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200화 (200/275)

가르침 (1)

……콰르르.

파도가 흐른다.

물의 결정이 방울방울 튀어 오르며 군집을 이룬다.

하나하나가 검의 초식, 검파(劍把). 오래전 실전된 무공은 기둥이 되어 구천화우검의 밑바탕으로 화한다.

곤륜파의 역사이며.

장구한 싸움의 기록, 그것이 검해라는 심상을 이룬다.

“……아.”

도사는 그것을 멍청히 바라보았다. 망막에 검해를 새겼다.

단 한 번도 믿지 않았던 곤륜의 성지, 전설로만 구전되던 광경을.

“산몸으로 보았다면 좋았을 것을.”

후회를 입에 담았다. 그런데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호선을 그렸다.

곤륜에 검해가 존재한다. 그 사실이 너무나도 기꺼워서, 죽은 몸이라는 걸 무심코 잊었다.

생전의 불행조차도 잊었다.

……콰르르.

어디에서부터 흐르는지조차 알 수 없는 파도.

그 소리가 도사의 마음을 울렸다. 심혼(心魂)이 쿵쿵 울렸다.

눈으로 담는 것만으로 홍복이다.

도사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이것이 무량이에게 이어진다는 것이지.”

보는 것만으로 알았다.

검해와 천의, 마도와의 싸움이 이어지는 수천 년.

도사, 주백천에게만 존재하는 특별함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그런가, 그랬구나.”

성지는 왜 존재하는가.

성지는 왜 모든 도문에 존재하지 않는가.

그 의문이 터무니없이 쉽게 풀렸다. 주백천의 눈이 검해를 훑고, 그 안에 있는 흐름을 읽었다.

“하하, 하하하…….”

주백천은 실성이라도 한 듯이 웃었다.

과거, 검해를 이었던 도사들.

그들이 천의를 깨닫는 모습을 보았다.

멸마척사, 그 기치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마물과 사교들.

마주하는 것만으로 심력을 깎아 먹히는 듯했다.

주백천은 한차례 구역질을 하고서도 끝까지 흐름에 집중했다.

그러자 보였다.

가깝고도 먼 미래에 백무량이 천의를 깨닫는 모습이, 자신의 종질인 주연호가 복잡한 표정으로 다가서는 광경을.

“그때 난 없겠지만, 그래도.”

검해의 존재를 보게 되었으니 얼마나 축복받은 삶인가.

주백천은 빙긋 웃으며 가부좌를 틀었다.

백무량과 주연호가 감내해야 할 천벌을 대신 받을 수 있도록, 천기의 단말을 자신의 몸에 억지로 연결했다.

상천의 깨달음을 얻은 좌도방.

천하를 어지럽히고도 남을 재주를 반대로 역이용했다.

‘괴력난신에게 스러졌을 천의를 되살리고, 무정한 하늘 대신하여 안배를 남기니…… 이로써 족하다.’

곤륜도로서 떳떳하지 않은 일생을 살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천의를 이은 도사, 백무량을 되살렸다. 무정한 하늘 대신 여러 안배를 남겼다.

그것으로 천하가 평화를 되찾는다면 족하다.

주백천이 눈을 스르르 감으려던 그때.

……콰르르.

다시 파도 소리가 귓전을 적셨다.

***

“……사형!”

백무량은 환한 미소로 웃었다.

내심 꿈이 아닌가 싶어 볼을 꼬집고 싶었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주백천을 비롯한 다섯 도사.

한눈에 봐도 비범한 기도를 지닌 도사들이 백무량을 관찰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외눈의 도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우린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건가?”

“뭐, 오래간만의 해후임을 이해해 줘야지!”

기골이 장대한 남자가 껄껄 웃었다.

복식의 연대를 보아 아주 옛날 사람처럼 보였다.

‘도복을 걸친 모습이 어색한데?’

백무량이 잠깐 의문을 품기가 무섭게, 남자가 대답했다.

“곤륜의 도사는 아니야! 사정이 있어서 여기 온 셈이지. 여기, 후배의 사형처럼 말이야.”

“……!”

백무량은 순간 깜짝 놀라서 주백천을 곁눈질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주백천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뜻일 테니까.

그 시선을 온전히 받아 낸 주백천이 부드럽게 웃었다.

