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석 (3)
잠시 후.
“이곳입니다.”
정혜 신니가 서고의 문고리에 붙은 먼지를 툭툭 털어 냈다.
손가락질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다.
서고란 문파의 비급을 엄중히 보관하는 장소.
그곳의 관리가 엉망이었다는 것을 보여 준 셈이니, 정혜 신니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백무량의 시선을 의식한 그녀는 곧바로 변명을 쏟아 냈다.
“제자들을 돌보다 보니 서고를 정리하는 것이 미흡했습니다. 아, 시간을 조금 주신다면 내부를 정돈하지요.”
“이깟 먼지쯤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장문인께서는 제자들을 살피시지요.”
진심이라는 듯, 백무량은 오른손을 휘둘러 청운을 일으켰다.
후두둑!
천장에 쌓여 있던 먼지가 칠 보 거리로 날아갔다.
극에 이른 솜씨에 정혜 신니가 잠시 할 말을 잃은 동안, 백무량의 시선이 문 안쪽으로 향했다.
“안쪽을 살펴도 되겠습니까?”
“아, 물론이지요.”
정혜 신니가 표정을 수습하고는 물소리가 들리는 곳을 가리켰다.
“처소는 저쪽에 있습니다. 폭포가 주변에 있어, 정신을 수양하거나 무공을 익히기에도 좋을 겁니다.”
“편의를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협께선 큰일을 해낼 사람이니까요. 그럼 이만 물러가지요.”
그 말을 마친 정혜 신니는 가벼운 예를 표하고는 등을 돌렸다.
그렇게 그녀가 완전히 사라질 때쯤.
백무량은 아미복호검에 적혀 있던 구결을 떠올렸다.
“잠깐이지만 아미복호검의 요체를 알아차린 모양입니다.”
[칠성교주에게 세월을 빼앗겼을지언정 아미파의 장문인이 아니더냐? 몸이 기억하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지.]
심천검은 호탕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주변에 폭포가 있다고 하니, 수련은 그곳에서 하면 되겠구나.]
수경(水經)과 팔첨(八尖).
수경은 검기나 검강이 빈틈없이 맞물려 나가는 연격이자 방어초요, 팔첨은 단숨에 여덟 극점을 찌르는 일초.
성화교도뿐만 아니라 어떤 무인과 싸우더라도 효과적일 요체였다.
하물며 태청신공, 청운과도 상성이 좋았다.
“앞으로 청운이 얼마나 많은 변화를 품을지 벌써 두근거리지 않습니까?”
백무량은 밝은 표정으로 서고 안으로 들어섰다.
잔뜩 쌓인 먼지,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삭아 가는 책장.
코를 찌르는 퀴퀴한 냄새가 있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백무량의 눈에는 금덩어리나 마찬가지였다.
“선배! 선배가 보기엔 어떻습니까?”
[…….]
심천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전부터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차이가 확연해졌다.
무론(武論).
하나의 무공을 두고도 무인은 저마다 각자의 해석을 덧붙인다.
무인의 무재가 뛰어날수록 그런 성향이 강했고, 구파일방은 천재들에 의해 더욱 발전했다.
하지만…… 백무량의 무론은 너무나도 이질적이다.
[너는 무한을 바라는구나.]
곤륜파의 무공도 결국은 ‘무(武)’ 아래, 하나의 가지에 불과하다. 호흡과는 다른 이치였다.
아니, 애초에 곤륜파의 호흡마저도 끝이 있기 마련이거늘.
백무량은 하나의 가지로 모든 것을 가지길 원했다. 지금까지 다른 문파의 무학을 탐한 것 자체가 그러했다.
[공동파, 화산파, 보타문에 이어 아미파까지……. 모든 무학을 합하는 것이 네가 내린 답이더냐?]
“예.”
백무량은 많은 말을 떠올렸으되,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분명한 뜻을 밝혔다.
[그러하냐.]
심천검은 백무량의 의지를 인정했다. 하지만 일말의 의심은 남아 있었다.
검해의 심상 아래에 많은 것을 담는다고 한들 잔물결.
백련교주와 같은 괴력난신에게는 통하지 않으리란 의심이었다.
“두고 보십시오. 제가 칠성교주를 난도질할 날이 올 테니까.”
[허, 그래, 그랬으면 좋겠구나.]
