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승 (4)
뒤에서 느껴지던 존재감이 희미해진다. 주연호의 마지막 유언이 백무량의 귓전에 와 닿았다.
‘후회는 없노라고.’
백무량은 고개를 떨궜다.
기억 속의 청년이 노인이 되어 죽어 가는 모습이란, 정말로 최악이었다. 하늘에게 따져 물을 수 있거든 온갖 욕을 퍼붓고 싶었다.
그러나 주연호가 자신에게 부탁했다.
칠십여 년 동안의 책무를 마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그 무게가 백무량의 발목을 붙잡았다. 사형의 종질이 죽는 것을 앎에도 갈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놈.”
사숙에게 그런 짓을 벌인단 말인가?
죽는 건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니 마지막 안배를 취해라…… 이런 말을 감히?
‘나는 아직 준비하지 못했는데.’
참으로 이기적인 놈이다. 백무량은 오른손으로 암벽을 후려쳤다.
쩌억!
찢어진 살갗에서 핏물이 흘렀다.
외공을 두르면 흠집조차 나지 않았겠지만, 고통이 불러오는 이성(理性)이 있었다.
백무량은 자신이 본능적으로 취한 행동이 원망스러웠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향하기 위해…… 벽을 친 건가.’
갑갑하던 마음이 핏물에 섞여서 뚝뚝 떨어지는 듯했다.
그 사실이 분노를 불렀지만, 그릇 밖으로 넘치지는 않았다.
완성에 가까운 태청신공과 분심조화결의 수양.
그것이 한데 모이니 성질이 더럽고 괴팍한 백무량마저 이성을 유지하게 했다.
“끅끅.”
그래서 그냥 웃었다. 한껏 더러워진 기분이지만, 그래도 풀려고 웃었다.
바로 그때, 줄곧 침묵하던 심천검이 말을 걸어왔다.
[후배야.]
‘지금은 그냥 둬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네가 언젠가, 완전히 검해를 다스릴 수 있다면…… 다시 마주할 수 있을 거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검해란 곤륜파의 무학이 모인 바다이기도 하나, 넋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다. 내가 왜 이곳에 기거하고 있었겠느냐?]
심천검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검해를 완전히 다스릴 경지에 이른다면, 분명…….]
‘선배의 추측이지요?’
[…….]
백무량의 말에 심천검은 탄식을 흘렸다.
어쩔 수 없었다.
검해를 완전히 다스리는 도사는 심천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으니까.
그저 희망을 주기 위해 꺼낸 말이었다.
그런데 백무량의 반응이 다소 의외였다.
‘어차피 그놈들과 대등하게 싸우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 경지에는 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백무량은 누구도 이루지 못한 경지를 입에 담으면서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검해를 완전히 다스린다.
그것은 즉, 지금까지 곤륜파가 쌓은 무학과 넋을 백무량 혼자서 능가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터무니없는…….]
심천검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가, 피식 웃었다.
백무량과 처음 무예를 겨룬 이후로 그가 뭐라고 말했던가?
선배를 능가하겠다. 그래야 다른 마교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 바로 백무량이었다.
[아니, 후배라면 가능할 거다. 그 짧은 시간에 나를 능가했다면 말이야.]
‘그리 말씀해 주실 줄 알았습니다.’
백무량은 광대한 목표를 가슴에 담고서 앞으로 걸었다.
한 치도 보이지 않는 어둠.
저 안쪽에 주백천과 주연호가 남긴 마지막 안배가 있으리라.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왠지 모를 긴장감에 손바닥이 땀으로 젖었다.
그러다 서서히 빛이 보였다. 바위 틈새에서 불어오는 바람 또한 살갗을 스쳤다.
“……하.”
문득 한숨이 나왔다.
이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상단전의 이감이 어떠한 형상을 불러온 것이다.
언뜻 기시감에 가까웠으나 공력으로 안력을 높이니 끄트머리에서 무언가가 차츰 모습을 드러냈다.
