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 (3)
시간은 해시에서 자시로 흘렀다.
가히 한 시진을 검을 나누는 데 보냈음에도 두 도사는 지친 기색 없이 제 기량을 발휘했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욱 뜨겁게 투쟁했다.
무인에게 있어 탑이라고 불리는 영역.
자신만의 무론을 펼치는 데 있어, 백무량은 어떤 무림인보다 잡학다식하고 확고한 위치에 있었다.
“……우웃!”
갑자기 들이닥친 경파에 현종휘의 몸이 기울고.
“헉.”
검로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흩날리는 화검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현종휘의 얼굴에 웃음이 점차 지워졌다.
하지만 그 안에서 현종휘는 한 가지 확신을 얻었다.
‘더 강해지셨어.’
그것이 설령 곤륜파의 무학만으로 강해진 것이 아닐지언정, 백무량에게 깊은 뜻이 있으리라고.
현종휘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백무량이 귀중한 것을 보였으니 자신도 보여 줄 때였다.
쿠르르……!
용천혈로부터 치솟은 공력이 지실혈을 타고 올라 수구혈에 이르렀다.
자칫 잘못하면 혼절할지도 모르는 운용에 백무량의 인상이 찡그러졌다.
하나 백무량은 아직 알지 못하리라.
이것을 원숙하게 펼치기 위해 현종휘가 얼마나 열심히 연습하였는지를.
[이 초식의 이름은 뇌창신광(雷槍神光)이라 합니다.]
분광검의 승검신광과 분광뇌운결의 완벽한 합일.
재능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초식이 백무량을 향해 쇄도했다.
노련한 움직임으로 기세를 점했던 백무량의 표정이 일순 굳는 순간.
“……실로 뛰어나다. 나 못지않게.”
백무량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분심조화결로부터 이루어진 연검(連劍). 수경과 팔첨에 공동파의 경파가 뒤섞였다.
꽈르르!
적은 양의 경력이 서로 부딪치며 막대한 진동을 일으켰다.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한 굉음에 고요하던 곤륜파가 시끄러워졌다.
“이게 무슨 일이야?”
“저기 연무장에서……!”
잠에서 깬 곤륜도가 중얼거리는 소음이 백무량의 흥을 깼다.
이는 현종휘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그만하면 안 될까요?”
“왜냐?”
“제가 방금 펼친 걸 보면 계속 시달리거든요. 수련 시간이 없어져요.”
“……하하.”
백무량은 까닭 없이 웃음소릴 흘렸다.
방금의 대화 역시, 옛날의 현종휘였다면 하지 않았을 말이었다.
자신이 익히고 있는 것이라면 시간을 버려서라도 동문에게 알려 줬을 터.
현종휘가 달라진 이유야 명약관화했다.
[저 아이도 자신이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 깨달은 것이야.]
‘아예 끝까지 모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해한다. 나 또한 그러하였으니.]
심천검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이 내린 굴레란 늘 잔인하고 무정하다.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어느새 묶여 있기 마련이었다.
백무량은 어두운 속내를 애써 감추고는 현종휘에게 웃음을 보였다.
“이만 자자꾸나. 나도 내일 하산해야 하니 말이다.”
“……예.”
현종휘의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하기에, 백무량은 한마디를 슥 던졌다.
“그나저나 철유가 요즘 수련이 부족한 것 같더구나. 네가 직접 알려 주는 게 어떻겠느냐?”
감히 하늘 같은 대사형을 잠시나마 무시하고 진자충을 우대한 죄.
백무량은 그 일을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백무량은 간단히 배를 채우고는 행낭을 챙겼다.
뒤이어 처소에서 나오니, 철유가 불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대사형…….”
“무슨 일이 있느냐?”
“그게, 현 사형께서 저를 갑자기…….”
“대사형이 되어서 어찌 사소한 일에까지 간섭하겠느냐? 하물며 종휘의 성격을 내가 아는데, 네가 무언가 잘못을 했겠지!”
백무량은 딱 부러지게 철유를 혼내고는 진자충의 처소로 향했다.
왠지 모르게 휘파람이 저절로 나와서, 자연스럽게 불었다.
“진 선배, 안에 계시오?”
“……곧 나가겠소.”
그렇게 대답하는 진자충의 목소리가 어둡고 산만했다.
지난밤에 무슨 일이 있었나 생각했지만, 현종휘와의 비무 외에는 없었다.
[뭐, 그걸 보고서 심마에 빠질 수도 있지.]
