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력자 (2)
많은 이가 말한다.
무림에 기연은 없다, 순수하게 쌓아 올린 무력만이 자신을 스스로 지킬 뿐이라고.
남천도 그렇게 생각하는 쪽이었다. 그럴듯한 배경으로 거들먹거리는 부류를 혐오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벼랑 끝.
그곳에 선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기연을 꿈꾸는 법!
“좋아, 실력을 보여 주마, 마교 놈!”
남천은 염화를 향해 도를 겨누었다.
그것만으로 정신이 아찔해지는 적의(敵意)가 머리를 쿡쿡 쑤셔 왔다.
상식을 넘어선 강함, 또 정체를 알 수 없는 마공이라.
‘백무량 그놈은, 이런 놈들과 싸워 왔단 게지.’
남천은 한쪽 입술을 비틀었다.
그 어린놈, 겁을 모르는 그놈이 해냈다면 자신 또한 가능하다.
불씨에 불과했던 전의가 고양되어 스스로 몸집을 키웠다.
필사의 의지가 또 다른 가능성을 부르고, 생각지 않았던 망상을 불러왔다.
구멍투성이 바위.
심상(心象)에 현무암 같은 것이 떠올랐다. 남천은 저도 모르게 손을 꽉 쥐었다.
‘저건…….’
단순한 형상이 아니다.
남천 스스로 깨닫고 있던 부족함이오, 모순.
훼손된 비급으로 익힌 태산검문의 무학이었다.
그것만으로 강호십대고수의 명성을 얻었으나, 상대는 그것을 넘어서는 죽음이었다.
“헛된 망상을 품고 있느냐?”
염화의 목소리에 담긴 조소가 남천의 의지를 찢어발기는 듯했다.
그 또한 심상을 궁구하여 탄탄히 기반을 구축한 고수.
이제 막 개척하기 시작한 남천과는 격이 다르다. 이제 발버둥 쳐 봐야 늦었다.
남천이 무인이 된 이후로 단 한 번도 품지 않았던 연약함이 전의를 뭉갰다. 의지가 줄어드니 도를 쥔 악력이 줄었다.
그때,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남천에게 있어 가장 큰 부피를 차지하는 옛 기억이 불쑥 튀어나와서는.
-살아.
익숙한 목소리, 죽어 가는 사람의 목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남천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 염화가 있다는 걸 생각하면, 자살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염화마저도 순간 움찔하여 눈을 의심했다.
“뭐 하는 짓이지?”
“……닥쳐.”
욕지거리로 대꾸한 남천은 하늘을 훔쳐보았다.
석양으로 누렇게 물들어 가는 하늘.
그것을 본다고 한들 달라질 건 없었다.
그냥, 잠깐 목이 메었다.
‘또, 죽은 사람을 떠올려서야.’
진짜로 죽을 때가 되니 귀신이라도 부른 것일까?
남천은 왼손으로 이마를 툭툭 쳐 대며 끌끌 웃었다. 귀신이든, 심상에 홀린 것이든, 그 덕에 마음은 정리가 되었다.
“여기서 둘 중 하나는, 끝을 보자.”
파앙!
보신경을 펼친 남천은 염화에게 곧바로 도를 휘둘렀다.
광랑참(狂浪斬).
숱한 고수를 벤 금모도왕의 절초이자 살초.
세간에서는 봉우리마저 벨 정도라 알려져 있었으나.
콰르르……!
염화의 전신에 흐르는 마기는 상식을 아득히 벗어났다.
십이정경은 물론, 일천세맥을 통해서 발하는 공력은 주변의 환경을 일그러뜨리는 재해에 가까웠다.
하물며, 매화비원의 토대인 영기마저 염화를 향하니.
광랑참이 공력의 벽에 튕겨 나갔다.
‘괴물.’
인간의 형상을 한 신이라 불려도 좋았다. 마기와 영기가 합일을 이루는 순간이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남천은 염화를 앞에 두고서 숨을 골랐다.
[괜찮은 겁니까?]
뒤에서 들려온 전음에 남천의 고개가 잠시 뒤로 돌아갔다. 백무량이 하일화와 싸우면서 이쪽을 살피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이대로 시간을 끌게 된다면, 매화비원의 영기를 모두 흡수한 염화가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니까.
이에 남천은 씩 웃으며 대꾸했다.
“상관없어. 이놈은 내가 죽인다.”
“……건방진.”
