 다한 유성백의 움직임이 상상을 초월하리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생각 이상인데. 무슨 초식인지도 못 알아보겠어.’
그 찰나에 백무량은 두 가지 감정을 품었다.
신공절학을 알지 못하고도 저런 경지에 이르렀다는 경악과 저 유성백이 만든 무공을 익혔다는 자부심.
그러나 유성백은 백무량이 제자로서 꺾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니, 지운다.’
백무량은 정념(情念)에 사로잡히려던 정신을 일깨웠다.
화약을 격발시키는 포수(砲手)처럼 차갑고, 집요하게.
‘내가 상상하는 무극의 일 초.’
예전이라면 상상에 그쳤을 것이다.
그러할 기량이 되지 않고, 삼단전이 망가져 버릴 테니까. 단념하고서 다른 길을 찾았을 백무량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삼단전으로 이루어진 기둥과 그것을 지탱하는 일천세맥.
천주가 백무량의 토양을 다졌다.
기량과 기본기는 묵상과 검무를 통해서 수없이 연습했다.
손가락 한 마디만큼 조금씩 모래를 긁듯이 천천히, 무극의 일 초로 다가갔다.
그렇게 만든 백무량만의 검.
그 검을 다루는 법(法)과 형, 의념의 구성.
‘여기에 곤륜파와는 다른 여섯 무학을 뒤섞어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낸다.’
이것이야말로 백무량이 그리는 무극의 일 초.
백련교주와 칠성교주마저 무너뜨릴 파천황의 초식.
백무량은 그 의념을 검에 주입했다. 천주가 몸을 크게 떨었다.
전신이 뒤흔들릴 정도로 과격한 공력 운용이었다.
“……하아.”
저도 모르게 내쉰 한숨에 아쉬움이 있었다.
아직은 완벽할 수가 없었다. 여섯 무학을 완벽하게 익히지 못했기에, 백노와 주백천의 도움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했다.
“이 제자, 스승을 넘어설 때가 됐소.”
백무량은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 검이 유성백의 초식과 맞물리는 순간, 결판이 나 있었다.
유성백의 상반신을 깊게 파고든 사선의 검형.
누구보다 무겁고, 빠른 검을 추구하던 유성백의 칼은 두 동강 나 검해 아래로 잠기고 있었다.
그러나 유성백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무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검의 이름은 무엇이냐?”
“아직은 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면, 처음 견식한 내가 정해도 되겠나?”
백무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유성백도 고개를 마주 끄덕이고는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천주무극세(天柱無極勢). 검(劍)으로 붙이기엔 광대하고, 공(功)이라기엔 울림이 약하다.”
“좋은 이름입니다.”
“그래야지, 누구에게서 비롯된 무공인데.”
유성백은 온유하게 웃었다. 모든 집착에서 벗어난 검객의 웃음이었다.
다만 눈동자에는 아직 심려가 남아 있었다.
“재수 없는 제자야.”
“예.”
“그놈들을 상대로 이길 수 있겠느냐? 여기 있는 노괴들이 가진 한을…… 모두 담을 수 있겠느냐?”
“그러기 위해 여기까지 왔고, 여기에 있습니다.”
“하, 그래, 영웅담의 주인공이 되겠다고 하였지.”
실소를 터트리던 유성백이 불현듯 하늘을 보았다.
그곳에 길이 있었다.
백무량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유성백은 잔뜩 삭은 밧줄을 보았다.
아주 먼 옛날, 어린 시절.
마을에 쳐들어온 도적 떼에게 살아남기 위하여 숨었던 우물의 밧줄이라.
“하늘은 참으로 괴팍하군. 모든 미련을 버렸을 때, 무공을 처음 배우기 시작한 계기를 보여 줄 줄이야.”
나무꾼이었던 유성백의 아버지는 우물에 아들을 숨기고서 언젠가 무공을 익히라고 했다.
아들에게 살아갈 동력을 주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의외로 소질에 맞았다.
그것이 강호에 천무검성 유성백이라는 기재가 나타난 계기이자 집착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됐다.”
유성백은 보신경을 펼쳐 밧줄을 잡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눈에 미련은 없었다.
“위에서 지켜보겠다.”
유성백은 백무량과 검해의 네 망령을 한차례 보고서 승천했다.
***
“……저렇게 하나둘씩 미련을 버리면 사라지는 겁니까?”
백무량은 무감정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상은 없었다.
그저 다섯 명 중 아무나 답했으면 해서 던진 질문에, 주백천이 대답했다.
“유 선배야 너에게 모든 무공을 남기고서 사라졌지만, 다른 사람은 끝까지 남을지도 모르지.”
“뭐, 어찌 보면 좋은 일이군요. 미련이나 집착 때문에 남은 사람을 내세로 보내 주는 일 아닙니까?”
백무량은 괜한 너스레를 떨었다. 웃음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러지 않으면 처진 마음을 달랠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묵상에 잠겨 있던 망검이 괄괄한 고성을 내질렀다.
“겨우 한 놈 사라졌다고 지저분한 모습을 보일 테냐!”
그 말에 주백천이 너무하다는 듯 목소리를 내었다.
“선배.”
“시끄럽다! 무너질 정신이 있다면, 그것을 다시 고칠 생각을 해야지! 나약해져선 안 된다, 하물며!”
망검의 시선이 세 망령에게 향했다.
“저놈에게 무공 하나 가르쳤다고 미련이 없어져? 사교와 마물에게 품은 증오가 겨우 그 정도라? 옛날에 사라진 놈들과 다를 바 없는 놈들이었구나!”
“…….”
그 말에 백노는 시선을 피했고, 무명은 망검을 강하게 노려보았다.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억지 아니오?”
“뭐라?”
“대의니, 천의니, 포장하지만 죽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에 당신의 역할이 아예 없을까? 하물며 무량 후배처럼 검해를 이은 도사에게 무거운 짐을 주는 것도 옳은 행동인가?”
망검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대답했다.
“그래서야 어찌 잔악무도한 놈들을 이길 수 있단 말이냐?”
“……?”
“모든 법식을 지키고, 도리를 행하면서 사교와 마물을 이기겠다? 군자가 납셨군! 사람을 피 없이 벨 놈이야!”
“허, 이보시오!”
“이곳의 시간이 무한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마땅한 해답 없이 주절거리면서 낭비하느니, 저놈에게 무언가를 가르쳐라!”
망검의 외침에 무명은 크게 한숨을 내쉬곤 백무량의 표정을 살폈다.
겉으론 무표정해 보이지만 아직 유성백에게 감정이 남은 듯했다.
이에 무명은 백무량의 어깨에 손을 가져갔다.
“다음은 내가 가르쳐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