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162화 (162/275)

반석 (5)

“개의치 마라. 칠성교주와의 싸움에서 잃었을 뿐이니.”

심천검은 한쪽 팔로 목숨을 구했으면 괜찮은 거래가 아니냐며 별것 아닌 듯 가볍게 말했다.

그리고 백무량의 걱정 어린 표정과 자신에게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한 모습에 피식 웃었다.

“선배 취급은커녕 곤륜파 무공을 제대로 아냐고 따지던 놈은 어디로 간 게야?”

백무량은 평소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서, 선배 팔이…….”

“그게 무슨 대수더냐?”

심천검의 눈가가 좁혀졌다. 웃음이 싹 사라지고, 차가운 냉기가 눈동자에 서렸다.

“언젠가는 너 혼자서 그들과 대적할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때도 나를 찾을 셈이더냐? 나를 넘어서겠다고, 평소에 주절거리지 않았더냐?”

“……저와 싸우다가 사라지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그런 정신머리라면 한쪽 팔로도 충분하다.”

백무량은 심천검을 보았다. 두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곤륜파라는 무류(武流), 마교와 대적할 운명, 검해를 이은 도사.

두 고수는 닮은 점이 너무나도 많았다.

하물며 그들의 마주친 시선.

그 안에 담긴 심상의 격렬한 부딪침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암요, 그러시겠지요.”

백무량은 무딘 말로 슬픔과 자조를 숨겼다.

심천검이 무엇을 말하려는가.

그딴 것쯤은 그가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그것은 심천검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가 희생하는 것처럼 보이더냐? 천만에! 너는 곤륜파의 역사, 검해에 담긴 세월을 짊어진 도사다! 사문의 염원을 돕는 게 어찌 희생이겠느냐!”

심천검은 한 팔을 펼쳤다.

검해의 심상 속, 또 다른 심상이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심천검 뒤에 수십의 도사들이 영웅건을 꽉 조여 맸다.

“나와 함께 하였던 동도에게 희생이라 말할 수 있겠느냐?”

“…….”

백무량의 시선이 심천검이 일으킨 심상으로 향했다.

도사들의 체구와 인상이 제각기 다르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심천검은 그들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죽음과 내가 끝내지 못한 업을 기억한다. 그래, 내가 너를 돕는 이유가 그것이다.”

“…….”

백무량은 계속해서 침묵했다.

심천검의 얼굴에 복잡한 미소가 피었다.

“실망하였느냐?”

“그러기에는 선배나 나나, 서로 잘 알잖습니까.”

“…….”

심천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기만 섞인 말, 상대를 도발하려는 행동, 끝내 설득까지.

백무량은 어느 하나 속지 않았다. 심천검이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투박하게 대답했다.

“후배 백무량이 선배, 팔대 장문인 심천검에게 가르침을 청합니다.”

“……오냐.”

퉁명한 어조로 말하는 심천검의 목소리가 쩍쩍 메말랐다.

그것이 마지막 대화였다.

닮은 점 많은 두 도사가 검해의 심상, 바다 위에서 검을 뽑았다. 눈빛이 교차하는 것과 움직임 모두 한 호흡 내에서 이루어졌다.

촤악!

백무량은 오른발로 수면을 내리찍었다. 검해의 파도가 위로 치솟으며 심천검의 시야를 가렸다.

‘찰나의 시간밖에 벌지 못하는 얄팍한 수.’

상승의 검객은 눈에 의지하지 않는다. 상대의 호흡과 걸음 소리만으로 움직임을 알아차린다.

하물며 그것이 곤륜의 무맥을 이은 심천검이라면.

‘태청신공을 운용해 더욱더 예민해진 오감으로 알아차리겠지.’

백무량은 어렵지 않게 심천검의 생각을 예측했다. 같은 무류를 이은 검사이기에 손쉬웠다.

다만, 그 생각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콰아아!

허공을 격하여 파도를 베고 백무량의 눈앞까지 치닫는 검기.

살기가 듬뿍 담긴 일검이 미간을 쪼갤 듯했다.

그 너머에서 심천검은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

“하하!”

어디 한번 받아보라는 듯이.

백무량은 한쪽 뺨을 씰룩였다. 말로 하는 도발이 아니라, 검이라면 늘 환영해 왔던 자신이었다.

