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의 (4)
칠 주야가 흘렀다.
사천당가에서 생각을 정리한 백무량은 곤륜산으로 향하는 여로에 있었다.
“누구는 닷새 동안 고생을 했는데…… 쉬다 오시니 좋으십니까?”
[하, 닷새가 지나도 존경은 여전히 없구나.]
이 하잘것없는 대화가 얼마나 그리웠던가.
백무량은 피식 웃고는 혁띠에 묶은 목함을 만지작거렸다.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던 영기.
보타문의 성지에서 얻었던 기운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이걸 그대로 취할지, 아니면 뛰어난 의원에게 맡겨서 가공을 해야 할지.
‘좋은 걸 쥐고 있어도 고민이 생기니…… 참.’
어떤 무인이라도 배부른 소리를 한다며 피를 토하겠지만, 백무량에게는 나름대로 큰 고민이었다.
한데 심천검에겐 그다지 탐탁지 않은 화제였다.
[가지고 있는 것부터 완전히 소화하고 다음 것을 취해야지, 쯧!]
‘선배께서 기거하시던 곳이라 그런 거 아닙니까?’
[뭐야?]
‘마인만 이길 수 있다면 뭐든 쓰라고 할 분이 영단 하나로 이러실 이유가 없잖습니까.’
[…….]
심천검은 침묵했다.
까놓고 말해 오랫동안 기거했던 영단이 사라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걸 백무량은 일찌감치 알아차리고 한쪽 입술을 씰룩였다.
‘아니, 뭐. 언제 이쪽으로 되돌아오실지도 모르고……?’
[……슬슬 산하객잔이 가깝구나.]
놀리는 것도 한두 번이면 좋으련만.
심천검은 본심을 숨긴 채 화제를 돌렸다.
“예, 간만에 송 노야의 얼굴이나 보지요.”
그렇게 말하는 백무량의 눈가가 둥글게 휘었다.
그 모습이 마치 모든 걸 알면서도 넘어가 준다는 것 같아 심천검은 내심 불안했다.
[허, 놈. 상인과 어울리더니 능구렁이가 다 되었구나. 내 누누이 말하지 않았더냐!]
‘저에게 천의(天意)가 있으니, 만물이 지켜보고 있음을 알라고요?’
닷새 동안 몇 번을 들었는지도 모를 말.
백무량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심천검이 길길이 날뛸 대답을 서슴없이 늘어놓았다.
‘천의가 대단하다고 하여 끌려 다니고 싶진 않습니다.’
한데 심천검의 반응이 다소 의외였다.
[그러더냐.]
‘평소에 곤륜도다운 선도(善道)를 행하라고 말씀하시던 분이 왜 그러십니까?’
[살다 보면 생각이 바뀌기도 하는 법이지.]
그 말을 끝으로 심천검이 침묵했다.
백무량으로선 의문이었다.
‘빛’과의 만남.
그 이후로 심천검은 종종 고민에 빠졌고, 백무량의 행실에 대해 트집을 잡는 일이 드물어졌다.
하지만 언젠가 답이 나온다면 진지하게 말해 주리라.
백무량은 심천검을 신뢰하고 있었기에 따져 묻지 않았다. 발걸음을 바삐 옮겨 산하객잔으로 향했다.
“송 노야, 안에 계십니까?”
“……얀!”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백무량은 귀를 기울였다.
“예?”
“고오얀!”
덜컹!
정문을 걷어차듯이 나온 송우현이 백무량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사천성에 조용히 다녀온다더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더냐?”
“다녀온다고 하였지 조용히란 말씀은 안 드렸던 것…….”
“당가를 제압하려거든 나에게 먼저 말을 하고 했어야지!”
“그게, 그 자리에서 바로 행동한 것인지라.”
그 말에 송우현이 씨익 웃었다. 손목을 움켜쥐던 힘도 조금씩 약해졌다.
백무량은 자연스럽게 의문을 품었다.
‘설마 나를 떠본 건가?’
“하하! 이놈, 언제는 고리타분한 소리만 해 대더니!”
송우현은 장성한 손자를 바라보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곤륜파를 제대로 키워 보려고 해도 다른 문파를 존중하란 소리를 해 댄 것이 바로 백무량과 현노윤이다.
