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4)
***
두 시진.
달이 중천에 뜨는 시각, 자시(子時).
어느덧 가을에 가까워진 여름 바람에 녹색의 침엽수가 고개를 세차게 흔든다.
사박거리는 가을의 정취에 가까워진 모습이라.
백무량은 고개를 작게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잡한 감정이 깃든 표정으로 무극진인이 떠났던 방향을 보았다.
‘무당산 중턱이라…….’
아무도 없는 곳에서 만나자고 한 이유가 있을까?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무극진인의 저의를 의심했다.
일종의 버릇이었다.
지난 칠 년, 온갖 난적과 싸우다 보니 상대가 무당파 장문인이라도 의심을 쉬이 놓질 못했다.
무엇보다…….
[막상 만나려니 불안하더냐?]
‘…….’
심천검의 말에 백무량은 잠시 침묵했다.
사실, 두 시진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정확하게는 ‘주연호’.
그 아이를 떠올리다 보니 놀랍기도 했고, 미안해지기도 한 것이다.
‘생각보다 제가 별로 만난 적이 없어서요.’
과거 백무량에게 있어 주연호란 스치듯이 만난 인연.
흔한 인연 중 하나였을 뿐이다.
심지어 백련교의 난 때 녀석은 본가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알고 있는 것이라곤 마음이 여리고 행동이 둔했다는 정도.
그것을 떠올리고 나니 만나는 것이 망설여졌다.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겠고, 다짜고짜 사형의 상태부터 물어볼 것 같아서 말입니다.’
백무량답지 않은 사소한 걱정이고, 격정이었다.
이에 심천검이 말했다.
[일단은 가서 직접 마주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가서 맡겨 놓은 거나 내놔라, 이러기가 조금…….’
[허! 천하의 구천검 백무량이 자기 사질을 만나는 것이 무섭다?]
‘아니, 무섭다는 것이 아니라요.’
[주저하게 된다는 게냐?]
심천검은 피식 웃고서 백무량의 고민을 되짚었다.
[그 아이는 칠십여 년 동안 너를 기다렸을지도 모르는데? 하물며 너에게도 소중한 사형의 종질이 아니더냐?]
‘……그건.’
[지금 모습을 보니 너도 사람이긴 하구나. 평소엔 마인만 봤다 하면 죽음을 도외시하며 싸우더니만.]
심천검이 끌끌 웃는 소리에 백무량도 피식 웃었다.
‘일단은 걷지요.’
그 생각으로 바깥채에서 나와 중턱으로 향했다.
중간에 마주친 도사가 있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무극진인이 조처해 놓은 듯했다.
덕택에 백무량은 내려가면서 달을 보고, 나무를 보고, 길을 보았다.
입산할 때도 느꼈지만 무당산은 눈에 담을 것이 많았다.
조금씩 나무뿌리와 잎을 적시는 이슬.
‘밤에 낮게 으르렁거리는 들짐승조차 조화로다.’
태극의 법식이 산에 있었다.
천천히 걷는 동안 차오른 달빛이 대지를 비추고, 별빛이 주위를 수놓으니.
백무량의 시야가 넓어졌다.
낮과 정오에 느끼지 못하였던 정취가 어둠에 있어, 무형의 영감이 백무량의 정수리를 간지럽혔다.
[어쩌면 무당파의 성지는…….]
심천검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백무량의 묵상(默想)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러운 목소리였으나, 천애의 입구에 달한 백무량에게 있어 풀벌레 소리조차 천둥과 다름없었다.
‘보석이 지천으로 깔려 있으면 그 귀중함을 모른다는 말이 있지요.’
무당산 자체가 성지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그 가능성이 상단전 이감(異感)을 두드리고, 감각을 확대했다.
자연스레 흘러나온 태청신공의 공력이 청운으로 화하여 주변을 장악하니.
시퍼렇게 물든 백무량의 눈동자에 알 수 없는 흐름이 보였다.
시선이 자연스레 동쪽의 봉우리로 향했다.
하나의 줄기보다는 거대한 파도.
곤륜산 정상에 있는 운해에 버금가는 것이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 그때.
“강호의 소문이란 범람하는 바닷물과 같다더니…… 선배에 관하여선 틀림이 없는 것 같소.”
놀라움을 금치 못한 목소리가 백무량의 귓전을 때렸다.
백무량은 저 하늘, 무당산의 옥허봉을 향하던 시선을 거두고서 정면을 보았다.
그곳에 예상치 못한 인물이 있었다.
