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172화 (172/275)

재능 (4)

“하필이면 동행이 그때 만난 투견이라니.”

남천의 툴툴거리는 어조 속에 약간의 반가움이 있었다.

일찍이 만금상단에서 마주한 적이 없었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만큼 자그마한 감정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진자충처럼.

“혹여, 백 후배와 악연이라도 있으신지요?”

“악연은 무슨. 아, 귀찮게 엉겨 붙은 것도 악연이라면 악연이겠지.”

남천이 샐쭉한 눈으로 진자충을 흘겼다.

“근데 누구요? 갑자기 나한테 알은척하고, 난 당신을 모르는데?”

“저는 무림맹 직속, 청룡대주 진자충이라고 합니다.”

“아,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이군.”

남천이 질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백무량은 속으로 끅끅 웃었다.

비무를 싫어하는 남천에게 있어 진자충 같은 무공광은 천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말 걸지 마라. 친해지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넉넉하게 다섯 보 이상 떨어져서 다니자고.”

“이 무슨, 무례한……!”

처음에는 주먹을 쥐고 부들거리던 진자충이었으나, 남천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다니자니요? 저희가 어디로 가는지 아시는 겁니까?”

“말이 섭섭하군. 특별히 부탁을 받고 온 몸인데 말이야.”

남천의 시선이 백무량에게 향했다. 진자충에게는 안중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자네를 아끼는 사람이 생각보다 꽤 많은 모양이야?”

그 말에 백무량은 턱을 매만지면서 내막을 짐작했다.

‘만금상단주나 무림맹주, 아니면 둘 다인가?’

금모도왕 남천.

강호십대고수 이전에 낭인(浪人)이라는 이름에 나름대로 철칙과 자부심을 가진 무인.

자기가 인정하고 있는 의뢰인과 적당한 금액이라면 신의(信義)를 지킬 남자였다.

백무량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나이 많은 친구가 많은 편이지요.”

“허, 족보를 웃으면서 망가트릴 놈이로다.”

말은 그렇게 해도 남천의 얼굴에 유쾌함이 가득했다.

‘예나 지금이나 낭인이란, 참.’

허례를 거절하고 자유분방하게 사귀기를 좋아한다.

단, 실력이 된다는 가정하에.

백무량은 남천이 자신을 어느 정도 인정했을 알아차렸다.

“한데 선배께선 무슨 부탁을 받으신 겁니까?”

“호위.”

“의뢰인이 짧게 말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요.”

“화산파까지 잘 데려다 놓으란다. 이제 설명이 됐나?”

백무량은 의뢰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시선이 저절로 진자충에게 향했다.

“그렇다고 하오, 진 선배.”

“……왜 갑자기 나를 보나?”

“우리가 화산파로 갈 것이라고 알 만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글쎄, 칠지검협께서 아시지 않았을까?”

“…….”

백무량은 말없이 진자충을 보았다.

공력을 일으키지 않아도 됐다.

눈이야말로 상단전의 창문이라고 하였다.

단지 집요하게 바라보는 것만으로 상단전이 와류를 일으키고, 의념을 토해 내는 경지.

그 시선에 강한 압박감을 느낀 진자충이 욱, 하는 소리를 내었다.

남천의 얼굴에 못마땅함이 가득했다.

“하여튼 칼 휘두르는 말코 원숭이 아니랄까 봐, 곱게 아가리로 물으면 될 걸 의념을 쓸데없이 소비하는군.”

백무량은 남천의 불평을 한쪽 귀로 흘리고는 진자충에게 물었다.

“서찰을 무림맹주께 먼저 보여 주셨습니까?”

“끄으음…….”

“저한테 굳이 숨길 이유가 있었습니까?”

“옳은 행동은 아니지 않나.”

그 말에 백무량은 진자충에게 시선을 거두었다.

진실을 들었지만, 한쪽 입술이 불만스럽게 비틀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칠지검협도 확인하지 않은 서찰을 어째서 무림맹주에게 보여 준단 말입니까?”

진자충은 한차례 크게 심호흡했다.

“후우…… 솔직히 말함세. 낙매신검께서 그리되었는데 어찌 칠지검협을 신뢰하겠는가? 나로선 최선의 판단을 내릴 사람이 맹주님이셨네.”

“그것이야말로 마교가 노린 것이겠지요.”

의심암귀.

한낮에도 사람의 눈과 귀를 가리기에 충분한 암계다.

백무량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자충의 말에 일정 부분 공감하는 자신이 속내에 존재했다.