그 둘의 반대가 있었기에 성장이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한데 이번 일로 모든 것이 그야말로 뻥 뚫려 버렸다!
“나에게 먼저 말하지 않고 행동한 건 아쉽지만, 이제부터 상로를 개척해도 늦지 않아! 당가가 상대라면 더더욱 통쾌하지.”
송우현의 입가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천당가가 어떤 곳이던가?
독물과 암기에 정통한 무가.
무공을 모르는 상인으로서 가장 두려운 곳이지만, 향신료라는 금싸라기 가득한 금광이었다.
“그들의 가주를 네 손으로 정할 수 있다면야, 간이고 쓸개고 다 내 주지 않겠느냐?”
“사천당가를 견제할 의도긴 했습니다만…….”
말만 들어 보면 노예처럼 부리겠단 소리나 다를 바 없지 않나.
백무량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송우현은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아, 그래. 아미파에서도 활약했다지? 어떻게 된 일이더냐?”
“그것이 어떻게 된 것이냐면…….”
천마신교로 예상되는 노야와 칠성교주와의 만남.
아미파에서 일어난 격전.
사천당가로 향한 연유.
그 모든 것을 들은 송우현은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오호라! 그래, 역시 우리 도사님께서 사천당가로 향한 이유가 있었구나.”
“이 일은 비밀로 해 주십시오.”
“내 비록 상인이라지만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 알아. 아미파가 그 꼴이 됐다고 하면 어중이떠중이부터 들이닥치겠지.”
송우현은 턱수염을 매만지며 백무량의 의중을 물었다.
“자기 사문에 먼저 돌아갔을 놈이 왜 여기 왔나 했더니…… 사천당가를 감시해 달란 소리더냐?”
“노야 혼자서 벅차다면 만금상단의 조력을 받으셔도 됩니다.”
“그거야, 그렇지. 나 혼자서 삼키려고 했다가는 독단도 함께 먹게 될 테니 말이야.”
아무리 상계에서 잔뼈가 굵은 송우현이라고 한들, 혼자서는 불가능.
만금상단.
정확하게는 조원양 휘하에 있는 고수들이 필요했다.
송우현은 호탕한 목소리로 자신감을 보였다.
“걱정하지 마라! 앞으로 반년이면 너한테 고개조차 들지 못하게 만들 터이니!”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제 일에 방해만 되지 않으면 되니까요.”
백무량의 얼굴에서 피어나는 부드러운 웃음.
송우현은 그 웃음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말하지 않는구나.”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전에도 느꼈지만, 마교와 왜 그리 부딪치냐는 말이다. 하물며 이번에는 네가 도착한 곳에 마인들이 쳐들어갔구나.”
예전부터 느꼈던 위화감.
그것은 백무량이 마인과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는 사실이었다.
송우현의 눈빛이 사뭇 진지해졌다.
“처음에는 다른 무림인처럼 천하제일고수 같은 걸 꿈꾸는 줄 알았다. 하지만 너와 내가 마주한 지가 이제는 칠 년이다. 말해 줄 때가 되지 않았더냐?”
“…….”
백무량의 침묵에 송우현의 목소리가 커지고, 복잡한 감정이 담겼다.
“은인이 남겨 준 인연이 바로 너다. 지난 칠 년 동안, 친손주보다 각별하게 여겼다고 생각하는데…… 아니었느냐?”
“송 노야.”
백무량은 서두를 떼고도 잠시 머뭇거렸다.
백련교의 난, 검해, 사형 주백천이 남긴 사실들…….
그 모든 것을 짧게 정리하는 건 불가능하거니와 엄밀히 말하면 송우현은 말려든 사람에 불과했다.
무공을 모르는 몸으로 얽히기엔 너무나도 무거운 이야기 아닌가.
백무량의 고민이 깊어지려는 찰나 송우현이 말을 덧붙였다.
“이미 곤륜파와 깊게 얽힌 몸이 아니냐?”
“…….”
그 말에 백무량은 고개를 들었다.
말해도 되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
그것이 단숨에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곤륜파의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아시는 걸로 압니다.”