“……내가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더니?”
“비무를 약조했다고 하여 해검지에 검을 반환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나를 만나고 싶어 하던 거 아니었소?”
무극진인이 뻔뻔한 표정으로 백무량을 응시했다.
그 뒤에 장로로 보이는 한 도사가 진지한 표정으로 백무량을 보고 있었다.
“허.”
백무량은 헛웃음을 흘렸다.
늘 말장난으로 상대를 골탕 먹이던 자신이 이런 식으로 당하게 될 줄이야.
[……큭큭.]
심천검의 웃음소리가 상단전을 둔중하게 울렸다.
이에 백무량은 약간의 짜증을 담고서 말했다.
“이러자고 중턱으로 오라고 한 거였나?”
“선배, 내가 억지를 부린 것을 용서하시오.”
무극진인이 무례를 사죄하겠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한 문파의 수장이 보일 모습이 아니기에, 백무량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이게 무슨.”
“이 몸이 쇠하기 전에 천의를 이은 도사에게 태극의 무를 보여 주고 싶어서 찾아왔소.”
무극진인이 다른 도사를 가리켰다.
“여기 있는 도사는 차기 장문인으로 세울 후배요. 무당파의 장문인이 되기 전에 태극의 혜검(慧劍)을 보여 주고자 데려왔소.”
“……무당의 후배가 구천검 선배를 뵈어 영광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도사의 눈빛이 차기 장문인답게 형형했다.
백무량은 두 도사에게서 결연함을 읽었으나, 궁금증이 들었다.
“어째서 마지막 비무 상대를 나로 정했나?”
“화산파의 장문인이 말해 주었소. 선배가 무학을 읽어 내고 배우는 재주가 뛰어나, 고인(古人)에게서 화산파 무공을 습득하였다고.”
잠시 말을 멈춘 무극진인이 빙긋 웃었다.
그 웃음은 장문인의 무게에서 벗어난 것을 넘어, 젊은 무인과 같았다.
“비록 나이가 들어 검을 놓게 될지언정 천하의 평안을 바라는 마음은 젊은 무인 못지않소. 그러니 나 또한 도울 수밖에 없지요.”
“내가 무당파의 무학을 배워, 바깥에서 쓴다고 해도?”
“그 고집 때문에 천하의 혼란을 잠재우지 못한다면, 삼봉진인께서도 호통을 치시겠지요.”
무당파 무공을 눈으로 훔쳐 배운다고 한들 책임을 묻지 않겠다니?
호사가들이 듣는다면 경악을 금치 못할 말이었다.
하나 무극진인의 표정은 편안하기만 했다.
“나는 장문인이 아니라, 무인으로서 왔소. 그 책임은 여기 있는 후배에게 떠넘기고 왔지.”
“……과연.”
백무량의 눈이 무극진인을 꿰뚫었다.
진기와 신체가 나이를 이기지 못하고 조금씩 무너지는 것이 보였다.
자기가 말했다시피, 무인으로서 싸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무극진인이 어떤 각오를 하고 여기까지 왔는지 백무량으로선 알 수 없었다.
다만 전심전력으로 부딪쳐 오는 것에 당당히 마주해 줄 뿐.
백무량은 복잡한 마음을 안고서 검을 매만졌다.
그러자 무극진인이 후련한 미소를 보였다.
“역시, 선배라면 그렇게 나와 줄 줄 알았소.”
따라오라는 듯, 앞서 걸어가는 무극진인.
그를 따라서 일다경을 걸으니 작은 공터가 나왔다.
백무량과 무극진인은 미리 약조라도 한 것처럼 공터 중앙으로 걸어가고, 차기 장문인은 바깥으로 향했다.
자시 끄트머리.
모두가 잠자리에 들었을 이 시각.
두 도사는 검을 들었다. 그들의 눈이 많은 것을 담았다.
검게 물든 하늘,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그 사이로 보이는 알알이 박힌 별빛.
그 별빛 옆에는 달빛이 있어 땅을 환히 밝혔다.
“마지막 비무를 치르기에, 충분한 불빛이다.”
무극진인이 감회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백무량은 그 모습을 보고서 위화감을 느꼈다.
‘……그때인가.’
현종휘와 비무를 치렀을 때처럼 어스름한 날, 별과 달빛.
하지만 이제 막 자라난 새잎인 현종휘와는 달리, 무극진인은 누렇게 물들어 떨어질 날을 기다리는 낙엽이다.