가공할 공력과 영기가 염화의 목소리를 굴절시켰다. 동굴 안쪽에서 으르렁거리는 곰 같았다.
그 목소리가 남천의 육감을 자극했다.
앞으로 이각.
그 시간 동안 염화를 저지하지 못하면, 매화비원의 영기가 염화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강호의 누구도 염화를 이긴다고 자신할 수 없게 될 터.
백련교주와 칠성교주 외에 절세의 마도 고수가 생기는 셈이었다.
“그건 안 되지.”
남천은 빙긋 웃으며 도를 꽉 붙잡았다.
저도 모르게 떨리는 손엔 아직 공포와 유약함이 있었으나, 무인의 의지로 억눌렀다.
“어디 한번, 끝까지 버티나 보자고.”
“좋다.”
염화의 얼굴에 조소가 어렸다.
“나 또한 이 힘을 어떻게 쓸 수 있을지 궁금해졌으니……!”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던 마기가 남천을 향해 폭사했다.
염정화기에 이은 성화백유장.
공력의 두 갈래로 갈라지는 순간 남천의 도가 번뜩였다.
“어딜!”
도강이 낭창거리며 네 방향으로 뻗어 나갔다.
철검칠식의 사방금. 극에 이른 방어초가 대력을 받아 내며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그 와중에 도가 녹지 않게 내공을 배분해야 하니, 남천으로선 죽을 맛이었다.
‘이대로 방어만 했다가는…….’
일백 초를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
그 예감에 남천이 이를 악물었다.
지금 이 순간, 평생 기연을 비웃던 사내가 기연을 간절히 기원하고 있었다.
‘과거, 저놈과 대적했던 태산검문의 온전한 무학이 필요해.’
그 간절함이 다시 심상을 불렀다.
구멍투성이 바위.
남천은 염화와 일합을 겨룰 때마다, 구멍을 하나둘씩 메우기 시작했다.
일평생.
지금까지 쌓아 온 경험과 축적한 이론, 비급에서 찢겼던 부분을 추측하여 구멍을 메운다.
본 적 없는 원초를 추론해, 흉내 낸다.
여기까지 육십 초.
남천의 도가 조금 녹아내렸다.
“이것이 전부인가?”
염화의 비웃음에는 여유가 있었다. 남천의 발버둥이 어디까지 통용되는지 보고 싶다는 호기심과 흥미였다.
“전혀!”
남천은 본능적으로 눈을 번뜩였다.
구멍투성이였던 바위가 이제는 흠결이 없었다.
이제야 보였다.
과거, 성화교와 대적하던 태산검문의 검객들.
그들의 무공이 어떠했는지, 찢긴 부분이 어떠했는지.
원초를 따라잡으니 도의 길이 달라졌다. 부수적이던 허례, 검엔 필요하나 도엔 필요 없는 것을 버렸다.
그렇게 펼쳐진 분천지(分天地)의 일도가 쾌한 궤적을 그리니.
“……음?”
염화의 눈동자에 이채가 일어났다. 이채는 곧 놀람이 되었다.
사르륵!
한 치에서 두 치 길이의 옷깃이 풍압에 찢어졌다. 조금만 더 깊었더라면 빗장뼈를 베고, 목까지 닿았을지도 모르는 일.
염화의 얼굴에서 호기심이 점차 가라앉았다.
“네 이놈, 닿았구나.”
한때 성화교의 목을 벨 뻔하였던 검.
태산검문의 검. 그 궤적, 그 무학을 향해서.
남천의 도는 초식을 거듭할수록 변화했다. 갑작스러운 변화로 일어나는 어색함 따위는 없었다.
본래 그러하였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하지만 남천은 한계를 알고 있었다.
‘이것으로는 부족해.’
태산검문의 검은 성화교에게 닿았으나, 완전히 베지는 못했다.
그래서 염화와 같은 잔당이 남은 것이다.
원초엔 가까워졌다. 조금만 더, 손가락 한 마디 정도면 완전히 같아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저놈을 이길 수 있을까?
‘매화비원을 자기 것으로 끌어당기는 저놈을?’
남천은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염화에게 닿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찢고, 죽이는 것. 원류를 넘어선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렇다면 그보다 높이.
원류를 넘어서, 파격으로.
태산검문의 검술, 그 무학을 도법으로써 완성한다.
‘이런 짓거리 따위, 나랑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남천은 피식 웃었다.
웃고 나니 옛날에 품었던 집착과 ‘남천’이라는 이름에 담긴 감정이 바스러지는 듯했다.
