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2)
구천검 백무량은 협을 모른다.
과거에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실제로 일으킨 많은 구설수와 싸움.
백련교와 싸운 영웅이라는 밝음이 있는 만큼 어두운 일화도 많은 사람이었다.
곤륜도이면서 낭인과 곧잘 어울려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그 때문에 당시 호사가들은 말했다.
-백련교와 싸운 것은 어디까지나 곤륜파여서지, 다른 문파였다면 끝까지 재평가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나 지금의 모습은 어떠한가?
“언동이 차분하거나 부드럽지 않을지언정 유협(遊俠)의 뜻을 이은 도사의 모습이로다.”
한 중년인이 감탄을 터트렸다.
그는 호광성 일대에서 명망이 높은 호사가로서 매사를 차가운 눈으로 보는 것으로 유명했다.
“좌중을 꾸짖고 대의로 이끌며 독려하는 모습이 마치 과거 백 대협의 사부인 태청선을 보는 듯하오!”
태청선 주자령.
구천검의 사부이자 백련교와 싸우다 전사한 도사의 이름.
백무량은 그 이름을 꺼낸 중년인을 보았다.
물론, 그 중년인이 얼마나 명망이 높은지는 몰랐다.
“자네는 누구인데 나의 사부를 논하는가?”
“나는 주서자(朱書子)요.”
“그래, 호사가 양반, 떠들기 좋아하여 나의 사부를 거론한 죄를 묻진 않겠으니 내가 말한 것이나 잘 퍼트리시오.”
그 말에 젊은 호사가 몇몇이 눈을 끔뻑였다.
걱정과 불안이 있었다.
그들이 아는 주서자라면 무언가 반발을 하거나, 호사가를 매화자(賣話者) 취급한다며 꾸짖을지도 모르니까.
한데 주서자의 얼굴엔 부드러운 미소만이 있었다.
“당연히 그리하겠소. 태청선의 존명(尊名)을 거론하여 기분이 상하였다면 사죄하겠소.”
“아니, 뭐, 사죄까진 필요 없네. 그냥…… 돌아가신 사부님의 이름을 여기서 왜 꺼내었나 했지.”
“모르셨소? 소싯적 태청선께선 도사임에도 농사법을 배우고 연구하여 청해성의 기근을 해소하곤 했소. 백련교의 난 때 제자들을 불러 모아 꾸짖고 독려한 것도 기록에 남았지.”
“…….”
백무량은 잠시 말을 잃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강호에서 뒤늦게 도착하여 몰랐다.
사부가 그러한 행동을 하였다는 것을.
백련교와 대치한 곤륜도의 표정이 그리 비장하였던 이유를.
[훌륭한 사부를 두었구나, 후배.]
심천검의 말에 백무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어떻게 이해하였는지, 주서자가 탄복했단 표정을 짓고는 허리를 숙였다.
“내, 지금까지 오해하고 있었소이다!”
“……?”
“구천검 백무량은 우연히 백련교의 난에 휘말린 말썽꾼이고, 이름이 같은 어린 도사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그지없는 생각이었소이다!”
주서자의 큰 목소리에 다른 호사가들을 동조했다.
“과연…….”
“지금 보니 언동이 격해도, 마음은 곤륜의 도와 협을 향하니…….”
저마다 말을 조금씩 덧붙이니 백무량의 고개가 슬며시 돌아갔다.
부끄러움이 컸다.
‘저 사람들, 왜 저럽니까?’
[왜 그러겠느냐? 지금까지의 네 행동과 실제로 마주 한 모습을 보고 그동안 오판한 것을 인정한 것이지.]
심천검은 평소답지 않게 온화한 어조로 백무량을 칭찬하고 조언했다.
[언제까지 얼굴을 붉힐 생각이냐? 앞을 봐라. 네가 행한 것을 똑바로 보고 말해 줄 사람이 앞에 있지 않으냐? 고개를 들어라.]
심천검의 말에 백무량은 돌렸던 고개를 바로 했다.
그제야 보였다.
과거, 망나니 보듯 하던 호사가들이 이제는 존경과 흠모의 눈빛을 보냈다.
백무량의 입술이 흐물거리듯 조금씩 호선을 그렸다.
구천검 시절 어떠했던가?
싸우고, 시비가 붙고, 강호를 주유하며 많은 사건을 벌였다. 의로운 검객에게 상처 입힌 적도 적지 않았다.
그때에 비하면, 달라졌다.
주서자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오늘 여기서 들은 대협의 말투는 근래 여러 곳에서 들었듯이 여전히 밉살맞고, 험했소이다. 말을 업으로 삼는 나조차도 순간 당황할 뻔했지요.”
“……어, 음.”
