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의 (1)
마인들이 아미파를 기습하기 한 시진 전.
상처를 수습한 청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흥분했어.’
곤륜파와 얽힌 악연.
그것이 청노의 눈을 가리고, 침착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물며 백련교주와 마주치고도 살아남은 백무량에게 먼저 싸움을 걸다니.
“자네답지 않았어.”
청노는 고개를 돌렸다.
칠성교주, 괴성이 가면의 매무새를 정리하고 있었다.
“대의를 가슴에 품은 이상, 사소한 감정은 지웠어야지.”
괴성의 힐책에 청노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변명이 있다 한들 자신의 잘못이었다.
“미안하네.”
“이쪽은 삼존 전부를 잃었어.”
괴성은 낮은 목소리로 분노를 드러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그래도 천명을 이은 도사가 누구인지 알아냈으니 값진 죽음이라고 볼 수 있겠군.”
“……허.”
청노는 괴성의 비정함에 할 말을 잃었지만, 괴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뭐, 낙매신검도 그쯤이면 무인 노릇은 불가하지 않겠나. 강호의 전력을 줄여 놨다고 치지.”
“혼자서 모두 죽일 수 있다, 이건가?”
그 말에 괴성은 씨익 웃었다.
“내가 못 할 것 같나? 지금이라도 그놈을 쫓아가서 죽이랴?”
청노의 눈살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
사 년 전, 가면에 실금이 간 이후로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할 때가 잦았다.
‘언젠가는 자기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폭주하겠지.’
아주 먼 과거에 한 도사에게 치명상을 입었다던가.
강호 초유(初有).
기신지체를 타고난 칠성교주의 정신을 엉망으로 만들었으니 대단한 고수였을 터였다.
청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헛소리를 한 모양이군.”
“그래, 아무리 같은 뜻을 품었다지만, 경의를 보이게.”
괴성의 가면 아래에서 요사스러운 빛이 번뜩였다.
“나는 칠성교주, 자네는 교주의 진전을 제대로 잇지도 못한 팔푼이.”
“……명심하지.”
“흘흘.”
웃음소리를 흘린 괴성이 자리에서 떠났다.
홀로 남은 청노는 구름에 반쯤 가려진 달을 보았다.
천마신교의 교주가 죽던 날을 떠올리게 했다.
“그때가 아마…… 삼백여 년 전인가.”
참으로 오랜 시간이 흘렀다.
청노의 시선이 산기슭으로 향했다. 진즉 흙으로 돌아가야 했을 신체가 백무량에게 입은 상처로 삐거덕거리고 있었다.
괴성이 교주 이야기를 꺼내서일까?
나약한 몸이 산기슭에 얽힌 옛 기억을 망막에 새겼다.
청노 이전, 천마신교의 소동(小童)이라 불리던 시절.
황악산에서 수많은 고수가 한 남자를 둘러싸고 있었다.
“천하를 어지럽힌 마교의 수괴는 고개를 들라!”
소동은 나무 뒤에서 상처투성이인 교주를 훔쳐보았다.
두 무릎을 꿇은 채 무인들에게 핍박당하는 모습.
너무 억울하고 분하여 소동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저렇게 잡히실 분이 아니셨는데!’
무림의 권모술수에 당한 장로들에게 배신당하고, 하독을 당했다.
천마신교가 내부에서부터 무너질 만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교주님은 웃으며 홀로 무림맹으로 향하셨다.
-유업(遺業)은 너희에게 맡기고 가노라.
결과야 뻔했다.
“고개를 들라고 하지 않았더냐!”
공동파의 고수가 교주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살이 뜯겨 나가는 고통이 엄습했을지언정 교주는 불굴했다.
“…….”
신음 하나 흘리지 않았다. 고개를 든 교주는 좌중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누구 하나 빼놓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듯.
그 시선을 마주한 검객이 교주에게 손을 휘둘렀다.
“어딜 쳐다보느냐!”
쩌억!
교주의 뺨이 찢어지고 광대뼈가 주저앉았다. 상처에서 흐른 피만 담아도 한 됫박은 될 듯했다.
순간 뛰쳐나갈 뻔할 것을, 소동은 인내했다. 여기서 헛되이 목숨을 날리는 것보단 교주가 남긴 유업이 중요했다.
그때 교주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
두 시선이 마주쳤다.