심천검은 기껍게 웃었다.
아무렴, 좋았다.
마교를 적대하면서도 의기를 잃지 않는 후배가 있었다. 백무량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배가 저절로 불렀다.
‘하나 아쉽다. 내가 옆에서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꼬.’
머지않아 사라지리란 예감과 울적함.
심천검은 그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해가 지기 전에 도움이 될 비급과 도경을 찾아보자꾸나.]
“장문인께 허락을 맡았으니 밤이 되어도 처소에서 보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달빛에 의지하겠다?]
“낭만이 있지 않습니까?”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눈 소중한 걸 모르기는.]
백무량은 심천검과 담소를 나누며 아미복호검과 연관되는 비급을 찾아냈다.
소첨검(小尖劍).
수경연보(水經燕步).
아미복호장(峨嵋伏虎掌).
불가의 색채가 강한 검법, 일자수미검(一字須彌劍)까지…….
그것들을 보자기에 싼 백무량은 곧바로 처소로 향했다.
서고에서 구결을 시연할 수 없을뿐더러, 폭포가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곤륜은 폭포를 보려면 한참을 내려가야 했는데 말입니다.”
[그게 무슨 대수라고 그러느냐? 흠, 그래도 오래간만에 들으니 앙금이 내려가는 기분이구나.]
쏴아아…….
폭포수가 바위를 내리치니 수백 개의 물방울이 팔방으로 튀었다. 지켜보는 것만으로 개운함이 가슴을 씻는 듯했다.
백무량은 위가 평평한 바위에 자리를 잡았다.
아주 오랫동안, 수많은 검객이 다녀간 흔적이 보였다.
“금강경이라.”
백무량의 손가락이 검으로 새겨진 불경을 매만졌다.
검으로 파인 흉터에 군더더기가 없다. 바위가 옆면이 둥근 것을 고려하면 엄청난 실력을 가진 검객이었을 터였다.
“아, 그건…….”
백무량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간단한 선식을 가져온 정혜 신니가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백무량은 혹시나 싶어서 물었다.
“혹시 장문인께서 남기신 겁니까?”
“아니요. 설령 제가 남겼더라도 기억하지 못했을 겁니다. 칠성교주에게 많은 것을 빼앗겼으니까요.”
선식을 내려놓은 정혜 신니가 재차 입술을 달싹였다.
“제가 알기로는 아주 예전에, 잠시 이곳에 머무르신 도사께서 새긴 것으로 알아요.”
“그게 혹시 수십 년 전입니까?”
만에 하나 사형, 주백천과 관계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 상상은 일거에 깨졌다.
“족히 수백 년은 됐을 거예요.”
“……그렇군요.”
백무량이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자, 정혜 신니가 아는 바를 털어놓았다.
“전대 장문인께선 이곳에서 깨달음의 단초를 얻었어요. 잘은 모르겠지만, 흔적이 하나로 이어지는 걸 보았다고 했지요.”
“잘은 모른다?”
“아주 잠깐 보았는데, 그것만으로 충분했다나 봐요.”
백무량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호기심이었다.
“재밌는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여기 있는 동안 불편하지 않았으면 해요.”
정혜 신니가 등을 돌리려던 그때, 백무량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잠깐, 한 가지 여쭐 것이 있습니다.”
“예?”
“속가제자, 화 소저는 사천에 돌아갔습니까?”
“화 소저라면…… 은열이를 말하는 건가요?”
정혜 신니의 표정이 어둡게 일변했다.
백무량은 예기치 않은 불안감을 느꼈다.
“그 아이라면 사흘 전에 귀천했어요.”
“설마 마인에게 당한 겁니까?”
정혜 신니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물러가지요.”
“…….”
백무량의 입가에 한숨이 배어 나왔다.
***
[후회하느냐?]
“마음에 걸리지요.”
만에 하나, 화은열과 함께 사천성으로 잠깐이라도 동행했다면 어땠을까?
백무량은 그녀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사천까지만 따라갈게요. 방금처럼 산적과 마주치면 무서우니까요.
-아미파의 속가제자라고 하지 않았소? 어중이떠중이는 혼자서도 무찌를 수 있을 거요.
-알겠어요. 다음에 연이 있다면 그때 뵈어요.
