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색 (1)
앙상했던 나뭇가지가 어느새 초록빛으로 물들고, 산천(山川)의 향기가 온 고을을 휘돈다.
논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촌부의 노력이 빛을 발할 때.
풋내 나던 봄은 이제 완연한 여름이 되었다.
생명이 생장하고, 하늘의 열기가 천하를 덥히는 계절에 세 무인이 걷고 있었다.
“지랄 같게 덥네.”
남천이 구슬땀을 훔치며 중얼거리니 진자충이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선배, 덥다고 하면 더 더운 법입니다.”
“건드리지 마라. 이런 날에 주먹질하기 쉽다.”
“……도대체 왜?”
진자충으로선 이해가 안 가는 반응이었다.
사실상, 처음 남천과 마주했을 때부터 품은 의문이었다.
“제가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십니까?”
“네 얼굴!”
“예?”
“그거면 충분하잖아.”
“…….”
진자충의 시선이 백무량에게 향했다.
예전부터 그러했듯, 백무량이라면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보게, 백 후배. 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가?]
[그 이야기는 화산 등산로까지 가고 이야기하지요. 선배도 덥지 않습니까?]
[……그러지.]
진자충이 입술을 삐쭉거리는 모습에 백무량은 그저 껄껄 웃고 말았다.
세간에서는 무림맹주 휘하, 무력의 핵심이라 불리는 사내.
청룡대주인 창룡비검일지라도 남천 앞에서는 속 좁은 후배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본래 배분으로 따지자면 이곳에서 제가 제일 어른이지 않습니까?’
백무량의 농담 섞인 말에 심천검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어찌 증명하겠느냐? 아니, 뭣보다 저 진자충이라는 무인을 얼마나 괴롭히려고…….]
‘길을 향하는 동안 심심함을 타파할 수 있겠지요.’
[배분에 맞게, 어른다운 모습을 보여야지 후배를 괴롭히면 되겠느냐?]
‘예전에는 선배가 저한테 곤륜의 무학을 제대로 모르면서 다른 길로 가려 든다며 다그치지 않았습니까?’
[그야, 그때는 네가 미덥지 못했으니까 그렇지.]
‘지금은요?’
[또 다른 길이 될 수야 있겠지.]
심천검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백무량이 창안한 무학의 가능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뒷말을 덧붙이는 건 백무량과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내가 더 뛰어나지만 말이다.]
‘역시 선배십니다.’
백무량이 홀로 낄낄 웃는 모습에 진자충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가 그리 우스웠나?”
“아니, 그게 선배한테 한 게 아니라…….”
그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남천의 입술이 달싹였다.
낭인으로 오래 살면서 길러진 눈치였다.
“우스웠나? 설마 나 몰래 저놈한테 전음이라도 보낸 거냐?”
“……!”
진자충이 순간 깜짝 놀라는 모습에 남천은 주먹을 꽉 쥐었다.
***
이틀 뒤.
화산파의 속가제자가 당황한 표정으로 진자충에게 물었다.
“습격이라도 당하신 겁니까?”
마차의 처참한 외관과 빨갛게 부어오른 진자충의 뺨.
누가 봐도 평범한 일은 아니기에 속가제자의 눈에 경계심이 어렸다.
이에 진자충이 토라진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 일도 없었네. 그냥, 그, 무공을 교류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일세.”
“아, 비무 말입니까?”
속가제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비무를 어찌 마차 내부에서 한단 말입니까? 게다가 그, 청룡대주님의 상처를 보았을 때…….”
순전히 얻어맞은 것이 아니냐?
속가제자가 그것을 조금씩 돌려서 묻는 모습에 남천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진자충으로선 자존심이 상하고 속이 뒤집히는 광경이었다.
“그래! 다툼이 있었네! 됐나?”
“아, 아…….”
속가제자가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길을 열었다.
그 모습에 진자충은 온몸에 상처가 생긴 것처럼 쓰려 왔다.
대체 남천에게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런 망신을 당해야 하는가?
진자충의 시선에 옅은 살기가 어리자, 남천도 시선을 슬쩍 옆으로 돌렸다.
바로 그때, 백무량이 속가제자에게 물었다.
“귀 문파의 장로이신 낙매신검 선배와 관련된 일로 찾아왔네. 입산해도 되겠는가?”
