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3)
“그게 진짜인가?”
주씨 성을 가진 도사를 알고 있다니!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고, 그제야 자신의 행동이 급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형이 남긴 마지막 안배라고 하여, 너무 다급했나?’
백무량이 고개를 작게 내젓고는 제자리에 다시 앉았다.
“나에게는 중요한 일이니 잘 떠올려 주면 고맙겠네.”
“……음.”
침음성을 흘린 유환이 밥상을 방 안쪽으로 들여왔다.
“일단은 식사라도 하시지요. 식으면 맛이 없습니다.”
“기다리게 하는 것도 도리에 맞진 않을 터인데.”
“저나 요 옆에 있는 후배도 시간은 충분히 남습니다.”
유환의 말에 장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모르게 유환을 불편해하는 기색이었다.
“편히 드십시오.”
[저런 말을 들으면 더 불편해지지 않더냐?]
심천검의 농에 백무량이 속으로 피식 웃었다.
‘어린 친구야 뭘 몰라서 그랬을 거고, 다른 동도는 기질이 척 봐도 딱딱하지 않습니까?’
한가로이 기다려 줄 테니 식사부터 하시라는 성정.
장서우 같은 친구에게는 고리타분하고 무뚝뚝하게 보이겠지만, 누군가에겐 사려가 깊다는 말을 들을 도사다.
백무량은 최대한 빨리 식사를 마치고는 입가를 슥 닦았다.
유환의 자세는 처음과 같이 정돈되어 있었고, 장서우는 얼룩진 벽지를 쳐다보고 있었다.
끼이익.
백무량이 상을 한쪽으로 치우자 두 도사가 시선을 집중했다.
“그래, 그 도사는 어떻게 알고 있는가?”
“무당산에 간혹 찾아오십니다. 장문인과 깊은 교분이 있으신 걸로 압니다.”
“아…… 그분!”
눈치를 살살 보던 장서우가 자기 허벅지를 때렸다.
“그분이라면 기인(奇人)으로 유명하십니다!”
“서우야, 내가 말씀드리고 있지 않으냐?”
“……예.”
유환의 말에 장서우가 입술을 순간 삐쭉였으나, 백무량이 보기엔 좋은 판단이었다.
‘말실수할지도 모르니 말렸겠지.’
당장 기인만 하더라도 좋기보다 나쁜 뜻이 많지 않던가?
주씨 성을 가진 도사와 백무량이 친분이 있다면, 장서우를 좋게 보지 않으리라.
그 사려가 유환의 속내에 깔린 듯했다.
“일 년에 한두 번씩 찾아와 장문인과 여러 대화를 나누고 가시곤 합니다. 이번에 잠깐 출타하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지금 무당산에 있단 말인가?”
백무량의 얼굴에 미미한 흥분이 떠올랐다.
주연호.
곤륜파의 이십칠 대 제자이자 사질을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니까.
게다가 사형, 주백천의 종질이 아니던가!
‘그 녀석이라면 사형의 행방도 알고 있겠지요?’
[…….]
백무량이 큰 기대를 품으니 심천검이 대답을 주저하다, 한 마디를 툭 뱉었다.
[그 아이가 네가 알던 그때의 모습과 같으리라고 생각하진 마라.]
‘…….’
이번에는 백무량이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 도사의 이름은 아는가?”
“말하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습니다.”
“그림이나 작문에 재주는 있던가?”
“……술을 자주 가져오시곤 했습니다.”
백무량이 순간 헛웃음을 터트렸다.
“천기나 점성에 관한 이야기는?”
“장문인에게 여쭙는 게 더 빠를 것 같습니다.”
백무량의 질문 세례에 유환은 많은 것을 답할 수 없었다.
이대제자로서 볼 수 있는 건, 친분이 깊어 보이는 외견뿐.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알 순 없었다.
심지어 장로나 일대제자도 모를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 이유야 간단하다.
“그분이 찾아오실 때마다 장문인과 함께 가시는 곳이 있습니다.”
그 말에 백무량이 눈을 빛냈다.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무당파의 성지인가?”
유환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음, 대외적으로는 다들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없단 말인가?”
“제가 모르는 것일 수도 있지만, 굳이 숨길 필요가 없는 일이기도 하지요.”