“생의 마지막에 천운이 있었다. 육신은 거기에 남았지만, 혼은 검해에 남을 수 있었지.”

“천운이라면……?”

시선을 뗀 백무량이 좌중을 둘러보자 펑퍼짐한 도복을 걸친 도사가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

“후대의 곤륜도는 예(禮)와 덕을 잊었느냐? 어찌 선대를 보고도 인사 하나 없느냐?”

“……아.”

백무량은 그제야 도사들의 정체를 깨달았다.

검해를 이어받았던 역대 곤륜도.

심천검과 마찬가지로, 마교와 싸웠을 과거의 영웅이었다.

이에 백무량이 뒤늦게 입술을 떼려던 그때.

[허, 저놈 봐라?]

심천검의 목소리가 상단전을 울리다가, 점차 바깥으로 퍼졌다.

착각이 아니었다.

스르르…….

상단전에서 벗어난 심천검의 혼이 검해 위로 안착하며 점차 유형화했다.

과거 보타문의 성지에서 마주했던 심천의 노인.

옛 모습을 되찾은 심천검이 백무량을 꾸짖었던 도사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여기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을 놈이…… 고생한단 말은 하지 못할망정 예와 덕을 논해?”

“……!”

심천검의 등장에 도사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놀람이 큰 듯,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선배께서는…… 해탈하여 승천하신 것이…….”

“그러기를 바랐느냐?”

“그것이…….”

“흥! 너야말로 선배한테 인사부터 하지 않고 변명부터 쏟아 내는구나!”

도사의 시선이 잠시 백무량에게 향했다가, 심천검에게 되돌아갔다.

까마득한 후배가 있는데 이쯤에서 끝내 달라는 눈빛.

도사와 시선을 마주한 심천검이 히죽 웃고는 등을 돌렸다.

모처럼 도움을 주었으니 백무량에게 좋은 소리나 들으려고 한 행동이었으나.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백무량은 어느새 주백천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환한 미소, 진심으로 즐겁다는 목소리.

그걸 보고 있자니 심천검도 방해하기가 묘하여 시선을 거두었다.

그 대신 주백천을 제외한 네 도사를 주시했다.

장포를 두른 도사, 이십삼 대 장문인 백노(白老).

외눈의 검사, 천무검성 유성백.

기골이 장대한 남자, 낭인 무명(無名).

‘그리고…….’

심천검의 눈이 체구가 왜소한 도사에게로 향했다.

망검(忘劍).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입을 연 적이 없어, 심천검조차도 정체를 알지 못했다.

그저 엄청난 집념을 가지고 있다는 점만 알았다.

“지금까지 승천하지 못하셨소?”

“…….”

망검이 말없이 검지를 휘둘렀다.

그 움직임에 검해의 물줄기가 뒤따라가 글자를 이뤘다.

[멸마척사]

검해를 이은 도사라면 누구나 품은 뜻이 그에게 원념(怨念)으로 남았다.

심천검 이전부터 검해에 존재했으면서, 다른 도사가 번뇌를 버리는 와중에도 꿋꿋이 뜻을 관철했다.

그렇기에 심천검은 망검에게 한 가지를 물었다.

“어르신이 기억하기에 산몸으로 여기까지 온 도사가 있었소?”

그 말에 망검이 고개를 내저으며 손가락을 휘둘렀다.

[사상초유]

“……역시나.”

심천검은 ‘허’ 하면서 한숨을 내뱉었다.

검해란 곤륜파의 무학이 모인 심지(心地)이자 안식처.

백무량의 마음을 어지럽힐까 말은 하지 않았지만, 검해를 이은 도사가 목숨을 잃으면 도달하는 곳이었다.

그 말인즉.

“어떻게 하면 좋겠소? 어르신이 보기에 저 후배가 검해에 휩쓸리거나 하지 않겠소? 가능하다면 이곳에서 무공을 가르칠까 하오만.”

심상을 수련하면서 맞닿는 변두리와는 달리 이곳은 영의 기운이 짙다.

자칫 잘못하면 정기신의 순환이 끊겨, 생자(生者)로서 돌아갈 수 없게 될 터.

심천검은 그 걱정으로 망검에게 물었으나, 망검의 반응은 놀라울 정도였다.

“심공을 가르쳤나?”

처음으로 듣는 망검의 목소리.

“……예?”