“제발.”
백무량은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상단전이 불러온 형상을 지우기 위함이었으나 눈은 정직했다.
그토록 심각한 중상을 입었던 주백천이 주연호와 재회할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이 동굴 안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
백무량의 모든 감각이 주변을 훑었다.
축축한 습기, 더러운 냄새, 울퉁불퉁한 바닥.
개방의 거지일지라도 자리를 피할 그곳에 한 도사가 가부좌를 튼 채 침묵하고 있었다.
“……사형.”
주백천.
사형의 묘지와 묘비가 갑자기 사라진 까닭을 몰랐다.
심지어는 모두 주백천의 존재를 잊었다.
그가 남긴 것은 오로지 백무량을 위한 안배뿐. 그래서 죽은 줄로만 알았다.
백무량은 주백천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가까워질수록 운룡의 문양이 엄청난 빛을 흩뿌렸다.
그 빛이 주백천의 행색을 드러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이오?”
한쪽 눈은 빛을 잃었고, 군데군데 골절상이 눈에 띄였다. 완전히 피로 물든 장삼에서 출혈의 흔적이 보였다.
한데 그 모습이 백무량이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백련교의 난 때, 그 모습으로 오른손에 쥔 운룡패.
[……천벌을 받은 것이야.]
심천검은 주백천의 상태를 짐작했다.
운룡패를 쥔 손 팔이 완전히 검게 물든 데다 장삼엔 피가 굳은 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출혈이 지속되고 있다는 뜻일 터.
백무량은 주백천 앞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왜, 어쩌다가 이런.”
뒷말이 차마 이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백무량은 잠시 입술을 어물거리다가, 눈을 크게 뜨고는 고개를 휘돌렸다.
주백천이라면 필시 무언가 흔적을 남겼을 테니까.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벽 전체에…….]
철필 같은 것으로 긁어서 적은 듯한 필체.
드문드문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아무래도 몸이 완전히 망가진 상태에서 쓴 듯했다.
과거 명필이라 불렸었던 주백천답지 않은 모습이라.
백무량은 미동도 하지 않는 주백천을 슬픈 눈으로 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 안배.
주백천이 적었을 기록을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
***
하늘은 끈을 내려 줄 뿐, 그 이상의 도움을 주지 않는다.
주백천에게 내려진 끈은 점성이었다.
후일에 나타날 흉조, 스승의 죽음, 사제의 절망.
그것을 모두 읽었으나 해결할 방도는 없었다. 무공을 뒤늦게 익힌다고 한들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을 타인에게 말한다면 끔찍한 천벌이 벌어질 터.
어린 시절부터 주백천은 매일 벌벌 떨면서도 언젠가 도움이 되리란 생각에 점괘를 머릿속에 기록했다.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조차 시련이었으나 어떻게든 버텼다.
남들에겐 웃음을 보였다.
‘이러느니 차라리 읽지 말자.’
매일 괴로워하며 심마를 키우느니 재주 하나 버리는 것이 낫지 않겠나.
마음을 정한 주백천이 하늘에서 눈을 떼기 시작할 때.
인생을 바꿀 사건 하나가 찾아왔다.
-모두가 의로움을 알아주진 않잖아요!
어린 시절, 사제인 백무량이 처음으로 한 반항이었다.
주백천이라고 해서 의로움을 완벽히 알지는 못했다. 그저 도가의 가르침으로 어렴풋이 옳다는 것만을 알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미래의 흉조를 보고도 외면하겠다고 마음을 먹지 않았나.’
그래서.
변명하듯이 말했다.
-답을 찾게 되면 너에게 먼저 말해 주마.
주백천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스승인 주자령마저 감쪽같이 속을 거짓 미소였다.
한데 백무량의 눈빛에서 짙은 실망감이 엿보였다.
단순히 대답을 못 해서가 아니라, 존경하는 사형이 둘러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저, 저는…… 알아주지도 않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리진 않을 거예요. 영웅담의 주인공이 되지도 않을 거고요.