‘낙매신검에게 해를 끼칠 정도로 경계하지 않으며, 무공이 뛰어난 자가 화산 내에서 많지는 않지.’

기껏해야 장문인과 장로들.

그들이 아니라면 낙매신검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 무언가 주술을 일으키기도 전에 상반신이 잘릴 터였다.

백무량과 진자충이 침묵하는 사이, 남천이 혀를 찼다.

“구파의 문내(門內)가 사승의 관계요, 무학으로 이어진 가족이라고 하나 결국 남이 아닌가? 낙매신검 그놈, 예전부터 내 그럴 줄 알았지.”

“말씀이 심하시오, 선배.”

백무량의 제지에도 남천은 끌끌 웃어댔다.

“지금 당장 천마총(天魔塚)이 발견되면 죽어 나갈 수가 기백은 될 것이다. 강호의 의리에 대체 무엇을 기대하느냐? 낭인처럼 살았더라면 낙매신검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천의 말에는 강호에 대한 뿌리 깊은 환멸이 느껴졌다.

그것을 숨기지도 않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 또한 남천답다고 할 수 있었다.

하나 지금은 구파의 허례를 욕할 때가 아니다.

백무량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선배가 구파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았으니, 그 문답은 나중으로 미뤄 둡시다. 그리고 진 선배.”

“……응?”

“무림맹주에게 서찰을 보여 준 것 자체는 탓하지 않겠지만, 나한테는 말해 주었어야 했소이다.”

“미안하네. 내 생각이 짧았네.”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으면 합니다.”

언중유골이라고 하였던가?

백무량의 말에 진자충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천도 뒷말을 애써 삼키는 기색이 역력했다.

낭인이 아무리 자유분방한 기질을 가지고 있다 한들, 조절하지 못하면 일개 파락호만도 못한 법이니까.

백무량은 슬며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야 상황이 명쾌히 풀리는 듯했다.

“금모도왕 선배는 무림맹주가 고용한 것으로 이해하겠소. 그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니까.”

“…….”

남천이 침묵했다.

낭인으로서의 철칙을 항시 지키는 그였기에 침묵은 하나의 답이 되었다.

백무량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이걸 모르리라 여겼다면 무림맹주답지 않으니, 서찰을 먼저 읽은 사실을 숨기려 한 게 아니었을 거요.”

그 말에 진자충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붉어졌다.

충정의 발로가 아둔함으로 이어졌으니, 진자충에게는 나름대로 공부가 되었을 터다.

그렇게 두 선배의 기를 휘어잡은 백무량은 산하객잔의 문을 열어젖혔다.

드르륵!

열린 문 사이로 송우현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많이 늘었구나, 우리 백가 애송이.”

“누구한테 많이 골탕을 먹다 보면 잔머리라도 늘기 마련인지라.”

백무량은 송우현과 자연스레 눈인사를 마치고는 미리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강호의 세 영웅께서 멋있게 타고 갈 마차를 준비해 주시오. 갈아탈 곳도 미리 점지해 두셨을 거라 믿겠습니다.”

“네가 나이 든 선배들한테 버릇없이 굴 때 이미 준비해 두었느니라.”

송우현이 손아귀에 쥐고 있던 종이 뭉치를 백무량에게 건넸다.

겉면에 찍혀 있는 만금상단주의 직인(職印).

조원양에게 미리 받아 둔 물품인 듯했다.

백무량은 송우현에게 포권하고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갑시다, 선배님들.”

그 말에 진자충과 남천이 군말 없이 따라왔다.

강호에서 개성이 강하기로 유명한 두 고수.

그들은 어느새 백무량의 기세에 사로잡혀서는, 은연중에 함부로 대하지 않기 시작했다.

***

드르륵, 쿵!

만금상단이라는 깃발이 올려진 마차가 관도를 질주했다.

바깥에서 마부가 말들을 채찍질하는 가운데, 내부의 세 고수는 침묵한 채 각자 상념에 잠겨 있었다.

‘설마 칠지검협께서 마교의 마수에 놀아난 건 아니겠지.’

진자충은 강호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으며.

‘아, 배고프다. 설마 한 시진도 늦어져선 안 된다고 끼니를 거지 같은 걸로 채우지는 않겠지.’

남천은 석식을 고민하고 있었다.

남이 보기엔 미련하고 무정한 생각이었으나,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낙매신검 그놈. 수양 만큼은 통천옹이나 공저대사 못지않다. 주화입마에 빠졌다고 한들 한 달은 족히 버틸 놈이야.’