백무량은 송우현이 어떤 과거를 가졌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사형, 주백천에 의해 새로운 길을 찾기 시작하였고 갖은 노력으로 상인으로서 성공한 과거.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은혜를 갚으러 온 현재.
이런 일에 끌어들여선 안 될 사람임을 알면서도 백무량은 송우현의 도움이 필요했다.
“마교에 의해 멸문당하거나 싸워서 이기거나. 곤륜파는 늘 마교와 싸우는 선봉에 서 왔지요.”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가 아니냐?”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어떻습니까?”
송우현의 눈에 격동이 일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기에 깜짝 놀란 듯했다.
“그, 무슨, 헛소리를 하려는 게냐?”
“곤륜파의 무공을 과거에 많이 견식했던 만큼 제 무공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알지만 묻지 않았지.”
사실 백무량만이 청운을 일으킨다고 하여 청운선자(靑雲仙子)라고 부르는 이가 적지 않았다.
백무량의 무학을 배우기 위해 오는 입문자 또한 많았다.
그 모든 의문에 대해서 백무량은 입을 열었다.
“하늘의 뜻에 의해 계승되는 것이 있고, 그것이 저한테 있습니다. 백련교의 난이 그 시발점이 되었지요.”
백무량은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굴레를 이번 대에서 부수고자 합니다.”
***
“허, 허허…….”
송우현은 백무량이 떠나고도 한참 동안 헛웃음을 흘렸다.
백무량의 비범함이 사실은 하늘이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니.
하물며 무림의 혼란함을 평정하기 위한 천의가 백무량에게 있다고 하였다.
‘확실히…… 웬만한 사람이 들었으면 미친 소리를 늘어놓는다 생각했겠지.’
백무량이 지금까지 줄곧 침묵한 이유가 그것이었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은인’과 아는 사이라는 의문이 풀어지지 않는다.
“그것까지 묻고 싶었지만…… 어찌 그런 짐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에게 따져 물을 수 있겠나.”
자신이 처음 은인을 언급하려고 하였을 때, 백무량의 표정은 씁쓸하고 어두웠다.
그것을 보니 차마 끝까지 물을 수 없었다.
수십 년 동안 그리워했던 자신보다도 더욱 힘겨워 보였다.
“겨우 약관인 놈이 저렇게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었으니…… 내가 은퇴하긴 아직 멀었구나.”
송우현은 빈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는 전서를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수신인은 조원양.
내용은 사천당가를 조기에 제압하고, 곤륜파를 강서 무림의 제일로 만들기 위한 작당 모의였다.
***
[차마 네가 구천검이라는 소리는 못하겠더냐?]
심천검의 장난 섞인 질문에 백무량은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들어도 거짓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송우현의 은인, 주백천은 사실 자신의 사형이다.
그 말을 하고 나면 많은 질문을 던질 터였다.
어디에 있느냐, 살아 있느냐, 빚을 대신 받아 줄 수 있겠냐는 등.
그 물음에 백무량은 떳떳할 수 없었다. 칠 년이 지나서도 사형의 행방을 찾지 못했기에 밝히기가 무서웠다.
‘무림맹과 대화가 끝나면 무당파로 가서 마지막 안배를 찾아볼 생각입니다.’
곤륜파를 습격했던 칠성교도들.
그 소식이 무림 전체에 퍼진다면 몸을 움츠리거나 더욱 왕성하게 움직일 터였다.
방침은 그 후에 정해도 되겠지만, 사형의 마지막 안배가 백무량에겐 무엇보다 더 중요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백무량이 등산로를 올랐을 때.
“자네, 참으로 오랜만이군!”
백무량은 고개를 들었다.
단 한 번의 만남이었지만, 의념으로 펼치는 절기가 인상적이었던 무인.
청룡대주 진자충이 두 손을 모아 포권을 했다.
“자네의 무용담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들었네!”
“하하…….”
“한데 지금은 그게 중요한 일이 아니야. 원래는 자네를 곤륜파에서 만나면 해 주려고 했네만…….”
좌우를 살핀 진자충이 백무량에게 전음을 보냈다.
[낙매신검께서 주화입마에 드셨는데, 자네에게 하나의 서찰을 남겼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