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석 (4)
스륵, 콰아아…….
책장을 넘기는 소리에 폭포수 튀는 소음이 뒤섞였다.
폭포수 주변엔 고즈넉한 암자가 있었다.
“이건 이렇게…….”
[그게 아니라, 이런 식으로 해야…….]
백무량과 심천검의 대화 소리가 소음에 파묻혔다.
초야의 두 선비가 글월로 대화를 나누듯.
두 도사는 아미복호검의 구결을 해석하고 자기 식으로 바꾸는 데 혈안이었다.
[갈! 곤륜의 무학을 네가 나보다 더 잘 알더냐?]
“검을 휘두르는 건 접니다, 선배.”
때때로 심통이 나서 침묵이 흐르기도 했지만.
“하면 이런 식으로 선배의 해석을 덧붙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으음.]
침묵은 찰나에 불과했다.
더 높은 경지에 이르고 싶다. 그 염원을 함께 품은 이상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릴 이유가 없었다.
백무량은 서고에서 챙겨 온 비급들을 훑었다.
소첨검과 일자수미검이 팔첨의 검로라면, 수경연보와 아미복호장은 수경의 요체.
그것을 완전히 이해할 때쯤 백무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비급만 보려니 몸이 뻐근하지 않습니까?”
[그래, 한번은 펼쳐 봐야지.]
심천검은 껄껄 웃으며 백무량의 등을 떠밀었다.
사실 궁금했다. 청운에 아미복호검의 초식, 수경과 팔첨이 깃든다면 어떤 움직임이 펼쳐질지.
그것이 곤륜의 무학과 비교해 뛰어난 점이 있을 것인지.
쏴아아…….
폭포수가 수면에 부딪혀 물보라를 흩뿌렸다.
백무량은 그것을 가만히 보다가 공력을 운용했다. 태청신공을 곧 청운으로 유형화하여 물보라를 향해 쇄도했다.
“후우.”
들이쉰 호흡이 폐부에 한가득 들어차니 백무량의 눈동자가 시퍼렇게 일변했다.
태청신공의 단계가 대성에 이르렀다는 방증이니.
그 힘을 머금은 청운이 물보라 사이로 파고들었다. 자소단 다섯 개를 온전히 녹여 낸 공력이 폭포수마저 쪼갤 듯했다.
그다음 순간, 심천검의 감탄성이 상단전을 울렸다.
[오호, 참으로…….]
대단하다, 그 뒷말이 거대한 소음에 묻혔다.
콰르르르!
공력을 머금은 청운이 수면과 폭포수 사이에서 평정을 유지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짐에도 물보라는커녕 폭포수가 옆으로 흐르기만 했다.
극도에 가까운 의념과 하단전을 가득 채우고도 응축된 공력.
두 힘의 조화가 그것을 가능케 한다.
백무량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에 청운이 크게 꿈틀거렸다.
수경(水經).
물이 흐르는 길, 법식과 도리, 경계.
아리송한 이름의 초식이지만, 백무량은 성화교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에 아미복호검을 보고서 이해했다.
‘성화를 흘리는 검.’
물은 불과 뒤섞이지 않는다. 자연의 당연한 이치를, 아미파는 검으로써 다스렸다.
비급 속 거인의 공격을 흘리는 아미의 여승처럼.
촤아악!
공력을 한껏 머금은 청운이 양옆으로 늘어났다. 종국에는 폭포 전체를 떠안는 꼴이 되었다.
백무량의 주먹이 덜덜 떨렸다. 소림의 신권을 온몸으로 얻어맞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흐름을 읽고 관조해라. 힘을 받아 내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흘려내어야 한다.]
심천검의 조언이 귓가를 간질이니 덜덜 떨리던 주먹이 멈췄다.
흔들리던 의념이 더욱 강건해지니, 공력이 자연스레 뒤따라온다. 굳어 있던 백무량의 표정이 금세 평온해졌다.
주르르륵…….
물보라 없는 폭포.
소음이라고는 조금씩 흐르는 물줄기만이 있을 뿐.
갑자기 찾아온 고요에 풀벌레가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이것이 수경의 무학을 담은 청운이라.”
백무량은 청운에 의해 연못처럼 변해 버린 폭포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가히 천 근의 무게로 여겨지는 폭포.
