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197화 (197/275)

계승 (3)

주연호를 따라 백무량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이어 무당산의 심부를 향해 한참을 걸었다.

걷는 동안, 백무량은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듯 많은 것을 물었다.

“가정은 이루었느냐?”

“허허, 형님께서 남긴 숙제를 푸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하물며 곤륜도의 법도가 지엄한데, 어찌 가정을 일군답니까?”

“옛날에 네가 옆집 아이가 마음에 든다고…….”

“언제 적의 이야기를 하십니까?”

그렇게 계속 걸으면서, 백무량이 물으면 주연호가 답했다.

대부분 시시콜콜한 질문이었다.

무엇을 좋아하느냐, 명산은 다녀 보았느냐, 도학은 어디까지 떼었느냐.

그때마다 주연호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가끔 호수와 강을 보며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즐겼습니다. 언젠가 형님이나 사숙을 만날 수 있으리라 여기면서요.”

“청성파의 성지에 있던 말뚝은 네가 박은 것이냐?”

“무공이 없는 제가 거기까지 가려면 필요한 물품이었지요. 산신이 노했을까 무섭긴 했습니다.”

“제자 같은 건 없느냐?”

“제자라…… 거두어 봤지만 금세 떨어져 나가더군요. 제가 한때 괴팍해서 말입니다.”

성심성의껏 대답하는 주연호의 목소리에 적잖은 절박함이 느껴졌다.

그 모습에 백무량은 무극진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뭐가 어떻게 되겠나, 순리대로 흐르는 것이지.

주연호와 만나면 어떻게 되냐고 물었을 때 들은 대답.

분심조화결의 통찰로 얻은 직감도 불길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에 백무량의 입술이 고집스럽게 다물어졌다.

‘주화입마에 빠진 낙매신검을 구했을 때처럼…… 무언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나.’

적잖은 슬픔이 백무량의 가슴을 두드렸다.

그것을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대화가 드문드문 끊기니 주연호가 빙긋 웃었다.

“어째 이상합니다. 사숙, 칠십여 년 동안 사람이 달라지기라도 한 겁니까?”

“뭐가 말이냐?”

“사숙이라면 이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살아난 걸 알았으면 재깍재깍 찾아와서 문안이라도 올려야 하지 않냐고, 무정한 놈이라고 탓하면서요.”

“나를 얼마나 가벼운 사람으로 본 게냐?”

백무량이 순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으니, 주연호이 껄껄 웃었다.

“마음이 가는 대로 행하는 사람이 바로 사숙이셨습니다. 한때, 제가 어릴 때는 그런 모습이 대단하게 보였지요.”

“…….”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강호의 풍문을 들으면서 정말 안심이 되었습니다. 어려져도,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달라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요.”

“……여전히 가벼운 사람이라 다행이라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가벼운 것이 어찌 나쁜 것입니까? 깊게 생각하지 않고 협을 행함이 나쁜 게 아닌 것과 마찬가지지요.”

“너도 나이가 드니 말하는 게 조금은 깊어졌다?”

“그럼 제가 옛날, 사숙이 기억하는 청년처럼 굴길 바랐습니까? 하하…… 한번 흉내라도 내 볼까요?”

주연호가 옛날 버릇처럼 팔짱을 끼자 백무량이 손사래를 쳤다.

“징그럽다!”

“이제 사숙이 저를 놀려 먹을 일은 없다는 뜻이지요.”

“나이가 드니 귀여운 맛이 싹 사라졌어, 쯧.”

주연호는 그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앞을 보았다.

어두운 정경 가운데 숲이 있었고 밤벌레가 있었다.

세상사, 이 모습과 다르지 않다.

마교로 인해 혼란해진 천하, 그들과 맞서 싸우다 상처 입는 정파, 이 틈을 타 우짖는 흑도.

예전부터 이렇게 될 것을 알았다. 한때 공포로 얼어붙어서는 방 안에서 열흘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생각을 하니 저절로 호기심이 떠올랐다.

“사숙.”

“왜?”

“불안하거나 무섭지 않았습니까? 갑자기 살아나서, 마교와 싸우고, 멸문한 사문을 재건하는 일이요.”

“……당연히 그랬지.”