‘심마에 그리 쉽게 빠지면 그게 심마겠습니까?’
[그도 그럴 것이, 너야 이미 공적을 수많이 쌓았지만 네 사제는 저놈의 아들뻘 나이가 아니더냐!]
‘설마…… 종휘를 질투하겠습니까?’
[질투는 아니더라도 재능의 벽을 느꼈겠지. 하기야, 너나 나나 그랬던 적이 없어서 공감은 못 하겠지만 말이다.]
심천검과 대화를 어느 정도 나누던 차에 처소의 문이 열렸다.
끼이익…….
퀭한 눈의 진자충이 백무량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앞서 걸어갔다. 빨리 하산하고 싶다는 의도가 뻔히 보였다.
백무량으로선 다소 의외였다.
무림맹 직속, 청룡대의 수장다운 모습이 아니었다.
“진 선배, 장문인께 인사는 드리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사는 충분히 나누지 않았나? 그…… 자시에 했던 비무에서도 말일세.”
“그건 그냥 비무였지요.”
‘그냥 비무’라는 말에 진자충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지금은 낙매신검을 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네. 자칫 잘못하면 화산파가 크게 흔들릴지도 모르네.”
흔들린 감정이 듬뿍 묻어 나오는 어조에 심천검이 헛웃음을 흘렸다.
[보아라. 역시 어제 일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구나.]
‘그렇다고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게 문제지. 무인의 질투는 성가신 법인 것이야. 화산파로 향하는 동안 말을 자주 붙이거라.]
심천검은 옛일을 떠올리고는 백무량에게 충고했다.
[무림의 정세에 밝은 무인이 마교 편으로 넘어가면 그만큼 성가신 일이 없다.]
‘설마, 어찌 무림맹의 청룡대주가 그러겠습니까?’
[순진하기는. 송우현이라는 노인이 너를 걱정하는 이유를 백번 천번 깨닫겠다. 도둑이 도둑질 나쁜 것을 모르겠느냐?]
‘…….’
과연 그 말에 일리가 있어서, 백무량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에 심천검의 목소리가 더욱 심유해졌다.
[너도 알다시피 칠성교는 잡신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큰 힘을 얻을 수 있는 마교다. 유혹에 빠지기가 쉽지.]
‘그만큼 진 선배가 어리석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구나.]
백무량의 시선이 진자충에게 향했다.
어쩌다 보니 사람을 눈앞에 두고 험담하는 꼴이 되어, 적잖게 미안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상단전에 귀신이 있는 것을.
[이놈이 또 날 잡귀로 취급해……!]
백무량은 심천검의 말을 한쪽 귀로 흘리고는 진자충에게 웃음을 보였다.
“선배의 말이 옳습니다. 서둘러 화산파로 가지요.”
“…….”
“아, 낙매신검을 돕고 나면 무당파에 들러도 괜찮겠습니까?”
“그건 자네가 알아서 하게.”
“내려가면 송 노야께 말을 빌리든 합시다.”
“그게 좋겠군.”
백무량이 말을 붙이면, 진자충이 짧게 답하는 대화가 이어졌다.
그것이 하산할 때까지 이어지니 진자충은 내심 괴로웠다.
밤의 비무를 훔쳐보고 질투에 몸부림치던 새벽녘.
백무량의 배려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지금까지…….
“내가 이렇게 한심했던가.”
진자충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백무량은 그것을 들었음에도 모른 척했다.
가끔은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구는 것이 현명했다.
“한데 매화비원은 어떻게 되었답니까?”
“방법을 아직 찾고 있지만, 오랜 시간이 걸릴 걸세. 그곳을 관리하던 장로가 끙끙 앓고 있다더군.”
“과연…….”
사문의 오랜 성지가 황폐화된 지 어느덧 사 년째.
그동안 차도가 보이지 않았으니 사람의 마음이 곯을 만도 했다.
백무량의 기억에 하일화 장로는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만큼 마음이 절망에 쉽게 꺾일 것 같은 무인이었다.
“그나저나 다른 문파는 어떻습니까? 낙매신검처럼 주화입마에 빠진 고수가 있습니까?”
“아직 무림맹에서는 들은 바가 없네.”
“그 말인즉, 구파일방 내부에서 숨기고 있을 수도 있단 말입니까?”
“그야 그렇지. 아무래도 사문의 최고수가 중태에 빠진 일을 쉽게 밝힐 리가 없지 않은가! 화산파가 특이한 걸세.”