그것을 정면으로 받아 내고도 옆으로 흘려내는 모습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웅심을 자극했다.
백무량의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그것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심천검이 수경의 변화를 논했다.
[역으로 행해 보아라.]
“감상에 취할 시간이라도 주시지.”
백무량은 장난 섞인 불만을 중얼거리며 주먹을 폈다.
그와 동시에 폭포수를 받아 내던 청운이 공력을 머금고 딱딱하게 일변했다.
그렇게 청운에 고여 있던 폭포수가 별안간 위로 솟구치니.
쩌적, 쿠콰콰!
커다란 굉음이 사방팔방에서 터졌다. 백무량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역시나.’
힘을 흘리는 초식은 방향에 따라 받아치는 초식이 되기 마련.
백무량의 해석은 가히 완벽에 가까웠다.
그것이 검해를 이었기에 생긴 오성이라고 한들, 괜찮았다. 칠성교주나 백련교주와 싸울 수 있는 경지에 이른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백무량은 폭포 안쪽에 드러난 절벽을 보고 다음 초식 명을 읊조렸다.
“팔첨.”
아미복호검의 살초, 성화를 제압하는 여덟 개의 섬광.
그 이름에 맞게 청운은 백무량의 의지에 따라 분화했다. 단숨에 절벽을 찢어발길 듯 흉흉한 살기가 주변을 짓눌렀다.
하지만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백무량은 공동파의 선배, 고성진이 펼쳤던 대주천복마검을 떠올렸다.
‘수없이 많은 검로가 담긴 경파(鯨波).’
고성진의 검로를 떠올렸다.
하나의 실선 안에 담긴 무공의 실타래를 이해하던 그 순간.
[……음! 팔첨에 경파를 담으려는 게냐!]
심천검이 침음성을 흘렸다.
하지만 들리지 않았다. 극도의 집중이 청운에 쏠려 있었다.
‘누구도 막지 못할 일격이 될 거야.’
여덟 개의 섬광에 수많은 변화를 가미할 수 있다.
하물며 그것이 검이 아니라 청운이라면 막을 수 있는 존재는 극소수일 터.
주르륵.
백무량의 입가에서 핏물이 흘렀다. 대부분의 공력을 청운에 쏟은 상황에서 서로 다른 무학을 융화시키는 셈이니, 내상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심천검은 말리지 않았다.
[검으로 무한을 담으려 하는 너라면, 가능할 것이다.]
어쩌면 백무량이라면 무게가 다른 추로 균형을 맞출지도 모른다.
그 까닭 없는 신뢰가 백무량에게 전해졌다. 백무량의 입가가 둥근 호선을 그렸다.
“……하.”
호흡이 끝에 달하여 백무량이 숨을 내뱉은 순간.
꽈광! 쩌저적!
균천관일, 창천명월, 일섬운월과 검뢰벽천 등…….
곤륜파의 무공이 담긴 여덟 섬광이 절벽을 난도질했다.
아미복호검에 적힌 팔첨과 비슷하되, 아예 달랐다.
공동파의 무학과 일체화한 팔첨은 더욱더 흉흉한 살기를 발했다.
이에 심천검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검이 아니라 청운으로 펼치기에 가능한 초식이로구나.]
“선배라면 알아볼 줄 알았습니다.”
백무량은 팔첨에 의해 무너지는 돌덩이를 바라보며 밝게 웃었다.
“찌르기, 베기, 하물며 분광뇌운결 같은 뇌기까지…… 여덟 개의 초식이 동시에 쇄도한다면 막을 놈은 없을 겁니다.”
[흘흘, 네가 나와 비견될 정도의 초식을 펼치게 될 줄이야.]
“이 정도는 되어야 검해를 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가볍게 이죽거리던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팔첨으로 인해 무너지던 절벽 안쪽.
그곳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미파의 옛 고수가 남긴 흔적이 아니겠느냐?]
심천검은 넌지시 정혜신니를 불러올 것을 권했다.
하지만 백무량의 뜻은 우직했다.
“제가 먼저 가서 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뭐라?]
“현재 아미파의 장문인께선 무공을 잃고 어려지셨습니다. 무슨 위험이 있는지 봐야겠지요.”
명분 하나는 기가 막혔다.
심천검은 혀를 내두르며 백무량의 걸음을 구경했다.
또옥, 똑.
