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181화 (181/275)

조력자 (3)

오랜 시간 주화입마를 버텨 내다 왜소해진 몸, 힘없는 걸음.

낙매신검의 상태는 척 보기에 아주 좋지 않았다. 누가 보더라도 싸워선 안 된다고 고언할 정도였다.

하지만 염화를 노려보는 눈동자가 몹시 맑아서.

[아쉽구나.]

심천검이 안타깝다는 듯 한숨 소리를 흘렸다.

[지금 당장 싸우지 않고 몸을 추스른다면, 너에게 좋은 상대가 되었을 터인데.]

주화입마에서 심득을 얻었거나, 백무량이 먹인 영단이 기연이 된 듯했다.

저런 몸, 저런 걸음임에도 낙매신검의 발전은 피부에 와닿을 정도로 뛰어났다.

또, 은연중에 피어나는 매향은 어떠한가?

공력을 통해 인위적으로 빚어낸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체취처럼, 자연스레 기세로서 풍기는 것이었다.

“……그래, 너도 도달하였느냐.”

만상을 오만하게 굽어보던 염화가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찬탄(讚歎).

자신에게 대적할 리 없다고 생각했던 화산파에 세 사람이나 나타났다.

심지어 남천과 낙매신검은 자격조차 없던 무인이 아니던가.

“무인은 참으로 눈을 뗄 수가 없구나. 잠시만 고개를 돌리면, 싹을 틔우고 줄기를 뻗어 내니.”

묘한 미소를 머금던 염화가 우수를 휘둘렀다.

“여기서 꺾어 놓는 것이 좋겠다.”

매화비원의 영기와 반쯤 동화한 것일까?

콰르르……!

단순한 휘두름에 마공과 어울리지 않는 조화가 느껴졌다.

이제는 마기라고 단언할 수가 없었다. 염화의 쌍수가 발하는 기운은 흡성대법에 따라 여러 차례 뒤섞인 지 오래였다.

‘쉽지 않겠어.’

백무량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백선신검을 움켜쥐었다.

상대는 백련교주나 칠성교주처럼 한 마교의 종주.

지금까지 궁구하여 익힌 무학을 모두 부딪칠 만한 상대다.

백무량의 입술이 가늘게 열렸다.

“제가 중위(中位)를 맡겠습니다.”

그 한마디에 남천과 낙매신검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상처 하나 없이 온전한 사람은 오직 백무량뿐이었고, 마인과 거듭 싸워 온 강자였다.

하물며 백무량의 성취는 어떠한가.

[내가 도우마.]

‘부탁드리겠습니다.’

심천검이 상단전에서 존재감을 키우니, 백무량의 의식 또한 커졌다.

시각을 넘어선 육감과 기감.

기의 흐름과 성질 같은 것이 동시다발적으로 느껴졌다.

순간 머리가 아찔해졌으나, 줄곧 수련해 온 분심조화결이 백무량의 의식을 붙잡았다.

뒤이어 운룡의 문양이 빛을 흩뿌렸다. 마치 염화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다.

바로 그때.

“……그건.”

항상 남을 굽어보기만 하던 염화의 표정에 놀라움이 맺혔다.

그 모습을 본 백무량은 직감했다.

‘저놈, 문양에 대해 무언가 아는 건가?’

염화의 시선이 백무량의 오른 손등을 향하고 있었으니까.

백무량은 염화를 죽이기보다 제압하는 것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운룡의 문양에 대해 안다면, 사형의 행방이나 목적을 확실하게 알 수 있을 터였다.

[지금!]

심천검의 외침에 백무량이 땅을 강하게 박찼음에도 발자국 하나 남지 않았다.

고등한 경지에 다다른 보신경.

그 발아래에 청운이 유형화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구름을 탄 검선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살아온 염화는 알았다.

“허, 그것이 네 대팔식이란 말이냐……!”

남천이나 낙매신검과는 질이 다르다.

이제 막 알을 깨기 시작한 놈들과 다르게, 백무량은 이미 제 길을 찾아서 개척하고 있었다.

“내가 아는 운룡대팔식이…….”

아니다, 염화가 말을 끝을 맺기도 전에 백무량의 일 초식이 염화에게 도달했다.

쩌억!