틀린 말이 아니기에 백무량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성지란 문파의 융성(隆盛).
신비로운 광경을 자아내는 지맥은 무인의 영감을 자극하기도 했고, 좌선공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마련이니까.
존재 자체를 문파의 무인에게 숨길 필요가 없다.
백무량은 턱을 매만지다가 중요한 것을 물었다.
“그럼 장문인께서 현재 어디 계신지 아는가? 직접 만나서 묻겠네.”
“그게, 한번 출타하시면 정확한 위치를 말씀해 주시지 않는지라.”
“그렇군.”
백무량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잠시 돌려 얼룩진 벽지를 보았다.
“저건 피 얼룩인가?”
“아…… 며칠 전에 폐병이 있는 사람이 묵어서 말입니다.”
유환이 서둘러 둘러댔으나, 백무량의 감각은 예리한 칼날과 같았다.
“폐병은 무슨, 여기서 누가 싸우기라도 한 모양이군.”
“……흉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서 거짓을 고했습니다. 제가 사죄드리겠습니다.”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백무량은 잠시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옛 과거가 떠올랐다.
“피를 보길 그리 무서워해서야 어찌 험난한 강호에 몸을 담겠냐?”
“저는 백천 형처럼 도학자가 될 건데요?”
“형? 곤륜파의 규율과 법도가 우습게 보이냐?”
“……하여튼, 주 사백처럼 강호의 일에 관여하지 않고 살 거예요. 피도 안 볼 거고요.”
수줍음이 많고 피를 무서워하는 아이였다.
무림과 연을 맺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소리까지 하면서, 검을 피했다.
구명(救命)의 수로 보신경을 가르치려고 해도 가랑이가 아프다며 울곤 했다.
그게 백무량이 기억하는 주연호였다.
‘그랬을진대.’
무당파 장문인과 친분이 깊은 술꾼으로 자랐다니.
백무량은 생각이 많아졌다.
칠십여 년, 오랜 세월의 간극이 이제야 찾아오는 듯했다.
‘난 약관이고, 그놈은 주름투성이 할아버지가 됐다 이 말이지.’
백무량의 말이 사라졌다.
그것을 본 유환이 장서우를 향해 입술을 달싹이더니, 조심스럽게 상을 치워서 나갔다.
그 이후에도.
백무량은 밤이 깊을 때까지 많은 생각에 잠겼다.
***
휘영청 밝은 달이 대지를 밝히고, 밝은 눈을 가진 들짐승이 산을 두리번거리는 시각.
백무량이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처럼 마음이 급하거나, 과거에 깊이 잠겨서가 아니었다.
“누구시오?”
“…….”
침묵에 감도는 불온한 공기.
백무량은 만전을 기한 채 방을 나갔다.
열리는 문, 넓어지는 시야 사이로 허름한 차림새의 노인이 보였다. 감정을 좀체 읽기 힘든 미소였다.
백무량은 다시 한번 입술을 달싹였다.
“누구시냐고 물었소.”
“무당산 한구석에 사는 은둔자요.”
그렇게 말하는 노인의 전신에 순풍이 일었다.
태청신공 못지않은 현기가 주변에 휘도는 듯했다.
‘뻔한 거짓말을.’
저 노인이 은둔자라면 강호십대고수의 위명은 진즉 가라앉아야 한다.
백무량은 속내를 감추고서 노인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그래, 은둔자가 여기까지 무슨 일로 왔소?”
“도사 백무량이 어떤 사람일까 궁금하여 찾아왔지.”
“궁금하였다?”
“마교와 여러 차례 싸웠으며, 최근엔 화산파를 구한 영걸(英傑)이지 않소? 만나지 않고서는 못 배기지.”
그의 말에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에 노인이 물었다.
“왜 웃었지?”
“이곳에서 만난 무당파 도사들은 모두 원칙을 중시하거나 태극의 공부를 우선으로 하였는데, 노인장은 그렇게 보이지 않아서 신선했소.”
“같은 토양이라고 하나 다른 새싹이 자랄 수도 있지 않소?”
목소리에서 숨길 수 없는 호승심과 호기심이라.
둘은 다른 듯해도 무인에게 있어 서로 같았다.
백무량은 노인의 정체를 깨달았지만, 말하지는 않았다.
