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 (5)
가끔 염증이 날 때가 있었다.
흑과 백.
정파와 사파.
무인과 마인.
그렇게 이분(二分)하는 세상, 혼란한 강호이 도래하여 눈은 자연스레 어지러워지고 귀에 잡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멀쩡하던 도사가 은거하는 이유가 뭔지, 이해가 안 되던 때가 있었는데.’
백무량은 인상을 찌푸린 눈으로 마차 바깥을 보았다.
진자충이 근래 사파의 움직임이 늘었다더니,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
여인을 희롱하려는 파락호가 확실히 늘었다.
화가 불쑥 치솟았지만, 직접 나서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네가 나섰다가는 흑도 놈들이 동네방네 소문을 내겠지.”
곤륜신성 백무량은 마교와 사파가 예의 주시하고 있노라고, 무공을 보고 알아차릴 놈이 수두룩하다며.
남천은 백무량의 ‘청운’을 지적했다.
“네 무공은 이미 일문을 개파할 만큼 고강하여 남들에게 볼 수 없는 특색을 갖췄다. 설령 그걸 쓰지 않는대도, 섬서성에 마인이 수두룩할 거야.”
“알고 있습니다. 제가 나서면 누구든 의문을 품을 테니, 칠지검협의 침묵이 수포가 되겠지요.”
“잘 아는구나.”
“하지만 저 밖에 많은 주둥이가 있지 않습니까?”
백무량의 언동은 도사답지 않게 성급하고 감정적이었다.
이에 남천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좆같은 것들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떠들기는 하지. 파락호들의 낭심도 다 짓이겨 버리고 싶을 거고 말이야.”
“예.”
“근데 넌 밭 가는 법 아냐? 저 주둥아리들도 그거랑 똑같은 거야. 그냥 무림을 모르는 거지. 파락호는 병신들이고.”
“…….”
남천이 저런 말을 할 줄은 몰랐기에 백무량은 순간 침묵했다.
그것을 본 남천의 얼굴에 웃음이 맺혔다.
“왜. 나도 막 성질대로 엎어 버릴까, 시팔, 이런 말이라도 할 줄 알았나?”
“솔직하게는 그렇지요.”
“원래 낭인이 무지렁이나 병신이랑 친한 법이야. 나야 덩치가 커서 그렇지, 다른 낭인은 곡식을 받고 일할 때가 잦아. 젠장, 도사 앞에서 어려운 얘기를 하자니 머리가 헛도네.”
남천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하여튼. 왜 무림을 모르는 사람한테 많은 것을 바라는 거냐? 저들은 그냥 가뜩이나 힘든 삶이 더 힘들어져서 그런 거야. 별세계 사람들이 힘 좀 세다고 어깨 으쓱대고 그러면 얼마나 좆같겠냐? 마교에 이어 사파까지 그 지랄을 한다고.”
“…….”
“너무 축 늘어지진 마라. 원래 도사가 심산유곡에서 벽 보고 있다 보면 민생을 모르고 그래.”
남천의 시선이 구석에 있는 진자충에게 향했다.
“우리 무림맹 나리는 어때?”
“저는, 뭐.”
“좋은 집안 출신이라며?”
“…….”
“흙이나 나무뿌리 먹어 봤냐? 콱.”
남천이 주먹을 슬며시 쥐자, 무언가 항변하려던 진자충도 입을 꾹 다물었다.
백무량은 그 모습을 보다가 다시 마차 밖을 보았다.
여전히 눈과 귀가 어지러웠으나 방금보다는 나았다.
그때 심천검이 말을 걸어왔다.
[막돼먹은 사람이긴 하군. 하지만 근본적으로 선함이 있으니 할 수 있는 말이야.]
‘선배도 저 말에 동의하십니까?’
[뭐, 아주 궤변은 아니야. 학문을 익히지 못하고 생업에 뛰어든 사람이라면 십분 공감할 걸세. 그리고 자네가 마차에서 본 사람 중 상당수가 그러하겠지.]
‘천하가 안정을 찾으면 평온해질 광경이란 소리겠군요.’
[그렇지.]
그 말에 백무량은 미소를 머금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분심조화결을 수련하는 데 작은 밑바탕이 될 것 같았다.
다만 이곳에서 한 가지는 확실하게 짚고 싶었다.
그걸 위해서는 남천을 설득할 필요가 있었는데, 무척 쉬운 일이었다.
“남 선배, 오늘은 여기서 하루를 쉬어 가는 건 어떻습니까?”
“좋지! 어이, 마부! 이 근방에서 제일 음식을 잘하는 객잔에 멈춰 주게!”