백무량이 순간 머쓱한 표정을 지음에 주서자가 껄껄 웃었다.
“하나 이곳에 있는 자라면 모두가 알 것입니다. 대협께서 바라는 대로 퍼트리기도 할 것이오. 그게 우리가 먹고사는 방식이니까.”
주서자의 시선이 잠시 옆으로 향했다. 그러자 다른 호사가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구천검은 그저 망나니가 아니었다. 그 안에는 마땅한 협이 있으며, 현존하는 백무량은 마교의 절멸을 위하여 신분을 숨기고 활동하였었다.”
“뭐…… 사문의 명예를 되찾으려고 움직인 것도 있지.”
백무량이 변명하듯 덧붙인 말에 주서자는 고개를 내저었다.
“집안을 가꾸는 것이야 대장부라면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누구라도 그럴 것을 왜 낯을 붉히면서 말씀하시는지.”
“크흠.”
백무량은 헛기침하며 뺨을 매만졌다.
자화자찬이야 심천검에게 농담하듯 자주 했지만, 남에게 인정을 받는 일은 흔치 않았기에 부끄러움이 많았다.
이에 심천검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내가 그렇다고 하면 믿겠느냐?]
‘예?’
[심해에 기거하는 동안 보았다. 그리고 상단전에 옮겨 가면서, 지금까지도 말이야.]
심천검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배한테 여전히 버릇없이 굴곤 하지만 무림에게 있어 홍복이 아니더냐? 검해를 잇고, 하늘이 돕는 도사라. 섭리에는 어긋나나 천하는 평안하게 변하니…… 하늘이 무정하지만은 않다는 뜻이겠지.]
‘선배…….’
백무량이 잠시 감동에 젖으려는 순간, 심천검이 웃음소리를 뚝 끊었다.
[나한테는 몹시 무정한 놈아.]
‘……존경할 수 있는 모습을 보이셔야 제가 대접을 하지요.’
농담을 가볍게 받아친 백무량은 주서자에게 밝은 미소를 보였다.
“하면 앞으로 기대하겠네.”
“대협께선 앞으로 귀를 조심하셔야 할 것이오! 내 목청이 워낙 크니까!”
주서자가 극진한 예를 표하니 백무량도 포권으로 대답했다.
***
무당산에서의 대화가 끝나자, 한 도사가 백무량을 바깥채로 안내했다.
안은 생각보다 단출했다.
이부자리와 책상, 문방사우.
딱 갖출 것만 갖추었다. 무당파가 손님을 위해 마련하는 숙소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였지만, 백무량은 내심 이해했다.
‘내가 아니라 무림맹주가 왔어도 이런 곳으로 안내했겠지.’
많은 것을 탐내지 않는다.
무당파의 가르침이란 그러했다.
그렇다고 크게 불편하지도 않아서, 백무량은 털썩 주저앉고서 호흡을 골랐다.
“후우…….”
등산로에서 느꼈듯, 무당산의 영험한 기운이 산 전체에 존재했다.
마치 곤륜산 정상에 존재하는 운해처럼.
깨끗하고 맑은 기운이 좌선공의 행공을 도왔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휴식다운 휴식이구나.’
백무량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맺혔다.
곤륜파에서 나온 이래로 정말 많은 사람과 엮이고, 싸웠다.
이처럼 홀로 있는 시간이 조금 그리워질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때쯤.
“중식은 어찌하시겠습니까?”
문 너머에서 그림자 하나가 허리를 숙였다.
다른 문파의 도사에게 보인다기엔 너무 공손한 태도였다.
행공을 멈춘 백무량이 짧게 대답했다.
“문 앞에 놓아주면 먹고 내놓겠네.”
“알겠습니다.”
허리를 편 그림자가 물러났다.
백무량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호의를 샀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어렵게 보였나?’
주서자를 비롯한 호사가와의 대화.
그것으로 무당파의 도사들에게 호감을 산 건 맞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어려운 대선배라는 인상을 남긴 듯했다.
‘성격이 괄괄하고, 호전적이며, 항렬은 무지막지하게 높은 선배인가.’
성격이 자유분방한 백무량도 어렵게 느껴질진대, 태극을 수학하는 무당파 도사는 어떠하겠는가?
그것도 어린 도사라면?
백무량은 쯧 하고 혀를 찼다.
‘나 때는 고수라면 뭐라도 배우려고 가르침을 청했는데.’
[내 앞에서 과거 이야기를 하느냐? 내가 들려주랴?]
‘아니, 선배 시절은 너무 멀잖습니까.’
[네가 내 얘길 들으나, 저 아이들이 네 얘길 들으나 똑같지.]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아서 백무량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처음에는 현기 가득한 도사인 줄 알았더니, 가면 갈수록 까칠한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까칠……?]
