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199화 (199/275)

계승 (5)

터무니없이 많다.

곤륜파의 공부와 병행하기에는 좌도방의 역사가 끝없이 길었다.

무엇보다 주백천이 목표하는 바까지 이르려면, 고대에 치러졌다던 천명제를 복원할 필요가 있었다.

‘어렵다.’

마교와 함께 완전히 유실된 의식을 어찌 찾는단 말인가.

게다가 다른 곤륜도 몰래 행해야 하는 일이었다.

주백천은 착잡한 표정으로 백무량을 보았다.

“사형, 사형, 놀아 줘!”

어제 있었던 일은 까맣게 잊고서 놀아 달라 칭얼거리는 백무량.

그 모습을 보니 운명에 맞서 싸우겠다 결의한 것이 우스웠다.

주백천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백무량의 손을 맞잡았다.

“일단은 걸을까?”

“응!”

백무량이 싱글벙글 마주 웃었다.

‘이 어린 사제도, 이십여 년 뒤면…….’

주백천은 깊은 무게감을 느꼈다.

백무량의 나이가 열다섯이 되는 해.

주백천은 백무량이 내심 품고 있는 불만을 알아차리고서 한 가지를 권했다.

“무림에서 네 또래와 어울려 보는 것이 어떠냐?”

“예?”

“좋지 않으냐, 도사가 아니라 여러 군상과 호흡하다 보면 네 길을 찾게 될 것이다.”

그 말에 백무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형, 근데 언제는 저한테 항상 곤륜산에서 무공을 닦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랬었지.”

주백천은 피로에 지친 미소를 지었다.

백무량의 재능을 보고 내심 기대했었다.

하나를 들으면 셋을 알고 용맹함이 옛 고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으니, 괴력난신과 싸울 만하다고 생각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여겼다.

‘괴력난신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스승님 같은 고수가 수십 명 있더라도 이기지 못해.’

체력이 온전한 괴력난신이라면 그 누구도 이기지 못한다.

그 사실을 어젯밤 별을 보고 깨달았다.

그래서.

“세상이 넓다는 것을 눈에 담는 것 또한 수양의 일환인 법이지.”

백무량을 강호로 보내기로 했다.

거기가 더 편하다면, 강호에 그대로 있길 바랐다.

사문의 위기를 보고도 눈 돌릴 수밖에 없는 위치에 말이다.

“……으음.”

고민에 빠진 백무량이 턱을 매만지는 사이, 주백천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사제의 운명은 왜 이리 불투명하지?’

주백천 자신을 비롯한 친우들, 스승인 주자령마저 괴력난신이 임한 때 죽게 되거늘.

백무량의 운명만은 정해지지 않은 채 꾸물거렸다.

‘설마, 아니 그런.’

지금까지 쌓은 좌도방의 지식과 점괘의 해석.

그것이 머릿속에서 서로 맞부딪치며 역전했다.

과거에 생각 없이 지나쳤던 백무량의 일면이 수없이 떠올랐다.

‘……내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기엔 너무 사소한 일이 아니었던가?’

어린 시절부터 점괘에 통달하였기에 염세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 주백천이었다.

그 모습을 없애기 위해 얼마나 애썼던가?

앞으로 점성을 보지 않겠다고 다짐한 그날에, 왜 하필이면 그런 일갈을 듣고 마음을 고쳐먹게 되었을까?

‘그날부터 뭔가 달라졌었지.’

백무량의 오성을 비롯하여 신체의 발달.

눈부시게 성장하기 시작한 사제가 별다른 까닭 없이 곤륜파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을 때가 있었다.

주백천은 공연히 궁금하여 백무량에게 물었다.

-한 가지만 묻자. 사문의 무엇이 심기를 어지럽히더냐?

-답답하지 않습니까? 뭔가, 이곳에 있는 게 불안하기도 하고.

전자야 백무량의 말버릇 같은 거였지만, 후자는 아니었다.

무의식중에 중얼거린 한마디.

그것이 주백천에게 확신처럼 다가왔다.

‘무량아, 네가.’

하늘이 점지한 도사로구나.

주백천은 경악을 속으로 숨기고서 옛 기록을 탐독했다.

그렇게 며칠을 뒤지니 백무량과 비슷한 선배를 찾을 수 있었다.

심천검.

과거 팔 대 장문인으로서 칠성교와 맞서 싸웠으며, 백선신검을 남긴 영웅.

“비참하게 돌아가셨구나.”