소동은 깜짝 놀랐지만, 교주는 그렇지 않았다. 소동을 가만히 보다가 엷게 웃었다.
무인들에게 보이지 않게끔, 은밀한 미소로.
그 미소는 소동에게 교주의 마지막 표정으로 남았다.
“그놈을 일으켜라!”
무인이 교주의 몸을 억지로 붙잡았다.
소동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열기로 붉게 달아오른 만년한철의 불상이 교주의 등 뒤에 있었다.
“마교의 수괴는 철불을 등에 업어라!”
‘아, 안 돼. 저런 건…….’
인간의 용력이 대단하다고 한들 어찌 달아오른 철불을 짊어지겠는가?
끔찍한 상상이 소동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교주가 내지르는 비명이 벌써 들려오는 듯했다. 잠시 멈추었던 눈물이 또다시 맺혔다.
그럼에도 교주는 지사불굴(至死不屈)하니.
“끄으으…….”
철불이 걸쳐 입은 법의가 교주의 피부에 새겨졌다. 살이 익는 연기가 피고, 지독한 냄새가 풍겼다.
소동은 피가 나도록 주먹을 쥐었다.
교주가 철불을 내팽개치고 도망치기를 바랐다.
그러나 교주는 소동에게 등을 보인 채 걸었다.
소동에게 찡그린 표정을 드러내지 않아 다행이란 찰나의 생각, 등에서 느껴지는 억겁의 고통.
“하아.”
한숨을 내쉰 교주가 산기슭을 따라 걸었다.
소동은 그의 뒤를 은밀하게 따라갔다.
걸음이 느려지면 쇠꼬챙이가 교주의 피부를 찔렀고, 시간이 흐를수록 주변의 함성이 커졌다.
“당장 죽여라!”
“목을 매달아서 본을 보이시오!”
갖은 저주와 살의가 교주에게 향했지만, 교주는 말을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산기슭을 오르는 것만이 목적인 사람처럼 망연히 걸었다.
그렇게 끝내 정상에 올랐을 때.
“수괴야, 후회하는 마음은 없느냐? 모두가 너에게 가족을 잃은 양민이고, 무인이었다.”
“아쉽소.”
“……?”
“이렇게 잡히지 않았다면 저렇게 말하는 놈들의 혀를 다 뽑아 버렸을 터인데.”
교주의 표정은 소동에게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조와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려왔다.
소동은 교주의 등을 지켜보았다. 만년한철의 불상에 의해 짓이기고, 뭉개졌지만 광활한 평야처럼 보였다.
“과연, 마교의 수괴로다.”
교주를 흉물 보듯 쳐다본 고수가 검을 드니.
소동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저대로 죽게 둘 순 없어.’
망설임을 지운 소동이 모습을 드러내려던 그때.
텁.
어깨를 붙잡는 기척.
소동의 고개가 옆으로 돌았다.
심천(心天)이라 쓰인 도복이 인상적인 도사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천마신교의 종복이더냐?”
“종이 아니라, 교인이오.”
“……이렇게 어린아이마저 삿된 교리에 물들었단 말인가.”
도사가 잠시 고민하는 모습에 소동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아, 여기서 죽겠구나.’
소동은 도사의 정체를 알았다.
칠성교주와 싸우고도 살아남은 고수 중 일인이며, 천하제일검수.
심천검 주종명.
그에게 붙잡힌 이상 도망칠 수 없다. 교주가 맡긴 유업을 잇지 못하고, 여기서 죽게 될 것이다.
소동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훌쩍였다.
그 모습을 본 심천검의 표정이 묘해졌다.
“죽는 것이 슬프더냐? 죽음이 곧 새로운 시작이요, 천마에게 귀의한다는 것이 너희들의 교리가 아니더냐?”
“나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소동의 눈이 의지로 가득했다.
이에 심천검이 뜻 모를 한숨을 내쉬면서.
“가라. 두 번은 말하지 않겠다.”
“…….”
소동은 조금씩 뒷걸음치며 심천검과 거리를 벌렸다.
적에게 목숨을 적선받았기에 느끼는 굴욕과 한심함, 자괴감.
아주 미약한 안도감.
그 감정은 삼백 년 동안이나 고이고 고여.
소동이 청노가 되는 날까지 기억에 남았다.