청운으로 이루어진 장법이 염화의 뺨을 후려쳤다.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천돌혈과 아문혈이 통째로 뭉개졌다.

외가고수일지라도 일격에 즉사할 충격이었으나, 백무량은 조금도 방심하지 않았다.

발아래에 있는 청운을 그러모아, 경파(鯨波)의 무학을 뒤섞어서 이 초.

운룡비뢰장의 경파가 염화의 거궐혈을 강타했다.

“커윽!”

염화의 입가에서 피가 토해지는 것과 동시에, 낙매신검과 남천이 염화의 좌우를 점했다.

그걸 본 염화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깟…….”

이번에도 염화는 말을 끝을 맺지 못했다.

세 고수의 연수 합격은 끊임없이, 상대를 분쇄하기 위해서 펼쳐졌다.

태산검문과 화산파, 곤륜파의 정수가 염화의 전신을 난도질했다.

그것이 삼십여 초를 넘어갔을 때.

백무량은 불안감을 품었다.

‘어째서…….’

염화는 저항하지 않고 있는가.

그 불길함은 다른 고수에게 전염되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던 낙매신검의 손목이 덜덜 떨렸다.

“이건, 이럴 수가.”

남천과 백무량이 느끼지 못한 이변.

그 이변은 수십 년 동안 매화비원에서 수련했던 낙매신검만이 알 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이놈을 절대 죽일 수 없소.”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린가?”

남천의 볼멘소리에 낙매신검이 손가락으로 매화비원의 터를 가리켰다.

상처를 치유하던 매화잎이 검게 물들고, 토지에서 점차 썩은 내가 진동하는 모습.

백무량은 내면의 불길함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깨달았다.

여러 문파의 영지를 둘러보고, 운룡의 문양을 가진 백무량만이 알 수 있었다.

‘문양이 저놈에게 빛을 흩뿌린 건, 적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의 몸으로 성지에 가깝게 변모했기 때문.

백무량의 표정이 굳어지자, 처참한 몰골의 염화가 짓궂게 조소했다.

그 와중에 염화의 몸이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낙매신검, 네가 하일화 대신 화산파의 도사들을 설득해 주는 건 어떻겠나?”

“……닥쳐라!”

“이미 매화비원은 나의 몸에 깃들었고, 화산은 성화교의 본산지가 될 것이다. 모두가 죽느니 일부라도 살아남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염화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신(聖身)의 업에 이른 이상 네가 나를 벨 순 없다. 아니, 벤다고 한들 앞으로 매화비원은 없어지겠지.”

“…….”

낙매신검의 아랫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이제야 하일화가 배신한 이유가 와닿았다.

어차피 마교에게 굴복할 것이라면, 성지를 남겨 줄 쪽에게 붙는다.

그 얄팍함에 화가 났다.

“매화비원이 아무리 소중하다고 한들, 화산파의 정신이 쇠한다면 텅 빈 그릇이나 마찬가지거늘.”

평생 매화비원을 관리하다가 미쳐 버린 것일까?

아니면 마교가 횡행하는 천하가 그를 미치게 한 것일까.

낙매신검의 눈빛이 강렬한 빛을 발했다. 염화에게 답할 것이야 아주 단순했다.

“성지가 없다고 한들, 화산은 화산이다. 네깟 놈에게 굴복할 사문이 아니다.”

“그래, 그러한가.”

염화가 아쉽다는 듯 고개를 내젓고는 손뼉을 쳤다.

짝, 짝.

그 소리에 뒤따르듯이 수많은 기척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지척까지는 아니지만, 제법 가까운 거리.

수많은 마인들이 화산파를 둘러싸고서 마기를 끌어모으고 있었다.

“하일화의 간청을 봐서 살려 주려고 했지만, 별 소용은 없었군.”

염화가 껄껄 웃는 동안, 백무량은 남천과 낙매신검에게 전음을 보냈다.

[두 분은 돌아가서 화산파를 도우십시오.]

[그게 무슨…….]

[네가 혼자서 이놈과 싸우겠단 것이냐?]

낙매신검과 남천이 제각기 깊은 걱정을 드러냈다.

상대는 매화비원의 지맥을 온전히 흡수한 마인.