심천검이라고 하여 다를 것은 없다.

백무량의 어깨가 크게 반원을 그렸다. 먼저 휘둘러진 검기에 백선신검이 부딪쳤다.

카가강!

검기에 담긴 경력이 가공할 정도다. 백무량은 자연스레 인상을 찌푸렸다.

“까짓.”

작게 중얼거리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며 숨을 내뱉었다.

검기와 백선신검이 부딪치며 일었던 불똥이 청운에 삼켜졌다.

그걸 본 심천검의 입가가 가늘게 열렸다.

“청운에 의존하는 버릇을 내가 직접 고쳐 주마.”

심천검의 검이 팔(八)자를 그렸다. 공력의 운용과 출수는 한순간에 이루어졌다.

그야말로 간합.

짧게 휘둘러 친 일격에 청운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심천검은 그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무심한 듯해도 동요가 담긴 백무량의 눈과 마주했다.

“자, 네 청운을 뚫고서 지척까지 왔노라.”

“…….”

백무량은 대답하는 대신 호흡을 골랐다.

단 한 순간일지라도 지극하게.

폐부를 가득 채운 공기는 전신을 순환한다. 태청신공의 맑은 기운이 십이정경을 거쳐 세맥으로 흐른다.

일가가 아닌, 수백 년의 무맥을 유지할 경지.

그곳을 향해 백무량이 한 계단 올라섰다.

“검을 나누는 도중에 대주천을 행한다……?”

태청신공을 창시한 선대조차 저만하진 않았을 터인데!

심천검은 백무량의 발전에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지만 봐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 초식은 나의 독문무공, 분뢰추섬이니라.”

여유로운 목소리와 상반되는 살초.

지척에서 펼쳐지는 분뢰추섬은 그 이름대로 섬광과 같았다. 분광뇌운결로 이루어진 검격은 망막에 새겨지기도 전에 피부를 벨 듯했다.

그때, 백무량이 움직였다.

“후우.”

숨을 내뱉으면서 내지르는 일검.

균천관일에 공동파 특유의 경파가 일었다. 가공할 경력이 길을 만들고, 돌풍을 일으켰다.

촤아아…….

평정을 유지하던 검해의 수면에 큰 파문이 일더니, 분뢰추섬의 섬광이 찢어졌다.

심천검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맺혔다.

“놈.”

심천검은 한발을 뒤로 물러서고는 축으로 삼았다.

그것만으로 검해의 수면이 크게 흔들렸다. 일종의 전조였다.

‘운룡비뢰장……!’

지금도 곤륜 최고의 장법이라고 불리는데, 심천검이 펼친다면 어떠할까.

호기심을 느낀 백무량은 좌수에 공력을 집중시켰다.

현천신장을 가미한 운룡비뢰장.

공력의 흐름을 본 심천검이 한쪽 눈살을 찌푸렸다.

“남의 무학을 또 섞느냐?”

“배울 것이 있다면, 주저하지 않는 편이지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무량은 운룡비뢰장을 심천검에게 내질렀다.

심천검 또한 마찬가지였다.

꽈과광!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두 운룡비뢰장이 부딪치니 큰 파공음이 일었다.

그사이에 백무량이 심천검에게 달려들었다. 연이어지는 초식과 초식의 대결.

승부는 쉽사리 나지 않았다.

‘너무 서로를 잘 알아.’

호흡과 초식, 모두가 곤륜의 것이기에 예측할 수 있었다.

간합의 승리마저도 다섯 수는 먼저 봐야 했다. 상단전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선배께서 상단전을 단련시켜 주신 셈인가?’

문득 든 생각에 백무량은 헛웃음을 머금었다.

그토록 시끄러웠던 심천검의 외침이 상단전을 단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앞을 보는 예지를 남발해도 큰 무리가 없었다.

그렇게 일백여 초.

백무량은 심천검과의 차이를 깨달았다.

‘선배는 일자를 호방하고 기개 있게 긋지만, 나는 많은 것을 담고자 하니…….’

곤륜의 무도 아래 완전히 다른 방향성을 지닌 셈이다.

심천검은 곤륜의 무학 외엔 모든 것을 버렸기에 공(空).

그에 비해 자신은 곤륜의 무학 아래에 모든 것을 담기에 무한.