그저 모르는 척 너스레를 떨었다.
“뉘신지는 모르나, 이런 시간에 찾아오면 내가 오해를 할 수도 있지 않겠소?”
“무엇을?”
“예컨대, 비무를 하러 왔다든가 하는.”
“……허, 들었던 소문대로 혈기가 뜨겁군. 항렬은 누구보다 높을 어르신이 말이오.”
“몸이 어려졌으니까.”
“하기야.”
노인과 백무량이 끌끌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심천검이 궁금증을 표했다.
[왜 말하지 않는 거냐?]
‘여기서 노인의 정체를 말하고 용무를 물으면, 곤륜파와 무당파의 대화가 되니까요.’
무당파의 장문인, 무극진인.
그가 정체를 숨기고서 이런 밤에 찾아온 이유가 분명히 있을 터였다.
그러나 백무량은 그것을 먼저 묻지 않았다.
그저 오래간만에 만난 친우를 마주한 것처럼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눴다.
“술은 좋아하는가?”
“어허, 무당파에 사는 은둔자가 어찌…….”
“은둔하니까 몰래 마실 수도 있지.”
“크흠, 흠.”
자그마한 일탈부터 시작하여 무공에 대한 담론과 최근 범람한 마교와 흑도.
그때마다 백무량과 정체를 숨긴 무극진인은 여러 답을 내놓고 농담을 던졌다.
그렇게 한 시진이 지나니, 무극진인이 쓰디쓴 것을 내뱉듯 말했다.
“주씨 성의 도사를 만나러 왔다지?”
“그래.”
“만나지 않고서 돌아갈 생각은 없나?”
“…….”
백무량은 말없이 무극진인과 시선을 마주했다.
심유한 눈은 언뜻 보면 공허한 듯해도, 그 안에는 여러 감정이 많았다.
분심조화결로 상단전을 수련하면서 생긴 이능이 무극진인을 꿰뚫으니.
‘내가 사형의 종질을 만나면, 무언가 사달이 나는구나.’
가슴 한쪽이 축축 젖어 드는 결과가 돌아왔다.
백무량은 무극진인에게 대놓고 물었다.
“내가 그를 만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뭐가 어떻게 되겠나, 순리대로 흐르는 것이지.”
무극진인이 뜨거운 숨을 토했다.
한여름임에도 그가 내뱉은 입김이 하얗게 떴다.
그것을 묵묵히 지켜보던 백무량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극진인.”
“…….”
무극진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눈가가 가늘어졌다.
상대를 꿰뚫어 보고자 하는 눈.
그 시선에 백무량은 맞대응하듯, 혹은 도발하듯 똑바로 맞췄다.
분심조화결의 수련이 이때 빛을 발하여 무극진인의 수는 수포가 되었다.
이에 무극진인이 물었다.
“이제 와서 왜 암막(暗幕)을 드러내는 건가?”
“언제까지 편하게 대화할 수는 없으니까. 미룬다고 하여, 달라질 것은 없으니까.”
“……그랬지, 세상사는 늘 그러하였으니.”
무극진인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가끔 움직이는 얼굴 주름만이 만감이 교차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했다.
백무량은 그의 답을 차분히 기다렸다.
그렇게 짧은 시간이 흐르고, 무극진인이 입술을 달싹였다.
“사실은 선배한테 많은 것을 묻고 싶었소. 천의를 이을 자격, 무공, 정신, 그런 게 있다면 무엇인지, 내가 대신 이을 순 없는지 말이오.”
“…….”
“그러나 지금 보니 알겠군. 선배는…….”
무극진인이 하려던 말을 멈췄다.
비무로써 무공을 가늠하고 싶었던 걸까, 혹은 속내를 묻고자 함이었을까?
무극진인이 뒷말을 꺼내지 않았기에 모를 일이다.
다만 간단한 질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무극진인의 기세에서 심유한 기파가 풍겼으니까.
심천검이나 진무월에 비교하여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힘.
‘저것이 선배가 말했던 태극의 묘요?’
[……그래.]
심천검의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무극진인이 시간과 장소를 정했다.
“두 시진 뒤, 무당파 중턱으로 와 주시오.”
무극진인이 등을 돌리며 하려던 말을 이었다.
“그곳에 선배가 보고 싶어 하던 사람이 있을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