“…….”
“…….”
그 말에 화산의 등산로가 침묵으로 잠겼다.
뒤이어 속가제자의 시선이 위쪽으로 향하는 순간.
“사 년 만이던가?”
언덕 위에서 노도사(老道士)가 상승의 경신법을 펼치며 나타났다.
그가 두른 기운은 매화를 닮은 짙은 자색이라.
“……아!”
이를 지켜보는 진자충과 속가제자의 얼굴에 황홀함이 있었다.
자하신공의 기운은 보는 것만으로 감동케 하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남천과 백무량은 달랐다.
“뭘 그리 번잡스럽게, 쯧.”
“그동안 강녕하셨는지요.”
백무량은 노도사에게 정중히 포권했다.
“하 장로님, 사 년 만에 뵙습니다.”
본래 매화비원을 관리하던 장로, 하일화.
피로에 전 모습이 과거와는 달랐으나, 눈동자에는 형형한 기광이 담겨 있어 결의를 품은 눈이었다.
“먼저 이야기하였다면 더 좋았을 걸세.”
“그러기에는 보는 눈이 많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백무량은 하일화와 시선을 마주하며 하던 말을 이었다.
“정 선배께서 저에게 남긴 유지를 지키고자 합니다.”
“……그랬더냐.”
하일화가 까닭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남천과 시선이 마주쳤다.
“금모도왕께선 여기까지 웬일이시오?”
“내가 꽃을 구경하러 왔겠느냐?”
“하기야, 낭왕(郞王)께서 화산파에 왕래한 까닭이야 잘 알겠소.”
은근한 멸시가 담긴 어투에 남천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빈정거리나 도를 쥐는 일은 없었다.
“화산파의 상황을 미리 알고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라.”
“그것참 무섭소.”
차가운 웃음을 드러낸 하일화가 등산로를 향해 턱짓했다.
불편한 침묵이 순간 감돌았다.
화산파가 혼란스러울 이유야 알고 있지만, 이렇게까지 남천에게 적대적인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던 탓이다.
이에 진자충이 하일화의 눈치를 살피고는 남천에게 물었다.
“악연이라도 있으십니까?”
“깝죽거리다가 한 번 맞은 적이 있지.”
“……아.”
그 말에 진자충이 부어오른 뺨을 매만졌다. 하일화의 반응이 곧바로 이해되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백무량의 내심은 달랐다.
‘아무리 악연일지라도 십대고수가 화산을 도우러 온 것을 알 터인데, 저럴 이유가 있겠습니까?’
[처음 보는 도사를 어찌 왈가왈부하겠느냐?]
심천검의 목소리에 신중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나, 저 도사가 께름칙할 정도로 적대적인 건 사실이다. 네가 생각하기에…… 이번에 주화입마에 빠진 고수와 평생 지우에 가깝더냐?]
‘아마 그럴 겁니다.’
낙매신검과 하일화가 나누던 대화.
그 대화에는 격의가 없었고, 오랜 시간 동고동락한 막역함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걸 판단할 수도 없었다.
하일화의 등을 바라보는 시선이 스리슬쩍 가늘어졌다.
‘그래도 의심은 해야겠지요. 상대는 칠성교니까요.’
언제든 얼굴을 바꾸고, 신분을 위조할 수 있는 마교.
그들이라면 화산파일지라도 파고들 수 있다. 낙매신검이 주화입마에 빠진 이유도 그곳에 있을 것이다.
그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백무량의 폐부에 선선한 바람이 휘돌았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고, 옆을 돌아보니.
화산파의 연화봉이 눈에 들어왔다. 백무량의 시야가 확 트이는 듯했다.
“화산의 잔도(棧道)가 어떠한가?”
전방에서 길을 안내하던 하일화의 너털웃음이 들려왔다.
백무량도 그저 빙긋 웃고 말았다.
칼처럼 깎아지른 길, 백석(白石)을 떠올리게 하는 벼랑.
줄 하나에 몸을 의지하여 건너는 여정이야말로, 인간의 연약함을 극복하는 것을 의미하니.
“과연 화산파의 정신, 자기(自起)가 담겨있습니다.”
백무량의 대답에 하일화의 눈썹이 둥글게 휘었다.