그와 동시에 깨닫는 것이 있었다.
‘……이래서 찢었구나.’
태산검문의 비급이 훼손되었던 이유.
그것은 성화교에게 통하지 않았던 일부분, 미진했던 초식 세 가지를 지운 흔적이었다.
언젠가 손이 닿을 후인이 메워 주길 바랐던 것이다.
남천의 도법이 점차 극에 달하니 염화의 여유가 사라졌다.
“감히, 반푼이 따위가…… 거슬리게 구는구나!”
“반푼이?”
“남의 무공을 비급으로 훔쳐 배웠을뿐더러, 그마저도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반푼이. 그게 네놈이지 않더냐?”
그 말에 남천은 저도 모르게 껄껄 웃었다.
확실히, 옛날이었다면 울컥했을지도 모른다.
남천이란 인간은 태산검문이란 이름에 자격지심이 있었고, 그 비급을 얻은 과거를 잊지 못하고 번민하고 있었다.
그래서 구파일방의 예의나 배분 따위를 존중하지 않았다. 무공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과거나 배경을 내심, 누구보다도 신경 썼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남천은 서슴없이 도를 휘두르며 대꾸했다.
“그런 격장지계는 통하지 않는다.”
“……?”
“확실히, 무공을 부끄러운 방법으로 배웠으나, 일생, 일점, 부끄럽게 산 적이 없다. 내세에서 그들을 마주한다고 한들 당당할 것이다.”
남천의 목소리는 무덤덤했다.
안하무인의 낭인으로 살았으나 죄를 짓지 않았기에 발할 수 있는 기개였고 순수였다.
“놈!”
격장지계가 수포가 된 듯하자, 염화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러자 매화비원의 대지가 갈라지고 어마어마한 양의 영기가 빛을 발했다.
“그건…… 이야기가 다르지 않으냐!”
하일화의 외침에도 염화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 영기를 통째로 흡수하겠다는 듯, 공력을 더욱 강하게 운용할 뿐이었다.
백무량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푸욱!
“……커헉!”
하일화의 입가에서 핏물이 토해졌다. 그의 거궐혈을 관통한 백선신검에 반항이 느껴지지 않았다.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지는 순간.
하일화가 입술을 더듬거렸다.
“저대로, 보내면…… 성지가…….”
툭.
하일화는 눈조차 감지 못하고 죽었다. 배신을 당했다는 충격이 눈동자에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를 동정할 수도 없었다.
“병신 같은 놈.”
평범한 마인도 아니고, 성화교의 수장이라고 볼 수 있는 놈을 어찌 신뢰했단 말인가?
백무량은 백선신검을 회수하고는 염화를 향해 걸어갔다.
전신에 걸쳐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남천의 뒷모습이 보였다.
“싸울 기력은 남았지요?”
“……그래.”
“화산파의 도사가 도우러 온다고 한들, 대부분이 죽을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끼리 해결해 보잔 게지?”
“예.”
“그거 좋군.”
남천이 도를 꽉 잡았다.
마음을 다잡는 버릇처럼 보였는데, 그 모습에서 전과는 다른 강인함이 느껴졌다.
[저놈과 싸우는 도중에 기연이라도 얻은 모양이구나.]
‘앞으로 큰 도움이 되어 주겠지요.’
[……여기서 몸 성히 이긴다면 말이야.]
심천검의 목소리에 평소답지 않은 긴장감이 느껴졌다.
그야 당연했다.
쿠르르르……!
매화비원의 영기를 모두 흡수한 염화.
그의 쌍장(雙掌)에 흡성대법의 행공이 느껴졌다.
하물며 염화와 싸웠던 남천의 모습은 어떠한가?
백무량은 남천을 흘낏 곁눈질하고는 물었다.
“도는 어쩌다가 녹은 겁니까?”
“열양공을 조심해라. 강기를 뚫고 들어올 것이다.”
“음.”
백무량의 표정이 굳어졌다.
백선신검이 아무리 명검이라고 한들, 고검(古劍).
외부의 충격에 민감하고 쉽게 부서질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고 검을 놓고 싸울 순 없는데. 방법 없겠습니까?’
[나였다면 그냥 싸웠을 것이다.]
‘그래야 한다면 어쩔 수 없지요.’
백무량이 기수식을 취하던 그때.
“아직 늦지 않았군.”
염화에 의해 중태에 빠졌던 고수.
낙매신검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