남천의 목소리에 어느 때보다 큰 활기가 돌았다.
***
마부는 마차를 몰던 말들을 마구간에 들이고 나서야 객잔에 들어섰다.
끼이익.
문이 열림과 동시에 남천과 눈이 마주쳐, 어색하게 웃었다.
‘괜히 책잡히면 안 돼.’
서둘러 시선을 내리깔았다. 출발 전부터 직감했지만, 남천은 근래 본 무림인 중에 제일가는 미친놈이었다.
꼬투리를 잡혔다가는 아마 평생 후회하리라.
그렇게 조용히 잠자리로 물러가려는데, 남천이 불쑥 물었다.
“그놈 어디 갔어?”
“예? 그놈이라니요?”
“재수 없게 생긴 녀석.”
“아, 아아…… 그 도사…….”
마부가 끝말을 잇기 전에 남천이 한 손을 내밀었다.
거리가 적어도 열 걸음은 떨어져 있었는데, 어느새 마부의 입가가 남천에게 붙잡혀 있었다.
‘대체 언제?’
마부가 소스라치게 놀리는 사이, 남천이 히죽 웃었다.
“너도 그놈이 재수 없게 생겼다고 생각했구나? 솔직해. 솔직해서 아주 마음에 드는데, 말은 장소를 가려서 해야지.”
‘아……!’
송우현이 입조심을 누누이 강조하지 않았던가!
마부는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왼손으로 뺨을 긁었다.
“그게, 제가 안장을 내리는 사이에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객잔으로 들어가고 나서?”
“예.”
“하, 고놈, 고놈 참.”
남천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끄럽지 않게 조용히 움직이려고 했는데, 어디 말코 아니랄까 봐 달밤에 지랄하러 갔군.”
그 말에 마부는 저도 모르게 하늘을 보았다.
둥글게 살찐 달이 여름 밤하늘에 휘영청 밝게 떠 있었다.
***
[그저 지나가면 될 일이다. 무량아, 무엇이 너를 움직이게 하였느냐?]
심천검이 의뭉을 떨었다. 속내에 시커먼 것을 가득 안고서, 의중을 떠보려는 듯했다.
백무량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행낭에서 검은 무복을 꺼내 입었다.
그것만으로 번듯한 도사의 행색은 완전히 사라졌다.
골목에서 누군가와 마주친다면 비명을 지를 행태.
곤륜도가 바깥에서 신분을 숨기고 일을 저지르려고 하니, 사문의 법식을 어기는 꼴이다.
이에 심천검이 재차 의뭉을 떨었다.
[무량아, 달라지지 않는다. 네가 파락호 한둘을 처리한다고 하여 한번 혼란스러워진 천하는 다스려지지 않는다. 소악(小惡)이 빈자리를 메꿀 뿐이야.]
“……상관없습니다.”
의도치 않았는데, 메마른 목소리가 나왔다.
백무량의 눈이 반쯤 감겼다.
평소에 명(明)과 암(暗)을 동시에 담던 눈동자가 지금은 어두움만을 좇았다.
그것은 아주 먼 과거, 백무량이 고아이던 시절.
다섯 살 어린아이가 대수롭지 않은 소악에 의해 불운해졌다는 구구절절한 연유가 있었다.
‘애초에 제가 사문의 법도를 잘 지켜 온 것도 아니잖습니까?’
최대한 밝게 이야기했는데, 왠지 모르게 음울했다.
백무량은 심천검에게 심리가 읽히지 않도록 상단전에 공력을 집중했다.
완성에 다다라가는 태청신공이 무형의 벽을 형성했다.
심천검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이 또한 하나의 대답인 게지.]
‘구질구질한 옛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뭐, 거창하게 말하자면 일단은 그겁니다.’
평소처럼 건방진 농담을 던지듯이.
백무량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마교가 들불처럼 일어나고, 어둠 속에 침묵하고 있던 사파가 고개를 쳐드는 혼세에서 어찌 곤륜도가 대의가 중하다고 하여 소악을 무시하겠습니까?’
[그래. 네가 예전에 죽였다던 운산보처럼 말이냐?]
‘운산보도 이놈들에 비하면 사뭇 거악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무공을 모르는 사람을 괴롭히고, 여인을 희롱하며, 괜한 트집을 잡아서 돈을 갈취한다.
무림에서는 정말 사소한 악행이다. 사파가 연루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눈앞에 두고서 무시할 수 있느냐면, 아니었다.
백무량의 발걸음이 저잣거리로 향했다.
그러다 둔탁하고 큼직한 칼이 눈에 들어왔다.
“이 칼은 얼마요?”
