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174화 (174/275)

재능 (6)

걱정은 한결 덜었다.

섬서성의 사파, 흑표방의 수준은 기껏해야 이류에서 삼류.

적어도 백무량이 보기에는 그러했다.

“대, 대협……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외눈이 핏물을 뱉어 내면서 고개를 조아렸다.

참으로 우스웠다. 만일 백무량이 약자였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해 보는 재미가 있었다.

외눈의 미래가 그렇게 정해졌다.

쩌억!

백무량의 좌수가 외눈의 하단전을 때렸다.

수십 년 동안 모은 공력이 무너지고, 선홍색 핏물이 외눈의 입가에서 토해졌다. 심각한 내상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네 오른팔의 경맥, 수양명대장(手陽明大腸)에 손을 보았다. 앞으로 닷새 동안 칼을 제대로 쥐지도 못할 것이다.”

백무량의 무덤덤한 말에 외눈이 눈살을 한가득 찌푸렸다.

“그, 그렇게 되면 저는…….”

“평소 은원대로 처리되겠지. 나도 안다.”

수양대장경이 상하면 오른팔을 제대로 쓰지도 못하는 것은 물론이요, 폐가 상하여 격한 움직임을 행하지도 못한다.

외눈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주 좋은 기회이리라.

물론, 백무량에게는 알 바 아니었다.

“그러니 똑바로 살지 그랬냐?”

“여기서 죽으나, 다른 사람한테 죽으나……!”

외눈이 왼손으로 비수를 쥐었다. 어떻게든 백무량에게 상처라도 하나 새기려는 모습이었다.

백무량은 그것을 가만히 보다가, 불쑥 물었다.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이유가 무어냐?”

“씨발, 그게 이제 나한테 무슨 소용…….”

“마교와 흑표방은 관련이 있더냐?”

“…….”

외눈이 인상을 찡그렸다. 극히 찰나 동안,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그것은 하나의 답이 되었다.

백무량의 마음이 부동심으로 화했다.

“뒷골목에서 사람을 노리려고 들었으니, 너 또한 노려질 각오를 했어야지.”

백무량은 외눈에게 보라는 듯이 등 뒤를 턱짓했다.

한평생 배불러 본 적 없는 빈자(貧者)들이 흉흉한 살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뻔했다.

[저놈에게 당한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느냐?]

심천검이 혀를 강하게 찼다.

백무량이 언뜻 보기에, 아이가 한둘 있었다.

쩌억!

백무량은 외눈의 왼손에 발길질을 했다.

외눈의 구명줄이라고 할 수 있는 비수가 저 멀리 내던져졌다.

“어디 잘 살아남아 보아라.”

“육시랄 놈아!”

“누가 그리될지 모르겠군.”

백무량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어린 빈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가, 감사합니다.”

“……?”

“대협 덕분에 원수를 갚을 수 있게 되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아이의 눈빛에 혈광이 가득했다. 좋지 않은 수호성을 타고난 듯했다.

이에 백무량의 공력이 분연히 일어나, 혈광을 짓눌렀다.

“살심에 휘둘리지 마라. 그걸 이겨 내지 못하겠다면, 나중에 청해의 곤륜으로 오너라.”

[오, 웬일로 도사 같은 말씀을 하실까?]

심천검의 농담에 헛웃음이 터질 뻔한 것을 꾹 참았다.

백무량의 미간이 찌푸려지자, 어린아이가 깜짝 놀라서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후, 백무량은 경신법을 펼쳤다.

남천과 진자충을 제외하고 가장 큰 기운.

그곳을 향해 솟구쳤다. 극에 이른 운중용형보는 신법의 영역에 가까웠다.

이윽고 백무량의 눈에 검은 마천루가 보였다.

‘저곳인 모양입니다.’

[허, 섬서성의 도문이 비실거리니 승냥이가 고개를 쳐드는구나.]

심천검의 시선이 정문에 내걸린 깃발로 향했다.

흑교상단, 흑철방.

흑표방이라는 본색을 드러내기 전에 썼던 가면이다.

백무량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끝까지 숨죽이고 있었다면 모르고 지나갔을 것을.”

백무량의 공력이 대맥에서 내관혈로 흘렀다. 태청신공 특유의 청아한 기운이 복잡했던 마음을 맑게 다스렸다.

그것을 다섯 손가락에 모아서 휘두르니.

쩌저적!