백무량이 불만스러운 어투로 담아 두었던 말을 툭툭 내던졌다.

“내가 아는 얼굴은 없고, 되살아난 것 자체도 불안했고, 천기를 거스른 건 아닌가 싶었다. 하늘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어찌 극복하셨습니까?”

“사형에게 못 들었느냐?”

백무량은 잠시 말하길 머뭇거리다가, 옛이야기를 했다.

“영웅담의 주인공이 되기로 했다.”

“……예?”

“백련교주와 싸우기 전에, 사형과 약속을 했었다. 영웅담에 나오는 영웅처럼, 그렇게 살겠다고.”

그렇게 말하고 나서 주연호의 얼굴을 보았다.

“……클클.”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트릴 듯한 모습에 백무량이 인상을 찡그렸다.

“웃으려거든 시원하게 웃어라.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아닙니다. 역시, 형님께서 사숙에게 안배를 맡긴 이유가 있었습니다.”

“……?”

“어떠한 기연이 있고, 재주가 있어도 마교와 대적하려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서두를 뗀 주연호가 백무량을 보았다.

옛날에 누군가가 백무량을 이렇게 말했다.

협을 통찰하지 않은 채 자기가 믿는 길만을 우직하게 가니, 시대에 따라 폭군이 되거나 영웅이 될 것이라고.

그 심지는 혼란한 천하 아래에서 더욱더 굳건해졌다.

영웅의 재목이 눈앞에 있었다.

주연호의 입술이 가늘게 열렸다.

“참으로 다행이지 않습니까?”

“무엇이 말이냐?”

“마교를 일소할 영웅을 도운 도사로서 사문의 기록에 이름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이…… 또, 사숙이라면 저를 기억해 주지 않겠습니까?”

백무량의 안색이 창백해지는 말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모든 건 순리대로 흐른다는 말이 있지요.”

주연호의 발걸음이 멈췄다. 백무량도 자연히 멈췄다.

휘르르…….

두 도사 앞에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동굴이 나타났다.

그 안쪽에서 가공할 만한 바람이 불어왔다.

운룡의 문양이 세찬 빛을 흩뿌렸다.

바람에 가득 담긴 영기.

그 기운이 주연호를 감싸 안더니, 화상으로 인해 막혀 있던 백회혈을 강제로 열었다.

주연호가 부드럽게 웃었다.

“형님은 제가 세상사에 눈을 돌려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랬다면 오래 살아서 사숙이 말씀하셨듯 가정을 이루었을지도 모르지요.”

타고난 수명을 소진했으나, 천하가 혼란하고 백회혈이 막혀 내세로 불러들일 방법이 없다.

무엇보다 주연호를 대신하여 천벌을 짊어지는 이가 있었다.

그렇기에 백무량을 위한 안배를 준비할 수 있었다며, 주연호는 동굴 안쪽을 가리켰다.

“가 보십시오.”

그 말에 백무량이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

“사숙.”

주연호가 눈을 끔뻑였다.

어떻게 해야 저 고집 센 사숙을 보낼 수 있을까, 잠시 고민했다.

점차 시야가 흐릿해져 백무량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백천 형님이 저에게 길을 제시하였다면, 사숙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 주었습니다. 늘 천덕꾸러기로 불렸던 사숙이, 백련교와 싸우길 주저하지 않았던 뒷모습이 칠십여 년을 버티게 했습니다.”

주연호가 흐흐 웃었다.

그 모습이 백무량의 기운을 억지로 북돋우려는 것처럼 보였다.

“형님을 질투해서, 나한테 재주가 없어서, 한탄만 하다가 낭비했을 인생을…… 형님과 사숙이 가치 있게 만들어 준 겁니다. 무당파 장문인과 친우도 되어 봤으니, 대단한 도사가 되지 않았습니까!”

“…….”

백무량이 주먹을 꽉 쥐었다.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너무나도 긴 시간 동안 기다렸을 텐데도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이 녀석아.”

목소리가 메어서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억지로 밝게, 목소리를 꾸며 내서 말했다.

“영웅담의 끝은 듣고 가야지. 결말이 궁금하지도 않더냐?”