‘들렸습니까?’
[네가 들리라고 둔 건 아니고?]
‘설마요.’
분심조화결의 성취를 조금 더 늘릴 필요가 있겠다.
그렇게 생각하던 차에 다른 그림자가 문 너머로 침습해 왔다.
“저기, 안에 계시는지요?”
“누구인가?”
“해검지에서 한차례 뵈었던…… 장서우라고 합니다.”
“오, 들어오게.”
“하면, 실례하겠습니다.”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온 장서우가 곧바로 포권을 취했다.
어딘가 엉성했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여 우스웠다.
백무량은 피식 웃고서 책상 맞은편을 가리켰다.
“길게 얘기할 것이라면 앉아서 하는 게 어떻겠나?”
“그럴까요?”
“서서 얘기하는 게 편하다면 그리하게.”
장서우가 순순히 자리에 앉고서 입을 여는데, 그 모습이 마치 과거를 보는 듯했다.
“선배께선 어떻게 강해지셨습니까?”
“……오호라.”
백무량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조언을 구하는 듯한데, 직언이 너무나 빠르다. 항렬이 까마득한 도사와 대화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다른 도사라면 기함을 토했겠지만, 백무량은 아니었다.
‘이 친구, 옛날의 저랑 비슷하지 않습니까?’
[쉽게 말해서 버릇이 없고 말에 무게가 없다?]
‘……쯧.’
심천검의 말을 흘린 백무량이 히죽 웃었다.
“강해지는 게 뭐 쉽겠나? 사문의 무공을 열심히 익히고 다른 사람과 싸워 자기만의 변칙을 구사하여 경험을 쌓는 것이지.”
“그래서 선배께선 과거에 사문을 나오신 겁니까?”
“그땐 내가 어렸고 많은 걸 바랐지.”
백무량의 시선이 옛 과거를 좇았다.
“섭리니, 협의니, 도리니, 그런 것은 나한테 맞지 않다고 여겼고 사문이 고리타분하다고 여겼어. 고수로서 성장해 돌아오겠단 생각만으로 나갔었지.”
“저도 요즘 그렇게…….”
“생각하지 마라, 후회하고 있으니까.”
백무량의 눈이 장서우를 꿰뚫는 듯했다.
“사문의 무공을 대성은커녕 제대로 익히지도 못하였는데 무림에 나가서 목숨을 헛되이 잃을 테냐?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
“하물며 사문이 고리타분하다는 것은 정론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야. 젊은 혈기엔 마구 튀고 싶거든. 후배가 그렇듯이.”
백무량은 장서우에게 조언하고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정립하는 과정에 있었다.
이를테면, 심상(心象).
의념으로 무공을 빚어내는 데 필요한 것은 자기(自己)라는 기둥이었다.
기둥이 없으면 위에 무엇을 쌓아도 무너지며, 바닥까지 깨지기 마련.
하물며 백무량의 경지는 하늘로 올라서는 과정.
기둥을 더욱 단단하게 다지지 않으면 더 높게 쌓아 올릴 수 없었다.
백무량은 씩 웃으며 장서우에게 말했다.
“내가 하는 말도 고리타분하게 들리지?”
“……예.”
“솔직해서 좋군. 그래도 여러 번 떠올리고 이해하려고 노력을 해 봐. 나와 후배는 비슷한 구석이 있으니까, 후회할지도 모르거든.”
“으음.”
장서우가 백무량의 말을 곱씹으려는 그때, 이번에는 백무량이 역으로 물었다.
“혹시…… 무당파에 방문했던 도사가 있나?”
“엄청 많지요.”
“질문을 잘못했군. 무당파에 멋들어진 그림을 남기고 갔거나, 곤륜파 도사 같았던 사람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백무량의 기세가 조급했다.
사형이 남긴 마지막 안배라는 사실이 평정을 흩뜨린 셈이었다.
이에 장서우가 크게 당황했다.
“어…… 선배께서 누굴 찾는진 모르지만, 그림은…….”
“주씨 성을 가진 도사. 단 한 번만 방문하였던 도사라든가.”
이번에도 백무량의 질문은 조급했고, 장서우는 혼란에 빠졌다.
이를 보다 못한 심천검이 백무량을 진정시키려던 순간.
“상은 여기 두고 가겠습니다.”
척 듣기에도 중년은 되는 듯한 음성이라.
백무량이 문 너머의 도사에게 말했다.
“잠깐! 자네한테 물을 것이 있네!”
“사실, 이곳으로 오면서 어느 정돈 들었습니다.”
드르륵.
무당파의 이대제자, 유환이 들어오며 말했다.
“주씨 성을 가진 도사라면 아는 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