깃발과 현판이 동시에 찢어졌다.

고개를 꾸벅이던 문지기가 커다란 함성을 내질렀으나, 백무량의 휘파람이 빨랐다.

“휘이이……!”

지금까지 취한 영약과 영단의 숫자가 몇이던가!

“끄으윽…….”

문지기가 저절로 두 무릎을 꿇고 귀를 막았다.

대해에 가까운 파문.

가공할 만한 공력으로 이루어진 기파가 흑표방을 초토화했다.

“누구냐!”

마천루에서 수십의 무인이 쏟아져 나왔다.

백무량은 부서진 현판 위에 서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역시 외눈이 잡졸이긴 했군.’

[원래 약한 놈이 범부를 핍박하는 법이다. 강한 놈들은 그런 놈들을 여럿 거느리고서 착취하지.]

고개를 주억거린 백무량은 검에 손을 가져갔다.

외눈과 한패였던 상인에게 샀던 도축용 칼이었다.

“여기서 누가 흑표방주더냐?”

백무량의 목소리는 앞선 휘파람처럼 묵직하게 좌중을 내리눌렀다.

주르륵.

귀를 보호하지 못한 무인 몇몇이 핏물을 흘렸다. 평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놈도 있었다.

이에 많은 놈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감당할 수 없는 고수가 도래했다는 생각이었다.

바로 그때.

쌍도끼를 든 거한이 팔자걸음으로 나타났다.

“내가 흑표방주요. 얼굴을 가렸으니 존명대성은 듣기 어렵겠고, 무슨 일로 흑표방에 찾아온 것이오?”

“거슬려서.”

“……?”

“오랜만에 섬서에 왔는데, 어디 개돼지 같은 것들이 거리에 있지 않으냐. 그러니 친히 이런 칼을 사서 왔지.”

“아, 그러시다?”

흑표방주가 킬킬 웃고는 쌍수의 손목을 가볍게 휘돌렸다.

엄청난 무게의 도끼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것을 보니 용력을 타고난 것이 분명했다. 흔치 않은 외가고수였다.

백무량은 그를 한심하다는 듯이 보았다.

“그만한 외공을 쌓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을 터인데, 한다는 짓이 사파의 수장인가? 하물며 마교와 교섭하여?”

“이 짓도 나름대로 할 만하다오. 그리고…… 우리가 웬 마교랑? 다른 곳에서 그리 말하라고 시켰소?”

천연덕스럽게 받아친 흑표방주의 웃음은 자연스러우나, 주변의 수하는 그렇지 않았다.

백무량은 참으로 다행이라고 여겼다.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마교랑은 관련이 없다, 이런 소리라도 했다면 조금은 고민했을 텐데 말입니다.’

[마교에게 붙은 놈들에겐 자비를 보이지 말거라.]

‘나도 압니다.’

백무량은 복면의 매무새를 정리하며 검을 쥐었다.

***

이튿날.

잠에서 일어난 남천은 밝은 해를 보며 욕을 중얼거렸다.

“오늘따라 해가 지랄 같게 밝군.”

그뿐만이 아니라, 창밖의 사람들도 표정이 밝았다.

속에 묵혀 있던 것이 뻥 뚫린 것처럼 껄껄 웃는 자도 적지 않았다.

남천의 입가가 씰룩였다.

그 이유를 알 것 같았지만, 깊이 고민하진 않았다.

“아, 밥이나 먹자.”

남천은 방에서 나와 일 층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일찍 일어난 마부와 진자충, 백무량이 사오즈면을 먹고 있었다.

인상이 자동으로 찡그러졌다.

“어르신이 일어나지도 않았거늘!”

“선배께서 너무 늦게 일어났다고 생각하지 않으시오?”

진자충의 볼멘소리에 남천은 속으로 욕을 중얼거렸다.

‘저 속 좁은 새끼.’

“아, 그리고 다섯 보 이상 멀어지려면 다른 탁자에서 드셔야 합니다.”

“웬 다섯 보?”

“선배께서 저한테 그러지 않았습니까. 먼저 말도 걸지 말고 다섯 보 이상 떨어져 다니자고요.”

남천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진자충을 보았다.

“다 기억하고 살면 불편하지 않냐?”

“원래 좋은 집안 출신이 그렇지요.”

“……허.”

혀를 찬 남천은 백무량에게 전음을 보냈다.

[쟤 대체 왜 저러냐?]