그 차이를 깨달으니 심천검의 초식을 받아넘기는 것이 수월해졌다.

“이제야 깨달았느냐?”

심천검이 부드러운 미소로 백무량의 상승을 반겼다.

하지만 백무량은 웃을 수 없었다.

앙상하던 심천검의 한쪽 팔이 이제는 나뭇가지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다른 곳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마치 몸이 닳아져서 검해의 수면에 조금씩 흡수되는 듯했다.

백무량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이제 그만…….”

“적에게도 그딴 말을 할 생각이더냐? 그러고도 검해를 이은 도사가 맞더냐!”

독기 어린 말을 쏟아 낸 심천검은 공력의 양을 늘렸다.

백무량의 수준이 올라간 만큼 조금씩 맞춰서 싸워 줄 생각이었다.

“후배 백무량은 화우검을 받을 준비를 하라.”

심천검의 공력이 한데 모여 천중(千重)을 이뤘다.

발걸음은 또 어떠한가?

운룡대팔식의 반보가 검해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심상 전체가 뒤흔들리는 감각에 백무량의 정신이 어지러웠다.

운룡비뢰장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전조.

백무량은 심천검이 펼칠 초식을 알아차렸다.

‘구천화우검의 팔초, 변천승운.’

운룡대팔식에서 연계되는 일초.

필살에 가까운 초식이 겨눠졌음에도 백무량의 표정은 의연했다.

“하면 선배도 받을 준비를 하시오.”

“……?”

“검해의 새 물결을.”

그 말에 심천검은 기껍다는 웃음을 보였다.

사실 백무량에게 새 무학에 대한 단초를 듣고서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공을 추구하기에 역설적으로 무한을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그 해답을 찾지 못할 만큼 백무량은 둔하거나 약하지 않다.

‘단지 기회와 시간이 필요했을 뿐.’

가르침은 이번 기회로 충분히 전했다.

이제는 부딪칠 순간만이 남았다.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을 밀어낼 수 있을지, 한번 보자꾸나!”

백무량은 씩 웃으며 검을 쥐었다.

그와 동시에 경파와 화검의 무학이 분광뇌운결에 스며들고, 금문의 가르침은 온전히 검에 녹였으니.

쩌엉!

심천검과 검을 부딪치는 순간에 백무량은 염원했다.

‘나에게 하늘의 뜻이 있다면, 그 안배가 있다면 부디.’

그 염원에 운룡의 문양이 선기를 토해 냈다.

뒤이어 그 선기는…….

***

“감히 아미산에 더러운 발을 들이밀다니!”

정혜 신니는 정문을 부순 마인들을 향해 검을 겨눴다.

하지만 칼끝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나 같이 제정신이 아닌 듯 흔들리는 눈동자.

머리에 남겨진 상처 자국이 매우 깊어 죽었다 살아난 것처럼 보였다.

하물며 그들의 마기는 어떠한가!

어려진 정혜 신니로서는 감히 상대가 불가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아미파는…….’

완전히 멸문하는 꼴이나 마찬가지.

정혜 신니가 의지를 다지는 사이, 마인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곤륜신성은 어디에 있느냐?”

“……!”

“그가 어디 있는지 실토한다면, 아미파는 건드리지 않겠다. 약속하지.”

마인의 제안에 정혜 신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곧바로 거절했겠지만, 유약해진 지금은 달콤하게만 들렸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만 말하면…… 되는 거잖아.’

그렇게 되면 아미파는 마인들에게 공격받지 않아도 된다. 백무량이라면 저들을 쓰러트리고도 남을 것이다.

한순간에 여러 가지 변명이 떠올랐다.

그만큼 제자들의 안위가 정혜 신니에게는 제일 중요했다.

‘하지만…….’

정혜 신니의 눈이 질끈 감겼다.

백무량이 처음 이곳에 찾아오고서 나눈 대화, 사 년의 기다림…….

그는 아미파의 약점을 알고도 묵인했다. 옛 무공을 우연히 주웠음에도 은닉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빚을 진 것이 아니던가.

정혜 신니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말할 수 없다!”

“하면 아미의 미래를 부수는 수밖에.”

마인의 시선이 덜덜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향했다.

바로 그때.

“용인하지 않겠다.”

한 도사가 건물 위에서 달을 등지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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