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색 (2)
그렇게 남천의 헛소리가 도를 넘는다고 여겨질 때쯤.
“사 년 만이네.”
침착한 기도의 도사가 백무량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눈빛에 매겨진 질시와 선망.
그것이 아니었다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백무량은 가볍게 웃고는 도사의 안부를 물었다.
“그동안 잘 지냈소, 매화비룡?”
“……그런 허명은 버린 지가 옛날이네.”
과거 쌍룡이라 불렸던 후기지수.
매화비룡 구장명이 백무량에게 포권을 취했다.
과거, 배분을 따지며 깔보던 태도는 완전히 지워졌으나 은근한 호승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곤란한데.’
백무량은 구장명에게 진실을 말할까, 잠시 고민했다.
‘수십 번을 맞붙어도 똑같을 거라고 말하기가…….’
“나는 그동안 뼈를 깎는 수련을 했건만, 후배는 어째 그대로 같군.”
구장명의 입술이 묘하게 삐뚤어졌다.
“푸하하하!”
“허…….”
그 모습을 본 남천이 폭소하고, 칠지검협이 민망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오로지 구장명만이 모르는 듯했다.
일정 경지를 초월한 고수는 도리어 평범한 사람처럼 보인다는 것을!
“그렇다면…….”
백무량이 무언가 대답하기 전에 칠지검협이 언성을 높였다.
“장명이 네 이놈! 어찌 그리 버릇없이 구느냐!”
“저는 그저 비슷한 연배의 후배에게…….”
“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부족한 안목은 여전하구나! 저 소협은 우리 문의 장로와 합을 겨루어도 밀리지 않을 것이다!”
“……예?”
구장명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초리로 백무량을 보았다.
이에 남천이 히죽 웃으며 구장명에게 다가갔다.
“어이, 애송이.”
“누구시기에 화산파의 대제자에게 함부로 말씀하십니까?”
구장명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진자충이 고개를 내저었다.
백무량처럼 내심 인정한 게 아니고서야, 버릇없는 후배를 극도로 싫어하는 남천이었다.
하물며 화산파의 이름을 내세운다?
“글쎄,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왜 함부로 짖는 것일까?”
남천의 눈빛에 약간의 열기가 드러났다.
가볍게 쥔 주먹에 몰아치는 광풍.
무공을 모르는 호사가가 보아도 한눈에 고수라고 느낄 기파였다.
그것을 본 구장명의 목울대가 꿀렁였다.
“어, 어느 문파의 고인이신지요?”
“하, 문파라?”
남천이 구장명의 지척에서 멈췄다.
“나는 낭인인데.”
“……아!”
그제야 남천의 정체를 알아차린 구장명이 탄성을 터트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금모도왕 혹은 낭왕이라 불리는 강호십대고수.
남천의 인내는 장난감을 눈에 담은 아이만도 못한 것이었으니.
“앞으로 열흘은 미음만 먹어야 할 것이다.”
남천의 우수가 구장명의 턱을 향해 내질러졌다.
내관혈을 타고 흐르는 공력이 폭포수와 같은 소음을 일으켰다.
콰르르!
구장명의 눈이 질끈 감겼다. 도저히 막아 낼 수 없으며, 막았다가는 남천의 진노를 살 테니 그저 얻어맞을 생각이었다.
다만 칠지검협이 그걸 허하지 않았다.
“이게 무슨 짓인가!”
한 줄기 홍매와 같은 검격이 남천의 주먹을 살포시 막아 세웠다.
칠지검협의 얼굴에 매서운 분노가 담겼다.
“화산파의 장문인 앞에서 어찌 제자를 건드린단 말인가? 이런 경우는 천하에도 없으며, 자네가 낭인의 왕이라고 한들 부덕한 짓이네.”
“…….”
남천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간신히 분노를 억누르는 듯한 표정으로 칠지검협을 보았다가, 백무량에게로 향했다.
백무량의 전신에 태청신공의 내력이 대해처럼 흐르는 모습이라.
“……쯧.”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찬 남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예의를 모르고, 남한테 무시당하기를 싫어하는 성격이오. 장문인에게 미안하게 되었소.”
과연 강호의 소문대로 안하무인에 가까운 반응인지라.
백무량은 말없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미안하다곤 하지만, 사죄의 뜻으로 보이지 않는 말투였다.