“궁금하지요. 사숙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강호의 풍문대로 백무량은 협을 아는 건지…… 옛날 같은 성질이 사라졌는지도 궁금하고요.”

주연호가 아랫입술을 잠시 깨물었다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나 눈만은 서글픈 마음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책무는 이곳에서 끝났습니다. 검해를 계승한 도사인 사숙이 모든 안배를 받아들 때가 온 것이지요.”

“가지 않는다면?”

“천하가 지금의 하늘처럼 어둡게 물들고, 나와 형님이 준비한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되겠지요.”

모든 것이 수포가 된다.

그 말에 백무량이 잠시 하늘을 보았다. 무언가를 원망하는 듯했지만, 정처 없이 떠도는 시선이었다.

하늘이 무심한 것이야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니.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

옛 성현이 말하기를, 천지는 어질지 않다고 하였던가?

글줄로 배웠던 가르침이 폐부를 꾹 짓눌렀다.

백무량은 황망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주연호와 동굴을 번갈아 보았다.

“이대로는…….”

“가십시오.”

주연호가 냉정한 목소리로 백무량의 몸을 떠밀었다.

백무량의 눈이 커졌다.

일찍이 본 것,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광경을 다시 보는 기분이었다.

-갈 길이 바쁘다.

스승의 죽음을 목도하고도 무서우리만큼 단호했던 주백천의 얼굴.

그 얼굴이 주연호에게 있었다.

백무량은 주박에 갇힌 듯한 기분으로 주연호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왜, 주씨는 다들 나한테 왜 그러는 거냐?”

주자령은 홀로 백련교주와 싸워 주백천과 자신이 대피할 시간을 벌었다.

주백천도 다르지 않다. 언젠가 되살아날 자신을 위해 안배를 준비했고, 많은 것을 희생했다.

눈앞에 있는 주연호마저도.

백무량은 들끓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나한테 뭘 맡기질 못해서 안달인 거냐?”

스승, 주자령이 말하였다.

너라면 언젠가 곤륜파 무공을 대성하여 천하를 평정할 것이라며 구천화우검을 전수했다.

사형, 주백천은 웃었다.

언젠가 영웅담의 주인공이 될 사제를 보면서 안배를 준비하였다.

안 본 사이에 노인이 된 아이, 주연호는.

“언제까지 여기서 고민하실 겁니까?”

정을 떨쳐 내려는 듯이 말했다.

백무량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가 죽는 꼴을 보고도 가라고, 그리 말하는 것이냐!”

“누가 사숙에게 그리 말하였습니까?”

주연호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주 먼 옛날, 주백천이 자신을 설득할 때 썼던 말.

그것을 빌렸다.

“강호가? 하늘이? 아니면 검해가?”

“네 백회가 열린 것도 그렇고, 무극진인을 통찰하였을 때…….”

“사라지는 것은 육신일 뿐, 혼과 의지는 사숙에게 남지 않습니까? 백천 형님이 사숙을 위해 움직였듯,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연호가 동굴을 가리켰다.

“가십시오. 나의 책무가 끝날 수 있도록, 칠십여 년의 시간이 수포가 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

“…….”

“백 사숙.”

“……썩을 놈.”

욕을 내뱉은 백무량이 동굴 안쪽으로 걸어가면서 말했다.

“금방 돌아오마.”

“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주백천이 고개를 숙였다.

백회가 열리면서 눈이 완전히 멀어 버렸지만, 안온함이 느껴졌다.

태청신공의 공력이었다.

백무량이 자신을 위해 남겨 놓았을 온기.

주백천은 그것을 만끽하면서 하하 웃었다.

영웅담의 주인공이 되기로 하였다던 그 말을 떠올리니 웃음이 터졌다.

그도 그럴 것이.

“사숙은 이미 저한테 영웅담의 주인공이셨습니다. 모르셨습니까?”

주백천이 등불이었다면 백무량은 앞서 걸어가는 선배였다.

몸이 약했던 주연호에게 있어 백무량의 기행은 멋지게만 보였다. 협을 모르지만, 정(情)은 넘치는 사내였다.

따라서, 그를 위해 움직인 것에.

“미련은 있어도, 후회는 없도다…….”

그것이 주연호가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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