백련교주나 칠성교주와 같은 재앙이니, 백무량의 목숨이 풍전등화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백무량에게는 나름대로 방도가 있었다.

[전부터 느끼셨겠지요. 저한테 유독 많은 마인이 들러붙고, 계속 싸우게 된다는 것을.]

[그래서.]

[저를 믿으십시오.]

백무량의 짧은 대답에 남천이 인상을 찡그렸다.

이대로 백무량을 두고 가도 될지, 평생의 후회가 되는 건 아닐지,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이에 백무량은 태청신공을 운용해서 우수를 휘둘렀다.

툭.

“……뭐야?”

남천이 순간 기겁하여 뒷걸음질 쳤다.

의식하지 않은 사이에 백무량의 우수가 남천의 기해혈을 점하고 있었다.

남천에게는 가히 신기에 가까운 움직임이었으나, 낙매신검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자네…….”

“나중에 물읍시다.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니까.”

“…….”

낙매신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후배를 사지로 내모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으나, 염화에게 대적할 유일한 가능성이었다.

‘찰나였지만…… 여러 무학이 보였다.’

공동파의 경파와 정체 모를 권로.

그것이 뒤섞이니 남천의 감각마저 속일 정도였다. 아무리 그가 지쳐 있었다고 한들 우연이라도 볼 수 없었다.

적어도 두 수에서 세 수 위.

백무량의 경지는 사 년 사이에 더욱 높아져 있었다.

낙매신검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붉어졌다.

“죽지 말게.”

“아무럼요.”

백무량은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천과 낙매신검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면서 염화의 눈을 보니, 가소롭다는 감정이 그득했다.

“셋이서 덤벼도 시간을 끌 수 있을지 모르는데, 너 혼자 남아서 죽음을 자초하느냐?”

패배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지운 듯한 태도라.

백무량은 피식 웃었다. 저렇게 힘에 취해서, 방심하는 놈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었다.

“매화비원의 영기를 취했다고 한들, 그것이 무한하겠냐?”

그 말에 염화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성신을 이룬 나에게 무슨 공격이라도 통할 성싶더냐? 가만히 당해 주니 오만함으로 가득해졌구나.”

“흥!”

콧김을 흘린 백무량은 백선신검을 쥐었다.

그와 동시에 전신에서 발해진 청운이 운해를 이뤘다. 백무량의 의념에 따라 갑주가 되기도, 검강이 되기도 할 공력이었다.

그걸 본 염화가 고개를 까딱였다.

“선수를 양보하지.”

“……!”

백무량의 눈이 시퍼렇게 물들었다.

태청신공이 완성에 이르면서 생긴 변화.

마인의 약점을 보는 데 능해진 안력이 염화를 투과했다.

까득.

그와 동시에 백무량이 검을 휘두르니.

염화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과연, 이래서 칠성교주 놈이 피했나.”

완성에 다다른 태청신공.

운해를 이룬 공력이 곧 또 다른 검이 되니, 분심조화결이 백선신검과 운검을 동시에 다뤘다.

그 분심(分心)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순간.

백무량의 코에서 핏물이 흘렀다. 심천검과 자신이 펼치는 일검을 운용하면서 상단전에 강한 압박이 가해진 탓이었다.

하지만 그 압박은 장차 경험으로서 축적될 것이며.

염화의 오만을 찢어발길 검해(劍海)가 된다.

구천화우검의 삼초, 호천풍연과 칠초, 주천암성.

백무량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어디 한번, 이것을 맞고도 멀쩡할지 보자꾸나!”

그 외침에 염화가 발출하려던 공력을 거뒀다.

사실, 염화로서도 궁금하긴 했다.

‘정녕 성신(聖身)은 무적인가?’

다른 마교의 교주.

백련교주나 칠성교주 앞에서도 무적이라고 자칭할 수 있을 것인가?

그 해답을 줄 수 있는 것이 눈앞에 있는 백무량이라고 여겼다.

하물며…….

‘저 초식을 맞고도 멀쩡하다면, 곤륜파도 나를 막을 수 없다는 방증이겠지.’

염화가 히죽 웃으며 두 손을 펼쳤다.

꽈르르…… 꽈광!

구천화우검의 두 초식이 내리꽂힌 자리에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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