방금은 마교의 마수에 빠졌다는 것이 한심하게 느껴져 악담을 내뱉었지만, 낙매신검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한때 자하신공을 완성할 자로 불렸겠는가.

‘하여간, 어린놈들은 섣부른 걱정이 많아.’

남천의 시선이 백무량에게 향했다. 많은 상념에 빠진 채 헤어 나오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어이, 젊은 말코.”

“……?”

“화명이, 그놈은 그만 걱정하지 그래?”

“화명은 또 누굽니까?”

“낙매신검의 옛 이름이 정화명이야. 세상의 뜬소문만 들었을 땐 거의 호형호제라더니, 아니구만.”

“제 연배에 어찌 함부로 대하겠습니까?”

그 말에 남천이 히죽 웃었다.

“그런 것치고는 나나 저기 저 자충이한테는 말이 제법 자유분방하던데?”

“앞으로 깍듯이 하면 되겠습니까?”

백무량이 고개를 슬쩍 기울인 채 물었다.

남천은 괜히 닭살이 돋는 듯해서 목소리를 돋웠다.

“내가 그런 허례를 좋아하는 사람처럼 보이나? 어차피 화산파에서 볼일 끝나면 헤어질 사이니 편하게 말해!”

“그래, 남천아.”

“…….”

“편하게 말하라더니, 표정 푸시지요. 농담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백무량의 태도가 무심하여, 남천이 허탈할 지경이었다.

“거, 시팔. 아주 면면이 다채로운 후배일세.”

“예전엔 자주 들었던 말이고, 요즘은 자중하고 있습니다.”

“근데 왜 나한테는……?”

“이런 걸 좋아하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남천이 무언가 입술을 달싹이려던 그때, 백무량의 전음이 귓가에 들려왔다.

[그나저나 태산검문에 대한 건 알아보셨습니까?]

[내가 왜.]

[저번에 헤어질 땐 알아본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백무량의 목소리에 어이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조원양 앞에서 그렇게 말했던 게 불과 백 일도 채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남천은 당당했다.

[까먹었다. 그리고 뭐, 그게 언제 밥 한번 먹자는 말이나 비슷한 것이지.]

[…….]

백무량의 침묵에 싸늘함을 느낀 남천이 전음을 덧붙였다.

[태산검문의 역사를 알아보는 게 한두 달 만에 되는 건 아니잖냐?]

[그건 그렇지요.]

차분한 음색 안에 여러 욕이 담겨 있었다.

당장 백무량의 표정만 봐도 그러했다.

‘내가 선배만 아니었으면 한 대는 쥐어박았겠는데?’

[나중에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허, 그래.]

다음에는 백무량과 절대 마주하지 말아야겠다고, 남천이 결심하게 되는 계기였다.

***

일주일이 흘렀다.

청해성의 좁았던 길이 섬서성에 가까워지면서 보다 넓어졌다.

그만큼 사람의 입도 많았다.

“근래 화산파가 출입을 금하고 있다던데?”

“이상하군. 마교의 목을 베어 의와 협을 보이겠다던 도사들 아니던가?”

“목숨이 아까운 건 누구나 마찬가지겠지.”

화산파가 목숨을 걸고 증명한 의와 협을 의심하는 입이 있었다.

그들은 입을 한데 모아 무언가를 깎아내리는 한편.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외가 소식은 며칠 전에 들었네. 내가 술이라도 한잔 사지.”

“……솔직히, 실망스럽네.”

침묵하던 입을 찬동시키기도 했다.

백무량은 마차 안에서 그것을 막연히 지켜보았다. 해결할 방법을 가끔 고민하긴 했으나, 불가능한 것이었다.

사람은 쉽게 잊고 쉽게 기억하기 마련이니까.

‘더욱 무서운 것은 역시 그거겠지요.’

[저들 중 마교의 하수인이 몇이나 있겠느냐, 그거지.]

심천검은 옛일에 잠겼다.

[나 때는 전서구를 훈련시킨다는 지식조차 희박했다. 그때의 칠성교는 천하무적이었어. 황색의 곤룡포와 초상화를 본뜬 얼굴이면 모두가 무릎을 꿇었지. 내 얼굴로 패악질을 부리던 놈도 있었고.]

‘…….’

[휩쓸리면 안 된다, 후배야. 지금은 타문의 일이니 넘길 수 있겠지만, 네 사문의 일이어도 넘겨야 한다.]

단 한 사람.

무공을 모르는 사람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며, 심천검이 성심어린 조언을 해 주었다.

백무량은 그것을 무심한 표정으로 듣기만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