그 모습이 심천검도 곱게 보이지 않은 탓인지.
[무공을 뛰어나면 무얼 하나, 그만큼의 도량(度量)은커녕 인간이 덜 되었거늘…….]
‘그러게 말입니다.’
확실히, 처음에는 구장명이 잘못한 것이 맞았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너무 무례하게 굴었으니까.
하지만 안목이 부족한 후배이고, 배분의 차이를 감안하면 봐줄 수도 있는 행태였다.
게다가 화산파의 장문인인 칠지검협이 눈앞에 있지 않던가?
백무량을 비롯한 좌중의 분위기가 차가워지자, 남천이 다시 한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잘못했소. 사죄하리다. 거기 있는 후배.”
“예?”
구장명이 기겁한 목소리로 대답하니 남천이 히죽 웃었다.
“사죄, 받아 줄 텐가?”
“예, 예…….”
“됐군.”
구장명에게 억지로 대답을 받아 낸 남천이 처소를 향해 걸어갔다.
“……허.”
그 뒷모습에 성품이 온후하기로 유명한 칠지검협마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백무량과 진자충을 향해 물었다.
“자네들도 쉬겠는가?”
백무량은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일단은 낙매신검 선배의 상태를 보고 싶습니다.”
“따라오게.”
칠지검협이 앞서 걸어가며 한 가지를 충고했다.
“내 걸음을 잘 따라와야 하네. 다른 곳으로 휘말릴지도 모르니.”
“예, 그러지요.”
백무량은 칠지검협의 보신경을 주의 깊게 살폈다.
매화보.
전에는 제대로 살필 겨를이 없었지만, 화산파 무인의 걸음에는 특색이 있었다.
‘매화이십사수 같은 화검을 유지하는 기둥이라.’
상반신이 화려한 검로를 펼치면, 하반신의 보신경으로 그것을 단단히 받쳐 조화를 이룬다.
그것이야말로 화검의 요체.
운중용형보와 운룡대팔식과는 다른 중점이요, 무학이었다.
‘감을 잡을 것 같은데.’
백무량이 칠지검협의 걸음을 보는 동안, 심천검은 그의 등과 어깨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디를 보고 무엇을 경계하고 있는가.
그것을 알아채기에 간단한 수가 있었다.
[어깨가 너에게 기울고 있구나.]
‘……예?’
[아까부터 칠지검협의 어깨가 네 쪽으로 틀어져 있단 뜻이다.]
심천검의 말에 백무량은 집중을 멈추고 칠지검협을 살폈다.
정확하게는 목에서부터 어깨에 이르는 선.
그것이 조금씩 백무량에게 치우쳐 있었다.
우연치고는 꽤 긴 시간 동안.
백무량의 눈동자가 침잠하던 그때, 진자충이 칠지검협에게 물었다.
“낙매신검의 용태는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일대제자를 비롯한 평제자 모두 알지 못하네. 나와 장로들만이 알고 있지.”
“등산로를 막아선 제자들은 무엇으로 알고 있습니까?”
“최근 섬서성에서 사파가 모습을 드러내어, 입산을 통제하고 있다고 알렸다네.”
진자충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면…… 낙매신검께서 쓰러지기 전이나 후에 외인의 출입은 어떻습니까?”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 온 상단 외에 없었네.”
“낙매신검과 접촉한 사람은 어떻습니까?”
“적어도 외인은 없었네.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으니 말일세.”
“으음…….”
진자충이 침음성을 흘리는 동안 백무량은 한 가지를 확신했다.
“역시 화산파 내부에 적이 있다는 소리군요.”
“인정하긴 싫지만, 그런 셈이네.”
칠지검협의 미간이 좁혀졌다.
깊은 심려와 고뇌. 두 감정에 거짓은 없었다.
백무량은 심천검과 조심스럽게 대화를 나눴다.
‘설마 장문인이 마교와 결탁했겠습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화산제일고수를 주화입마에 빠지게 만들 사람이 얼마나 있겠느냐?]
‘…….’
[처음에 마주했던 그 장로일 가능성도 있겠다만…… 일단은 마주해야겠지.]
‘그렇지요.’
영단으로 낙매신검의 주화입마를 치유할 수 있는가.