칠성교주에게 동문을 잃고서 홀로 은둔하여, 외로운 여생을 보냈다고.

백무량의 미래처럼 보였다. 아니,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

괴력난신에 의해 피바다가 될 곤륜산.

그때 백무량이 살아남는다고 해도 옛 선배인 심천검처럼 하늘에 의해 운명이 희롱당한다면, 끝내 외로워질 뿐이다.

‘그렇다면 내가 살아남아서 함께하마.’

주백천은 운명을 바꾸기 위해 역천(逆天)을 꿈꾸었다.

좌도방의 위험한 술법을 탐독하고 죽어도 되살아날 방법을 탐구했다.

이때부터 확실하게 선을 넘었다는 것을 자각했지만, 주자령에게 필사적으로 숨겼다.

이 와중에 안배를 하나씩 준비하기 시작했다.

“잠시 곤륜산에서 하산하여 외유를 떠날까 합니다.”

백선신검, 태청신단을 얻게 되는 상인과의 인연, 마교와 싸울 때 필요할 영성과 정보들.

그것을 하나둘씩 준비하면서 속이 점차 곯아 가는 것을 느꼈다.

‘천벌인가.’

단순히 내장이 상했다는 문제가 아니었다.

선천진기, 혹은 혼이라고 불리는 본질.

그것이 더러워지니 걷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괴력난신이 들이닥치기 일 년 전부터는 한 발자국을 걸을 때마다 칼날에 난도질당하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그때 불행이 찾아왔다.

“무량이가 돌아온다고……?”

백련교의 준동.

그 소문을 들은 백무량이 곤륜파로 돌아온다는 소식이 주백천의 억장을 무너뜨렸다.

지금까지 준비했던 이십여 년이 허망해지는 소식이었다.

‘대체 왜?’

괴력난신에 의해 죽지 않도록 강호에 계속 있어야 하지 않던가?

이대로라면 백련교주에게 죽어서, 후일을 도모하지 못할 터인데.

주백천은 독한 마음으로 백무량을 다그쳤다.

“사문이 답답하다고 돌아오지 않겠다던 녀석이 왜 이제 와서 돌아오느냐?”

“……사형께서 곤륜파는 항상 의로웠다고 말씀하셨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백무량의 표정이 철벽과 같았다.

사형이 아무리 험한 말을 하더라도 백련교와 싸우겠다는 의지가 확실하게 전해졌다.

주백천은 깊게 탄식하며 하늘을 보았다.

‘이대로 당신이 점지한 도사가 죽게 할 생각이오? 괴력난신 앞에서는 천의가 소용이 없을진대!’

무정한 하늘에 원망을 쏟아 내고 또 다른 대책을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은 주백천의 의지에 상관없이 흘렀다.

백련교가 코앞까지 오고 나서야 주백천은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후회가 들었다.

‘하늘의 점괘를 읽을 줄 안다고 오만해져, 모든 것이 내 생각대로 돌아가는 줄 알았다.’

심지어 백무량마저도 천의의 노예라고 여겼다.

사제와 함께 천하를 평화롭게 만들고 싶은 욕심 때문에 선을 넘었고, 좌도방의 금지된 술법에 손을 댔다.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던 거야.’

주백천의 시선이 서책으로 향했다.

지난 이십여 년.

모든 점괘와 안배를 기록한 것을 꽉 쥐었다.

뒤이어 되살아나기 위해 준비한 실혼체(失魂體)를 백무량과 연결했다.

‘이것으로 무량이가 백련교주에게 죽는다고 한들, 희망은 남았다.’

그제야 주백천은 번뇌를 벗었다.

하지만 아직 남은 것이 있었다.

‘무량이가 되살아나고 연호가 천명 이상으로 살게 된다면, 또 어떤 변수가 생길지도 몰라.’

그래서 주백천은 주연호에게 서책을 맡기고는 상처 입은 몸으로 무당산을 찾아갔다.

아주 먼 옛날, 천명제를 치렀다고 하는 지맥.

그 안쪽의 동굴에 자리를 잡았다. 가부좌를 틀고서 숨을 크게 내쉬었다.

‘내가 대신 받아 주면 되는 것이다.’

백무량의 부활과 주연호의 삶.

그것이 불러올 천벌을 홀로 감내한다면 천하는 평화를 되찾을 것이다. 아니, 그러할 가능성이 커질 터였다.