비애를 느낄 만도 하건만, 무극진인의 기도는 빈틈없이 광대했다.
“내가 먼저 출수해도 되겠소?”
무극진인의 기수식은 언뜻 보면 수수하나 그 안에 무당의 무학이 있었다.
태극의 법식, 흔들림 없는 철심(鐵心).
백무량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마침 무당파의 선공이 어떠한지 궁금한 참이었다.
그와 동시에 경쾌한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퉁.
흙을 차는 것이 아니라, 탄성 있는 물건을 때린 듯한 소리.
무극진인의 몸이 허공을 격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고수의 보신경이란 살초와 다를 바 없다.
이동과 공격이 동시에 행해진다는 뜻.
경로를 읽지 못하면 그대로 일 초를 당하게 된다.
백무량은 즐거운 눈빛으로 무극진인의 움직임을 눈에 담았다.
참으로 흥분되면서 두려운 고민이었다.
[유운신법……!]
머릿속에서 심천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극진인이 펼친 보신경의 정체를 알려 주려는 듯했다.
하지만 백무량은 그것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태극의 무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
스르릉!
거칠게 뽑아 든 백선신검이 울음을 터트렸다.
뒤이어 태청신공의 공력을 한껏 머금은 검기가 두 갈래로 분리되며 각자 다른 무공을 담았다.
구천화우검의 삼초 호천풍연과 아미복호검의 수경.
외형은 비슷하나 완전히 다른 무공이 백무량의 의지 아래에서 뒤섞였다.
금방이라도 무극진인의 신형을 먹어 치울 듯 매서운 출수였기에 차기 장문인이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무극진인의 움직임은 명쾌했다.
[이것이 무당의 혜검(慧劍)이오.]
무극진인의 전음이 풍파에 뒤섞여, 소리가 일그러졌다.
그 때문에 백무량이 인상을 찌푸린 순간.
촤르륵!
백무량의 검기가 일거에 분쇄됐다.
‘보지 못했다.’
시야를 가득 채운 검기가 갑자기 힘을 잃고 사라진 것뿐.
무극진인이 유운신법을 펼치고 있었던 걸 생각하면 가히 신기에 가까웠다.
‘힘 있게 휘두를 상황이 아니었을 텐데?’
하물며 의념으로 절기를 펼친 것도 아니었다. 그런 거라면 상단전의 감각이 곧바로 잡아챘을 터였다.
백무량이 의문을 품고 있던 그때, 무극진인이 가까이서 검을 휘둘러 왔다.
감히 말하건대, 백무량이 봐 온 무공 중 가장 이질적인 검이었다.
‘……허공이 굽었다?’
그렇게밖에 설명이 안 됐다.
열기가 허공을 누비는 것처럼 눈이 빚어낸 착각이 아니었다.
무극진인의 검에서 뻗어 나온 이상(異象)은 분명 실재했다.
조금 전 펼쳤던 검기가 힘을 잃은 이유가 바로 저것이리라.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극진인이라는 고수와 비무를 하겠다면 한 가지는 기억해라.
-억지로 짓누르려고 하지 마라. 태극을 부수는 건 적어도 칠성교주나 백련교주 같은 마도 고수만이 가능할 거다.
심천검이 했던 말이 그대로 떠올랐다.
‘과연…….’
마기로 상리(常理)를 부수는 마공.
그것을 대성한 고수가 아니면 태극을 부술 수 없다고 단언한 이유가 있었다.
일반적인 무공이라면 당연히 불가능할 터였다.
‘공간을 굽힌다니, 참으로 터무니없는 재주다.’
백무량은 무극진인이 일으킨 현상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만약 비무 도중이 아니었다면 극찬을 한 시진 동안 늘어놓았으리라.
그 생각을 읽은 심천검이 긍정의 의사를 보냈다.
[봐라, 내가 그리 말한 이유가 있지 않더냐?]
‘확실히.’
일반적인 검이라면 절대 부수지 못한다.
무당의 위명(偉名)이 급속도로 퍼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렇기에 백무량의 가슴이 뛰었다.
‘저걸 구천화우검에 어떻게 접목하면 될지, 벌써 고민이 됩니다.’
앞으로 부딪치다 보면 무극진인의 무학 또한 읽어 낼 수 있으리라.
백무량의 얼굴에 짙은 호기심과 호승심이 일어났다.
그것을 본 무극진인이 끌끌 웃었다.
“어디, 한번 가져가 보시오.”
무당파 무공에 대한 자신감으로 가득한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