그것이 가능하다면 누가 마교와 결탁했는지 쉽게 알 수 있을 터였다.
백무량은 칠지검협을 뒤따라 걸으며 호흡을 골랐다.
언제든, 누가 나타나더라도 싸울 수 있도록.
***
“이곳이네.”
칠지검협이 안내한 곳은 고요한 분위기의 암자였다.
저 멀리에서 냇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올 만큼.
백무량은 빙긋 웃으며 칠지검협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곳, 매화비원과 가까운 곳이 아닙니까?]
[자네가 그걸 어찌 아는가?]
칠지검협의 전음에 당황스러운 음색이 묻어 나왔다.
그야 당연한 일이다.
과거, 낙매신검에게 안내받았을지언정 자세한 위치는 알 수 없게끔 안대를 씌웠던 걸로 기억할 테니까.
하지만 백무량의 기감은 그때부터 극에 이르러 있었다.
특히 영기에 관한 것이라면 더더욱.
백무량은 칠지검협에게 그 사실을 밝히지 않은 채, 질문을 더했다.
[혹시나 하여 묻습니다만, 낙매신검 선배가 주화입마에 빠진 곳이 매화비원이었습니까?]
[……그렇네.]
[먼저 발견한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그 전음에 칠지검협이 잠시 백무량을 바라보았다.
[나였네.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게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말아 주게.]
[이해합니다.]
두 도사가 시선을 마주친 순간, 진자충의 미간도 가늘어졌다.
그도 깨달았을 터였다.
무림맹주 휘하의 대주인 이상, 눈치가 느릴 리가 없을 테니까.
“……후우.”
백무량은 호흡을 고르며 기감을 일으켰다.
암자 내부에 한 사람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청운에서 발해진 바람이 익숙한 기척을 끄집어냈다.
“안에 낙매신검 선배가 계시는데, 일단은 들어가지요.”
“그러지.”
칠지검협이 먼저 암자로 들어서고, 백무량과 진자충이 주변을 경계하면서 뒤따라 들어갔다.
그곳 중앙에 낙매신검이 가부좌를 튼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선배!”
백무량이 큰 목소리로 외쳤으나 대답은 없었다.
주화입마에 빠진 지 오래되어 몰아(沒我)에 접어든 듯했다.
그와 동시에 백무량이 입술을 달싹였다.
[진 선배, 저 선배를 주화입마에서 꺼낼 방법이 있습니다.]
[호법을 봐 달라는 거라면 위험하지 않겠느냐? 금모도왕을 부르고 해도 늦진 않을 거다.]
진자충의 대답은 차분하고 정석적이었다. 사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았다.
그것이 평범한 방법이었다면 말이다.
백무량은 자신감 있는 미소를 보이며 허리에 묶은 목함을 꺼냈다.
“사실 저한테 낙매신검 선배를 주화입마에서 구해 줄 영단이 있습니다. 천하에 둘도 없는 것이지요.”
“……!”
“허! 그런 것이 있었다니!”
칠지검협의 얼굴에 놀람과 화색이 일었다. 거짓이라기엔 너무나도 진실한 눈빛이었다.
그럼에도 백무량은 한 손을 뻗으며 칠지검협을 위협했다.
“제가 이것을 선배에게 먹이는 동안 가만히 계십시오.”
“그게 무슨…….”
“솔직히 말하자면, 워낙 신묘한 마공을 지닌 놈들이 많아서 장문인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오직 믿을 사람이라고는 진자충뿐.
남천이 같이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는 통제할 수 없는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여기서 낙매신검을 깨워서, 마인을 판별한다.’
백무량의 강한 의지에 칠지검협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알겠네. 자네 말대로 물러나 있겠네.”
“이해해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백무량은 목함의 뚜껑을 열었다.
쏴아아!
보타문의 성지에 가득했던 영기.
그 기운들이 암자 전체를 가득 채웠다.
강호의 고수라 불리는 칠지검협과 진자충마저도 깜짝 놀랄 정도의 기운이었다.
“곧바로 먹이겠습니다.”
백무량이 지체 없이 영단을 낙매신검의 입술에 밀어 넣는 순간.
[저것을 빼앗고 싶지 않나? 곤륜신성보다 더 강해지고 싶지 않은가?]
사악한 목소리가 진자충의 귓가를 간지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