심천검이 순간 말을 더듬었다.

정기신에 품은 독기를 잃지 않도록 묵언하겠다던 그가 처음으로 꺼낸 물음이었다.

무척이나 놀랍게도,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투박하긴 해도 분명…….’

망검의 정체를 추측하던 심천검에게 망검이 재차 말했다.

“두 번은 묻기 싫다.”

“분심조화결입니다.”

“그러하다면, 가능하다.”

망검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심천검과 백노가 눈빛을 교환했다. 곤륜도인 백노 또한 망검의 정체를 어렴풋이 알아차린 듯했다.

뒤이어 심천검이 백무량에게 전음을 날리려던 그때.

“담소를 나눌 여유가 있더냐?”

독기와 아집이 가득한 목소리가 두 도사의 대화를 가로막았다.

주백천의 눈이 순간 커지고, 백무량은 반사적으로 백선신검을 쥐었다.

다만 그것이 전부였다.

쿠콰콰콰!

순식간에 이루어진 발검에 검해의 표면이 뒤집혔다. 아무것도 없던 망검의 손아귀에 어느새 고검(古劍)이 잡혀 있었다.

백무량의 입술이 뒤틀렸다.

‘대체 언제……?’

백무량의 손목이 부르르 떨렸다.

반사적으로 발검을 쳐 내기는 했으나, 충격을 흘리지는 못했다. 근육과 힘줄이 부어오르는 감각이 고통과 함께 찾아왔다.

망검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따위 경지에 머물러서야 어찌 검해를 잇고, 멸마척사의 대의를 이룰 수 있겠느냐?”

“나라고 하여…….”

“그래, 네가 선택하지 않았다?”

망검이 불처럼 피어오르는 안광을 드러냈다.

하나의 뜻에 매몰되어 미쳐 버린 광인.

백무량은 망검에게서 섬뜩함을 느꼈다.

언제든 베겠다는 살의가 망검의 입가에서 줄줄 새었다.

“차라리 네 사형이 잇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몸으로 검해의 심부에 도달할 정신력이라면, 어떻게 했어도 너보다는 나았겠지.”

“이보시오!”

이를 보다 못한 남자, 무명이 망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아직 통성명도 제대로 하지 못한 마당에 무슨 무례요? 시간을 조금 두고서 말했다면…….”

“시골의 무관처럼 화기애애하게 서로 자기소개라도 하자는 것이냐? 나약한 소리는 집어치워라!”

망검의 독심에 무명이 어깨를 으쓱였다.

“미쳤군.”

무명의 말에 동감이라는 듯, 외눈의 검사인 유성백도 한 걸음을 내디뎠다.

“우리라고 마교에게 원한이 크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저기 있는 후배를 존중하는 게 낫지 않겠소? 여태껏 지켜본 바에 따르면.”

“…….”

백무량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곳에 있는 도사와 무인 모두 자신의 행적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뜻이니까!

백무량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지어졌다.

“혹시…… 사형도 보고 계셨습니까?”

“그렇지. 뭐, 네가 정신을 잃거나 잘 때면 안 보였다만.”

주백천의 말에 백무량이 고개를 떨궜다.

사형이 남긴 안배를 찾아다니면서 온갖 낯간지러운 말을 하고 다닌 것이 떠올랐다.

영웅담의 영웅이 되겠다느니, 곤륜재인이라느니.

하나둘씩 했던 말을 떠올리니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망검의 독선을 막을 때였다.

“……어르신께서 누군지는 몰라도 나 또한 검해를 이었고, 백련교주에게 죽임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대화를 끝내고 나면 가르침을 청할 것이고요.”

그 말을 하면서 백무량은 옆을 흘낏 돌아보았다.

반년 가까이 여정을 함께한 심천검이라면 편을 들어 주리란 생각이었다.

한데 그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

게다가 심천검 옆에 있는 백노까지도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서는 전음으로 무언가를 논하고 있는 듯했다.

‘저 어르신이 지체가 높은 건가?’

백무량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때, 망검이 공력을 운용했다.

쿠그그그그…….

검해 전체가 흔들리는 감각이 백무량의 균형을 뒤흔들었다.

그 충격 뒤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을 들어라, 백무량.”

“……?”

“네가 얼마나 부족한지, 여유가 없다는 것을 친히 알려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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