“무량이가 보면 어떤 말을 할지, 그건 조금 궁금하구나.”

백무량에게 주백천은 언제나 웃는 사람이었고, 도학자로서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런 주백천이 사실은 좌도방에 손을 대었다.

이마저도 하늘이 점지한 운명일지도 모르지만, 후회하진 않았다.

‘지켜야 할 것과 책무는 확실하게 지켰으니.’

주백천은 눈을 감고서 빙긋 웃었다.

먼 미래에 찾아올 주연호와 백무량의 모습을 떠올리고서.

***

백무량은 긴 시간 동안 침묵했다.

주백천이 평생을 숨겨 온 비밀과 진실.

그것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가 지워지길 반복했다.

그러다 헛웃음을 흘렸다.

“사형, 어쩌다…….”

하늘이 원망스럽기도 했고, 주백천의 선택이 안타깝기도 했다.

진즉 자신에게 털어놓았다면 무언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 않나?

백무량은 대답을 구하려는 듯 주백천을 보았다. 하지만 들숨과 날숨을 반복할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상단전의 이감과 기감이 극도로 발달하였기에 알았다.

지금 이곳에 있는 주백천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본래 백무량과 주연호 때문에 생길 천벌을 모두 받아 냈기에 혼이 타 버린 것이다.

천명을 어긴 주연호가 안식에 들어섰음에도 그 모습은 달라지지 않는다.

좌도방의 최후는 대부분 그러했다.

“백련교와 싸우지 않고 곤륜산에서 떠났어야 했습니까?”

기록을 보고 나서야 떠올랐다.

확실히, 주백천은 자신이 백련교와 싸우는 것을 극구 반대했었다.

그저 사제를 아끼는 마음이라고 여겼거늘.

그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을 줄이야.

‘……내가 사실을 들었다고 한들 그 말대로 했을까?’

백무량은 피식 웃고 말았다.

애초에 천명이라는 것을 믿지도 않을뿐더러, 스승과 사형이 죽는 광경을 두고 보지 못할 성격이었다.

그런 점에서 주백천은 현명했고, 어리석었다.

“이러면 내가 사형의 생로를 열기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 허망하게 느껴지잖소.”

주먹을 꽉 쥐었다. 살갗을 파고든 손톱에서 핏물이 흘렀다.

그러다 목이 꽉 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는 편히 쉬시오, 사형.”

콰르르…….

태청신공의 진기가 따뜻한 구름을 빚어냈다.

그 구름은 가부좌를 튼 주백천에게로 향하여, 온몸을 씻어 내고 음기로 가득한 몸에 양기를 주입했다.

“……!”

우연이었을까?

주백천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마치 자신의 방문을 알아챈 것 같은 반응에 백무량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사형?”

“…….”

주백천은 말없이 오른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동굴의 석벽에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틈이 생겨나 있었다.

[익숙한 기운이구나.]

심천검의 말에 백무량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검해.

혹은 태청신공.

곤륜파만의 고유한 기운이 틈 안쪽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백무량은 홀린 듯이 그곳을 바라보았으나, 선후를 알았다. 주백천의 몸을 수습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백무량의 시선이 주백천에게 향했다.

“사형이 택한 것은 분명 온당하지 않은 방법이었습니다. 좌도방이라니요, 곤륜도의 모범이었던 사형이잖습니까.”

말은 그렇게 꺼냈지만, 당당하게 꺼낸 건 아니었다.

만약 자신이 주백천이었어도 좌도방에 손을 댔을 테니까.

그런 점에서 사형제는 서로 닮아 있었다.

“멀쩡한 모습으로 보길 원했는데 이게 뭡니까? 이게…….”

뒷말은 차마 잇지 못했다.

백무량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주백천의 모습을 다시 눈에 담았다.

그러고 나서야 석벽을 향해 걸어갔다.

쿠르르…….

백무량의 접근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석벽의 틈이 양옆으로 열렸다.

상단전이 만개하는 듯한 감각.

보타문의 성지로 향했을 때와 비슷했다. 현실과는 다른 미증유의 광경이 백무량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여기는!”

[허, 이럴 수가!]

백무량과 심천검 모두 두 눈을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석벽이 열리며 보인 광경은 두 도사에게 있어 매우 익숙하면서 생경한 것이었다.

검해.

곤륜의 무학으로 이루어진 파도 위에 다섯 도사가 있었다.

그들의 얼굴을 확인한 백무량은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지었다.

“사형……!”

주백천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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