천장에서 새는 물방울이 땅을 두드렸다.
백무량은 그것을 손가락으로 찍어서 혀에 가져갔다. 달콤한 맛이 났다.
“아주 미약하지만, 선기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안쪽으로 더 가 봐야겠구나.]
심천검의 목소리에 호기심이 일었다.
어쩌면 이곳이 아미파의 성지일지도 모른단 생각에 백무량의 발걸음도 분주해졌다.
그 끝에 뜻밖의 광경이 있었다.
“…….”
백무량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복잡한 표정으로 바닥에 새겨진 별호와 이름을 확인했다.
-천무검성 유성백
백련교주와 싸우다가 행방이 묘연해진 고수.
한때 강호십대고수보다 높은 경지에 있었다 일컬어지는 그가 아미파의 절벽 안쪽에서 죽어 있었다.
“시신을 수습하여 성한이에게 보여 주는 것이 옳겠지.”
어린아이라고는 하나 유씨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였다. 땅에 묻건 태우건 유성한의 뜻이 중요했다.
백무량은 백골이 된 유성백을 보다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한쪽 벽면에 그가 남긴 유서가 있었다.
-백련교주.
그 괴력난신과 겨루지 말라. 인세의 무공으로는 다툴 수 없다. 명심하라, 피하는 것이야말로 사는 방법이다.
“이게 무슨!”
백무량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칠십여 년 전, 유성백은 이러한 자가 아니었다.
구파일방의 장문인 앞에서도 욕설을 서슴없이 내뱉었으며 일신의 무공에 자부심이 넘치는 고수였다.
심지어 자신의 스승이었던 주자령마저 아래로 치곤 했다.
그런 유성백이 저런 유서를 남기다니!
“심지어 피로…… 아주 급하게 썼단 말인가?”
시신이 여기 있다는 건 백련교주와 싸우고 서둘러 도망쳐 왔다는 뜻이다.
그러고도 공포에 질려서 저런 유서를 남겼다.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는 놈이더냐?]
“소문으로 듣기만 했지만, 저런 유서를 남길 고수가 아니었습니다.”
[기이하구나. 칠성교주와는 달리 백련교주는 순수하게 마공만을 다루지 않았더냐?]
“……가볍게 생각할 건 아닌 것 같군요.”
백무량은 턱을 매만졌다.
확실히 백련교주의 강함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상처 하나 없이 주자령을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전력을 다했던 검해의 일초에도 상처 하나가 전부였다.
‘역시 화산파에서 끝을 봤어야 했는데.’
후일, 백련교주가 만전의 상태일 때 싸우게 된다면 어떨까?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동시에 의문이 들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그때 나에게 큰 상처를 입지 않았던가?’
화산파엔 낙매신검 말고도 훌륭한 고수가 많았다.
그들의 포위를 뚫고 탈출할 힘이 있었다면, 그날 백무량 자신이 죽었어야 했다.
“어쩌면 백련교주에게 제가 모르는 비밀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저…… 예감입니다.”
그 말에 심천검은 진지하게 반응했다.
[검해를 이은 도사의 예감은 쉬이 넘기면 안 되는 법이지. 나도 그랬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하면……?”
[일단은 시신을 수습하고, 반석이 제대로 세워졌는지 확인해야지.]
백무량의 눈에 이채가 일었다.
“심상에서 겨루어 보잔 말입니까?”
[그래.]
심천검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네가 이번에 배운 수경과 팔첨. 그것이 경파 말고도 다른 무학과 잘 뒤섞이는지 직접 시험해 주마.]
그 말에 백무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다경 뒤.
유성백의 시신을 수습한 백무량은 암자에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심상 깊숙이 자리한 검해의 형상이 상단전에 떠올랐다.
“허어.”
백무량은 검해의 파도를 보고 감탄사를 흘렸다.
다소 놀랍기도 했다.
습득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수경과 팔첨의 초식이 파도에 넘실거렸다.
만족스러운 광경이었다. 자신이 곤륜파의 무학에 잘 녹였다는 것을 검해가 인정해 준 셈이니까.
“구경은 그쯤 하지 그러느냐?”
옆에서 들려온 소리에 백무량의 고개가 돌아갔다.
뒤이어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선배……!”
심천검의 한쪽 팔이 가죽만 남은 채 앙상하게 변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