사제가 곤륜파의 대의를 부정했다.
원래대로라면 백무량을 꾸짖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장문인의 제자다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떳떳하질 못하니, 뚱딴지같은 소리가 나왔다.
-그러려무나.
미소를 유지한 채, 네 마음대로 하라는 듯 말했다.
부끄러운 마음은 뒤늦게 찾아왔다.
‘의로움을 저버리려는 내가 사제까지 망치고 있구나.’
주백천은 눈을 지그시 감고서 저울질했다.
점성을 봄으로써 느끼는 두려움과 부끄러움.
앞으로 걸어야 할 고난과 고통…….
그 뒤에 찾아올 천하의 평화라.
주백천은 백무량과 물놀이를 하면서 끝없이 고뇌했다.
‘방법이 있기는 한가? 겨우 이십여 년이다. 그사이에 괴력난신이 곤륜파를 찾아올 거야. 막지 못해.’
주백천의 양팔에 소름이 돋았다.
괴력난신.
단순히 힘이 강한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주변의 별과 어둠마저 집어삼키는 약탈자였다.
‘사람마다 타고난 수명마저 자기 마음대로 빼앗을 수 있는 놈이다. 그런 놈에게 무공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어.’
괴력난신에겐 평범한 방법으로 대적할 수 없으니.
그날 밤, 주백천은 백무량을 처소에 재워 놓고서 스승을 찾아갔다.
“스승님.”
“이런 시간에 무슨 일이더냐?”
“좌도방에 입문하고자 합니다.”
“……!”
주자령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실상 장문인 앞에서 세상을 어지럽히는 도리를 익히겠다는 선언을 한 셈이었다.
아무리 아끼는 제자라고 한들 허락하지 않을 일이었으나…….
주백천의 타고난 기백이 주자령을 주저하게 했다.
“큰 벌을 내리기 전에 묻겠다. 이유가 무엇이냐?”
“이십여 년 뒤.”
주백천이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암운이 곤륜산에 몰려들었다.
천벌의 전조.
뇌운이 모여듦에 주자령의 표정이 굳어졌다.
“……백천아.”
“괴력난신이 강호에 임하여, 곤륜산에 피로 이루어진 강이 흐를 겁니다. 다른 마교가 그를 이용하겠지요.”
꽈과광!
번개가 주백천의 등 뒤에 떨어졌다. 곤륜파의 어린 제자들이 혼비백산하여 사부나 사형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그 와중에도 주백천의 표정은 담담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했던 말을 꺼내듯이.
“천의를 끌어올 겁니다. 하늘이 검해를 이은 도사를 도울 수밖에 없게 만들 것입니다.”
“놈!”
주자령이 고성을 내지르며 칼을 휘둘렀다.
꽈과광!
그 일 검에 주백천을 향해 내리치던 벽력이 잘려 나갔다.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잃었을 상황이었으나, 주백천은 어깨를 잠깐 떨었을 뿐이었다.
그러고서 두 무릎을 꿇었다.
“허락해 주십시오.”
“……나로선 막을 수 없는 것이냐?”
“괴력난신을 비롯하여 세 사교가 도래할 겁니다.”
“셋이라.”
주자령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도 믿지 못할 이야기다. 하물며 네 말에는 증거가 없으니 지나가던 호사가도 부정할 것이다.”
“그렇겠지요.”
주백천은 곧바로 긍정했다.
오래전에 사라졌다고 알려진 마교가 셋이나 있다고 한다면, 그 누구도 믿고 싶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주자령은 믿었다.
“네 결연한 모습과 번개가 내리치던 걸 보아하니 믿음이 간다.”
“……스승님.”
“모두에게 비밀로 하고 익혀라. 다만, 곤륜파의 공부가 뒷전으로 밀리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주자령의 허락에 주백천은 고개를 숙였다.
이때부터가 진정한 시련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