“곤륜신성이 천고의 기재라더니 그 말에 틀림이 없도다. 곤륜의 신검이란 말이 과언이 아니야.”
“도문끼리 서로 물고 빨기는.”
남천이 상스러운 말을 중얼거렸으나, 두 도사는 들은 체도 않으며 빙긋 웃었다.
그러다 백무량이 고등한 수법으로 하일화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나저나 낙매신검께서는 어떻습니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온종일 운기조식을 취하고 있다네. 끼니조차 잇질 못하니 정기가 쇠하면…….]
자그마한 불씨마저 완전히 사그라지리라.
하일화는 그 사실을 선뜻 꺼내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형형한 눈빛이 잠시나마 방향을 잃고 방황하다가, 다시금 본제로 돌아왔다.
[평범한 심마가 아닌지라 다른 장로나 장문인조차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네.]
[그렇군요.]
[한데 자네는 무슨 일로 온 것인가? 정 장로가 남긴 서찰에 주화입마에서 빠져나올 단서가 있던가?]
그 질문에 백무량은 잠시 하일화와 시선을 마주했다.
옛말에 본의(本意)는 눈에 담기기 마련이요, 눈은 상단전의 창문이라고 하였으니.
태청신공의 현묘함이 참과 거짓을 가릴 때 주효하였다.
백무량은 공력을 미량 끌어 올리고서 입술을 달싹였다.
[임종을 지키러 왔습니다.]
[……그러한가.]
하일화가 쓸쓸한 어조로 대답했다.
뒤이어 눈을 강하게 찡그리고는, 뒤를 돌아보던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표정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축 처진 어깨와 위로 틀어진 턱에서 보이는 감정이 있었다.
백무량은 말없이 그의 등을 보았다.
잠시 후.
정문에 도착하니 장문인인 칠지검협이 서글서글한 인상으로 백무량 일행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비애와 암담함이 있었다.
“어서 오셨소. 그래, 먼 길 오는 동안 피곤하지 않았소?”
“괜찮습니다. 장문인.”
진자충이 앞서 포권하니, 백무량도 주변을 살피다가 뒤늦게 포권했다.
남천이야 늘 그렇듯이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에 칠지검협이 기탄없이 웃음을 드러냈다.
“금모도왕은 늘 똑같으시오.”
“나름대로 존경하고 있소. 버릇없게 보였다면 사죄하겠소.”
누구에게나 반말을 해 대던 남천치고는 제법 예의를 차린 어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가 칠지검협이었다.
자신의 의지와 협의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손해도 감수하는 무인.
그 생을 세 손가락을 잘라 내어 증명하였으니, 낭인인 남천마저도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방식이 참으로 낭인다웠다.
“그, 의수(義手)를 잘 만드는 철방을 잘 아는데, 필요하다면 소개해 주겠소.”
“……허허.”
“아니, 낙매신검을 그렇게 만든 놈을 잡아다가 죽이려면 세 손가락이 필요하지 않겠소? 자고로 검력(劍力)이란…….”
“괜찮소. 도왕의 염려는 충분히 알겠으나, 여기 있는 하 장로를 비롯하여 화산의 협의를 이룰 고수가 이렇게나 많소.”
칠지검협이 좌중을 가리키자, 남천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봐야 뭐, 마교에 속한 호법이나 교주에 비하면…….”
“선배!”
이를 보다 못한 백무량이 크게 외치니 남천이 소리를 마주 질렀다.
“귀 안 먹었다! 그냥, 그, 뭐냐, 믿음직스럽지 않아서 그렇지.”
남천의 눈에는 화산파의 무인이란 그럭저럭 쓸 만한 정도에 불과했다.
하물며 칠지검협조차도.
만금상단에서 마주했던 마인이 나타난다면 많은 수의 사상자가 발생할 것 같았다.
“쯧!”
마뜩잖다는 듯, 혀를 찬 남천이 팔짱을 꼈다.
“여기 백씨 도사가 화산파에 있는 동안 빈객(賓客)으로 지내고 있을 터이니, 장문인도 걱정하지 마시오!”
“고맙소, 금모도왕.”
“단! 선식은 먹지 않겠소!”
남천의 후안무치한 선언에 백무량은 헛웃음을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