정확하게는 칠지검협의 성품이 너무나도 정직할 뿐이다.
당장 섬서성에 존재하는 도문.
종남파를 비롯한 중소 문파에서 화산파를 호시탐탐 지켜보고 있다는 소문이 흐르고 있다던가?
그 말을 들은 백무량의 표정이 자연스레 굳었다.
“종남파라면 목허 도장이 주도하고 있는 겁니까?”
진자충이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지. 원체 낙매신검을 질투하던 장로였으니 말일세.”
“……?”
“목허 도장은 낙매신검이 주화입마에 들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귀중한 영약을 보냈다네. 화산파를 압박하는 건 외려 장문인이지.”
“허.”
내심 목허 도장을 소인배라고 생각했었기에 백무량의 놀람이 컸다.
그와 동시에 분노도 잔불처럼 일어났다.
“마교가 언제 무림을 공격할지 모르는데, 낙매신검의 주화입마를 아쉬워하지 못할망정 그 자리를 노리다니.”
“무림이란 그러한 곳이 아니던가.”
진자충의 목소리에 공허함이 담겼다.
그의 신분이 무림맹의 청룡대주인 것을 생각하면 어울리지 않는 어조였다.
“언젠가 이 혼란이 끝나면, 장원을 꾸리고 싶네.”
“장원요?”
“그래, 무공이란 몰라도 되는 곳. 비단을 매만지면서 여생을 보내고 싶네.”
“그것참…… 좋은 목표군요.”
“그런가?”
평소 엄숙한 태도를 유지하던 진자충답지 않게 부끄러움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백무량도 자연히 끝을 떠올렸다.
‘언젠가 이 혼란이 끝난다면……이라.’
생각해 보지 않은 가정이었다. 백무량의 삶은 언제나 투쟁에 가까웠고, 평온이란 없었다.
정확하게는 백련교의 난 이후로 평화를 잃었다.
멸문을 당한 곤륜파의 기치를 다시 세우고, 마인과 싸웠다. 무림맹주와 직접 담판을 지어 구파일방의 명예를 되찾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잠깐의 휴식은 있었을지언정 편안하지는 않았다.
다가올 혼란, 마인의 습격에 몸을 잔뜩 웅크리며 긴장하고 살아왔다.
‘검을 놓으면 나는 무엇을 하며 지낼까?’
오직 무공만을 익힌 인생에 무슨 여생이 남아 있을까.
그 생각을 하니 목이 저절로 메었다.
“선배의 목표에 비해 저는 아직 생각해 둔 것이 없어서 민망하군요.”
“그래서는 안 되네. 아무리 무공이 중하다고 한들, 무색(無色)한 삶을 보내서는 안 될 일이지.”
가장 좋은 일은 가정(家庭)을 이루는 것이라며, 진자충이 눈웃음 지었다.
백무량으로선 다소 난감한 문제였다.
“저는 도사지 않습니까?”
“이보게, 마교를 물리친 영웅이라면 사사로운 규칙 따위는 어겨도 되는 법일세!”
“청룡대주나 되는 선배께서 사문의 법도를 어기라고 조언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 말에 진자충이 씩 웃었다.
퀭했던 눈빛이 어느새 평소처럼 짓궂은 시선으로 변해 있었다.
“자네, 생각해 보면 강호에서 곤륜의 법도를 제법 많이 어기지 않았던가?”
“그게 무슨 말씀인지요?”
“정말로 가슴에 손을 얹고 그런 일 없다 할 수 있겠나?”
“…….”
백무량은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사실, 장문인의 사조이기에 어느 정도 융통성을 발휘한 것이지, 세세하게 따지면 잦은 외유(外遊)조차 곤륜의 법도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그 모습을 찬찬히 지켜보던 진자충이 껄껄 웃었다.
“보게, 사소하다고 해도 조금씩 어기고 살지 않나?”
“제가 원래 대의를 중시하는 성격이라서…….”
“대의를 위해 소의를 어긴다? 허, 위험한 후배였군. 게다가 소의가 사문의 법도라.”
“됐습니다. 무림맹의 사람이 어찌 곤륜의 일에 간섭하십니까?”
“흘흘흘.”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두 남자는 산하객잔에 당도했다.
그곳에 의외의 인물이 기다리고 있어, 진자충이 깜짝 놀랐다.
“당신은…… 금모도왕이 아니오!”
금모도왕 남천.
태산검문의 무공을 이은 고수가 백무량을 마뜩잖은 눈으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