[먼저 섭섭하게 군 건 선배지 않습니까?]

[아, 제기랄. 그래도 내가 나이를 쟤보다 훨씬 많이 먹었는데 사과를 해? 무공도 내가 더 뛰어난데?]

[원래 진 선배가 무공에 대해선 한없이 관대한 사람인데, 사람 대하는 것엔 되게 예민합니다. 어찌 푸셔야 할지 아시겠지요?]

백무량의 전음에 남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뭐, 비무라도 하라고?]

[잘 아시는군요. 그렇게 되면 저랑 겸사겸사…….]

[염병. 그냥 불편하게 지내고 말겠다.]

전음을 마친 남천은 다른 탁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큭.”

옆에서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려서 째릿 노려보니.

언제 그랬냐는 듯 백무량이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쟤도 만만치 않은 미친놈이란 말이지.’

결국 정상인 건 자신밖에 없다.

남천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점소이를 불렀다. 어쩐지 바깥사람들처럼 싱글벙글한 표정이었다.

“나도 사오즈면이나 줘라. 그리고 뭐가 그리 재밌냐?”

“흑표방이 모두 죽었답니다!”

“그게 뭔데.”

“그, 모르십니까? 칠성교가 산동성에서 나타났을 때부터 패악질을 부리기 시작한 놈들인데, 글쎄…….”

긴 이야기는 질색이었다.

남천은 흥미가 식었다는 표정으로 점소이의 말을 끊었다.

“사파냐?”

“예…….”

“잘 죽었네.”

“그렇지요!”

“어떤 놈이 협객 짓을 벌였다나?”

“그거야 저도 잘은 모르는데, 복면을 썼답니다!”

점소이의 말에 남천의 시선이 저절로 옆으로 향했다.

“너냐?”

“누구한테 말하는 겁니까?”

진자충이 뚱한 목소리로 답하자, 남천이 순간 욱하여 대답했다.

“속 좁은 새끼 말고!”

진자충의 표정이 대번에 구겨지는 것과 동시에 백무량이 젓가락을 놓았다.

“일단 저는 아닌데, 흑표방이 칠성교나 성화교에 끈이 있었던 놈들이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는 곳의 변고가 그놈들과 관련이 있었답니다. 단서도 어느 정도 들었고요.”

“그런데?”

“흑표방주가 마공을 익혔다는 말도 들었지요. 지금은 죽었지만.”

남천은 씨익 웃었다.

“그걸 네가 어찌 아느냐?”

“복면을 쓴 사람과 잠시 만났습니다. 아주 걸출하고 대단하고, 뭐, 어떤 미사여구를 붙여도 좋을 협객이었지요.”

아주 천연덕스러운 말에 남천도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와, 너는.”

“그 복면인 덕분에 행선지의 정보도 알아냈으니 다행이지 않습니까?”

백무량은 어깨를 으쓱였다.

참으로 눈 뜨고 보지 못할 광경인지라, 심천검마저도 백무량에게 쓴소리를 했다.

[티를 내지 못해서 안달인데, 그 방식도 참으로…….]

‘뭐요, 뭐가요.’

[…….]

심천검은 후배의 일탈이 참으로 걱정스러웠다.

***

“곤륜신성이 이곳으로 온다고?”

성화교의 후인(後人), 염화가 서쪽을 바라보았다.

설명은 충분히 들었다.

칠성교를 여러 차례 격퇴했으며, 청노와 괴성을 상대로 살아남은 도사.

천명을 이어받은 것으로 확실시 되는 대적자.

염화의 입가가 비틀어졌다.

“그 운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궁금해지는군. 그렇지 않나?”

염화는 가부좌를 틀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주화입마에 빠졌음에도 의식을 놓지 않은 채 자하신공 특유의 화기로 자기 자신을 정화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참으로 대견했다.

육신이 죽었음에도 정신으로 버티고 있는 셈이니까.

“낙매신검.”

“…….”

“그렇게 해 봐야 얼마나 버틸 수 있겠나. 곤륜신성이 온다고 한들, 달라지지 않아.”

염화는 히죽 웃으며 바깥을 바라보았다.

백련교주에 의해 무너진 성지, 매화비원.

‘이곳이라면…….’

성화교를 다시 되살릴 발판이 될 수 있으리라.

염화는 오른손을 꽉 쥐며 곤륜신성이 오기를 기다렸다.

백무량에게 진정으로 천명이 있다면, 그것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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