아미파에 도착하기까지 사나흘이 늦어졌겠지만, 그녀가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심으로 가슴 아파하기에는 찰나에 불과한 인연이었다.
무림에서 무인의 목숨이란 쉽게 사라지기 마련이라, 사부에겐 덧없는 것이라 배웠다.
그럼에도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
“칠성교주였을까요? 아니면 그 옆에 있는 놈이었을까요?”
[그거야 모르지. 하지만 내가 아는 칠성교주는 심계가 깊지 않았다.]
“그 노인이란 말입니까?”
백무량은 청노의 얼굴을 떠올렸다.
곤륜파의 무공을 보고 놀라던 눈, 곧바로 입술을 씰룩이며 증오심을 드러내던 말들.
지금까지 봐 온 칠성교도와는 반응이 달랐다. 어쩌면 그가 성화교 혹은 천마신교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회상을 거듭하다 자연히, 시선이 아미복호검으로 향했다.
“제가 조금 더 강했더라면 칠성교주가 오기 전에 완전히 제압할 수 있었겠지요?”
[아마 나라면 가능했겠지. 사지를 자르고, 단전까지 폐할 여유가 났을 것이야.]
심천검은 담담하게 사실을 이야기했다. 괜한 거짓으로 백무량을 위안해 주고 싶지 않았다.
그 말에 백무량은 삐뚜름하게 웃었다.
“그거 다행이군요.”
[……?]
“아미파의 무학으로 그 소저의 복수를 행한다면, 하늘에서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도사란 놈이 복수를 논한단 말이냐?]
“하면 정의를 바로 세운다고 하지요.”
[허, 말장난이 과하도다. 정파랍시고 왈패 짓을 하던 놈과 별반 다르질 않아.]
심천검의 꾸짖음에도 백무량은 말을 바꾸지 않았다.
도리어 화가 치밀었다.
“하면 마인을 쳐 죽인다고 하지요!”
[정신을 차분히 가라앉혀라!]
“저는 군자도 아니고, 도사로서 깊은 수양을 쌓지도 않았습니다. 어쩌다 강한 힘을 쥐게 된 무인에 가깝지요.”
많은 짐을 어깨에 지고도 움직이는 이유가 있다면, 주백천과의 약속 때문이다.
영웅담에 나오는 주인공이 되겠다는, 그 약속.
그 무게는 칠 년 동안 더욱더 무거워져만 갔다. 그래서 심천검과의 만남이 기꺼웠다.
“선배와 함께라면 누구도 죽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백무량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가끔, 악몽을 꾸곤 했다.
백련교에 의해 불타는 곤륜산. 고통과 슬픔에 울부짖는 동문들.
악몽에서 깨고 나면 매번 정신을 다잡았다.
칠십여 년 전의 과거일 뿐이다. 흘러간 것에 미련이나 후회를 둘 필요는 없다.
그걸 알면서도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쥐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자신의 부족함으로 인해, 칠성교주를 이기지 못했다. 그래서 화은열이 죽었다면, 과거와 다르지 않다.
그 생각이 백무량을 모질게 괴롭힌다. 꽉 깨문 이빨 사이로 욕설이 흘러나왔다.
“좀 도와주십시오, 선배.”
[…….]
심천검은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백무량과 오랜 시간 생각을 공유하고 대화하면서, 대견하게 여긴 점이 있었다.
‘어떠한 상황일지라도 웃음을 잃지 않고, 선을 향한다고 생각했거늘.’
그것이 백무량이 짊어지고 있는 무게일 줄이야.
하물며 현 무림에는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칠성교를 제외하고도 마교가 셋이나 더 있었다.
짧게는 수십, 길게는 수백 년을 살아온 마인들.
그들을 상대하는 백무량의 압박감이 어떠하겠는가.
도사답지 않을지언정, 포기하지 않는 것 자체가 대단했다.
[좋다.]
심천검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과 어울리지 않지만, 백무량의 중심을 잡아 줄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네가 무한을 바란다면, 내가 옆에서 도우마.]
“선배……!”
[그러니 앞으로는 약한 모습 보이지 마라. 내가 아는 마교라면 반드시 약점을 찌를 테니까.]
“알겠습니다.”
백무량은 허공을 향해 두 손을 모아 올렸다.
뒤이어 서고에서 챙긴 비급을 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