곤륜파의 도사를 볼 때마다 심천검의 뜻 모를 한숨 소리가 떠올랐다.
“대업을 앞두고 이런 과거에 사로잡혀선 안 될 일이지.”
청노는 백무량에게 느낀 위화감을 떠올렸다.
묘하게 심천검을 떠올리게 하는 초식과 내공 운용이라.
“한 시진 뒤, 백무량을 먼저 제거하고 아미파를 멸문시켜라.”
그 한마디에 마인들이 고개를 들었다.
***
백무량은 달빛 아래서 마인들을 내려다보았다. 옛일을 떠올리게 하는 광경에 아랫입술을 씹었다.
이제는 지긋지긋하기까지 한 칠십여 년 전.
옛 광경을 떠올리면서, 백무량은 검을 꽉 쥐었다.
“용인하지 않겠다.”
그 한마디에 좌중의 이목이 쏠렸다.
백무량은 그들과 시선을 마주하며 하나둘씩 반추했다.
정혜 신니에겐 주자령을, 마인에게는 백련교를, 어린 제자들에겐 미숙했던 자신을 대입하며.
‘아직 그걸 마음에 담고 있단 말이냐.’
정말이지, 미련하기까지 하다니.
백무량은 끅끅 웃었다.
잊겠다, 버리겠다, 예전과는 다르다. 칠 년 동안 많은 상념을 품고 의지를 다졌지만, 여전히 과거에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이 있었다.
‘내가 칠성교주에게 먼저 당하지 않았다면.’
심천검이 무리해 가며 싸우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아니, 그 이전에 아미파의 속가제자인 화은열을 챙겨 갔으면 어땠을까.
번민이 머릿속에서 배배 꼬였다. 분노가 들불처럼 끓어올라 온몸을 태울 것 같았다.
마침, 그 감정을 토해 낼 상대가 눈앞에 잔뜩 있었다.
스르릉!
백무량은 검을 뽑으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선배, 계시오?”
이제는 완전히 흩어져 버리기라도 한 걸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백무량의 인상이 찡그러졌다가, 금세 풀렸다. 그런다고 돌아오지 않을뿐더러 심천검이 원하는 결과도 아니었다.
“후우…….”
백무량은 태청신공을 운용했다.
끓어오르던 분노가 차가운 얼음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해졌다.
상승의 심법이 가진 공능이 지금은 원망스러웠다.
“가만히 기다릴 테냐?”
백무량의 물음에 마인들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분연히 떨치는 기세에 담긴 멸마의 기운이 있었다.
이에 한 마인이 이를 악물며 외쳤다.
“네놈은 누구냐!”
“…….”
백무량은 말없이 허공에서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신법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자유롭다. 운중용형보의 허류식이 극에 이르면서 생긴 조화였다.
두 발이 완전히 대지에 맞닿고 나서야, 백무량은 대답했다.
“너희가 찾던 곤륜신성이 바로 나다.”
“……!”
그 말에 마인들의 신색이 붉게 물드니, 백무량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천당가의 지하에서 봤던 형상인데, 철혈공이던가?”
마인 몇 놈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것으로 심증은 확신으로 변했다.
사 년 전, 사천당가의 지하에서 마주했던 마인.
석두라 불렸던 놈처럼 마인들의 눈에 시뻘건 광망이 흘렀다. 혼탁하고 요사스러운 기운에 정혜 신니의 몸이 비틀거렸다.
하지만 백무량은 달랐다.
“그깟 마공 따위.”
숨을 고르는 것만으로 대주천을 행할 정도의 완성도.
태청신공의 공력이 마기를 단숨에 밀어 냈다. 메마르던 대지와 초목이 제 색을 찾았다.
그와 동시에 백무량의 검이 위에서 아래로 휘둘러졌다.
꽈광!
분광뇌운결에서 발해진 뇌기가 청운에 뒤섞여 경파를 이룬다. 허공을 격한 경파는 마기를 품은 적을 향해 쇄도했다.
‘예전이었다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겠지만.’
심천검과의 대화로 상단전의 개화를 이루었으니.
그 결과는 비약적인 발전이라는 표현으로도 모자랐다.
“……!”
눈 깜짝할 사이에 마인 서넛이 재가 되어 스러졌다.
백무량은 무감정한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누가 보냈는지 말할 기회를 주겠다. 셋을 셀 동안 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