상인의 눈이 백무량의 위아래를 훑었다.
“소나 돼지를 잡을 때 쓰는 칼이네. 자네처럼 곱상하고 똑바른 청년이 쓸 것이 아니야.”
“그러려고 사는 겁니다.”
“허, 가족이 심부름이라도 시켰나?”
백무량은 말없이 웃었다. 정체를 숨길지언정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고 싶진 않았다.
그러니 상인이 제멋대로 이해했다.
“좋네. 날이 크고, 잡철이 적게 들어간 물건이니 여덟 문은 받아야겠네.”
“받으시지요.”
“고맙네!”
상인에게 칼을 건네받은 백무량은 휘파람을 휘휘 불며 골목으로 향했다.
손가락으로 칼날을 대 보니 상당히 무뎠지만, 상관없었다.
공력을 불어 넣어 날카롭게 만들면 그만인 것을.
저벅, 저벅.
백무량은 복면을 얼굴에 뒤집어쓰며 골목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일각.
저잣거리를 밝히던 등불이 시야에서 사라지니.
비로소 어둠이 찾아왔다.
“곱상한 양반!”
상인이 했던 말이 골목 끄트머리에서 들려왔다.
차갑고 길게 찢어진 외눈이 야명주처럼 빛났다.
‘선배, 내가 복면을 쓰고 있는데 곱상하답니다.’
[멍청한 놈이 상인과 한패로구나.]
백무량은 제자리에서 멈추고서 끅끅 웃었다.
그 웃음이 광인이라기엔 너무나도 침착한지라, 도리어 외눈이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뭐야, 복면은 갑자기 왜 썼고, 뭘 그리 처웃느냐? 네가 지옥문 앞에 있음을 모르겠느냐?”
“여긴 아무래도 우두머리가 멍청하거나,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바쁜 모양이다.”
“그게 뭔 헛소리냐?”
“지옥문의 위치도 모르면서 누구보고 앞에 있느냐고 묻느냐?”
그 말에 외눈의 인상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이곳은 흑표방의 영역이다! 네깟 것이 누구라고 감히 큰소리를 치느냐?”
“복면을 벗겨 보든가 해라, 실력이 있다면은.”
백무량은 남천의 말투를 의도적으로 따라 했다.
그 말투가 굉장히 어색하고 투박하여, 외눈 입장에서는 조롱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 말을 후회하게 해 주마!”
“옛날엔 사파가 무림의 한 축을 이루었다는데, 지금은 영락하게 하류 인생일 뿐이구나. 내가 토박이인지, 외지인인지, 어느 마차를 타고 왔는지도 모르면서 당당한 이유가 무어냐?”
“……자, 잠깐.”
그제야 외눈의 이성이 침착을 되찾았다.
저잣거리에선 얼굴을 드러냈던 놈이 사파의 구역에선 복면을 썼다?
용무가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다는 방증이다.
외눈이 두 팔을 백무량에게 뻗으며 외쳤다.
“잠깐! 설마 우리 방주께 용무가 있었느냐?”
“…….”
“내가 안내하겠다! 호, 혹시 화산파의 도사라면…… 무릎이라도 꿇으마!”
백무량은 점차 구차해지는 외눈을 보았다.
외눈에게 걸어가다 보니, 시선이 점차 아래로 향했다.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바닥에 처박는 모습.
압도적인 공력에 게거품을 물며 옆으로 쓰러지는 추태까지.
하나뿐인 눈에서 실핏줄이 터져서는 백무량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사, 살려 주시오……. 내가 아직 잘못한 게 없지 않습니까…….”
백무량은 외눈을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왼발을 강하게 내질렀다.
퍼엉!
가죽 북이 터지는 듯한 굉음이 골목에 감돌았다.
외눈의 입가에서 한 됫박이나 되는 피가 토해졌다.
바로 그때.
스르륵.
한 자루의 비도가 추가 품에서 흘러나왔다.
“하, 하하…….”
외눈이 어색하게 웃었다.
제 딴에는 호신용이라느니, 세상이 혼란스러워서 들고 다닌다는 말을 쉴 새 없이 중얼거렸다.
다만 백무량에겐 들리지 않는 잡음일 뿐이다.
“처음부터 네 도움은 필요하지 않았다.”
완성에 다다른 태청신공은 기감을 극도로 끌어 올리고도 남았다.
강호십대고수가 작정하고 은신하지 않는 이상, 이곳저곳을 쏘다니면서 찾으면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백무량은 그것을 외눈에게 말해 주면서 웃었다.
“그냥 여기 수준이 어떤가 궁금해서, 널 찾아온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