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157화 (157/275)

만남 (4)

“그게 무슨 소리냐?”

청노의 의문에 칠성교주가 입술을 달싹였다.

다만, 그것이 끝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스릉……!

백선신검에서 펼쳐진 검기가 두 마인 사이를 갈랐다.

괜한 시간을 주고 싶지 않았다.

‘후배가 깨어나면, 내 의식은 밀려난다.’

그 전에 칠성교주와 청노를 도망치게 만든다. 그것이 심천검의 올곧은 의지였다.

갈라진 대지를 본 칠성교주가 피식 웃었다.

“한낱 망령 따위가 생자의 몸을 차지해서야 되겠는가?”

“시끄럽다.”

심천검이 짧게 대꾸했다. 그러나 뒤이어 펼친 검초, 의념은 가볍지 않았다.

“구천화우검의 사초, 염천일원.”

심천검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생전의 신체에 비해 백무량의 몸은 너무나 가볍고, 젊었다.

그 차이를 막강한 공세로 채운다. 백선신검의 칼날에 가공할 공력이 실렸다.

“호오.”

칠성교주가 감탄성을 흘렸다. 심천검의 칼날에 실린 것은 단순히 공력만은 아니었다.

심상을 유형화한 듯한 경파.

아직 백무량이 개척하지 못한 경지에 심천검이 발을 들였다.

익숙하지 않은 초식을 행함에 있어 육신이 비명을 질렀다.

요컨대, 단련하지 않은 근육을 사용하는 것과 같았다.

하물며 그것이 고강한 수준의 검초라면 어떠할까?

“큭.”

심천검의 입가에 핏물이 흘렀다.

그러나 염천일원의 심상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백선신검이 유려한 곡선을 그렸다.

“망령은 아니었는가.”

칠성교주의 중얼거림에 심천검은 귀를 의심했다.

기이했다. 분명히, 수백 년 전에 마주했던 칠성교주 그 자체이거늘.

‘어째서 기억하지 못하지?’

그 의문은 잠시 접었다.

칠성교주의 기신지체(起神之體)가 전신으로 자연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과거에 저런 특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낭패를 보았던바.

심천검은 경파를 좌우로 분산했다.

공력을 머금은 기파가 자연기를 사방으로 흩어 내니 칠성교주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이걸 어찌!”

“답할 의리가 있더냐?”

심천검은 짤막하게 답하여 검을 휘둘렀다.

백무량이 다른 문파의 무학을 구천화우검에 뒤섞는다면, 자신은 곤륜의 순수한 무학.

현천부휘의 연격이 칠성교주의 몸을 난도질했다.

선기를 쓸 수 있었다면 치명상을 입혔겠지만, 아쉽게도 심천검에게 선기를 다뤘던 경험은 없었다.

단지 육체가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크윽.”

상반신에 큰 상처를 입은 칠성교주가 뒤로 물러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유로웠던 모습은 없었다.

당장 얼굴을 보라.

흰 장발이 조금씩 잘려서는 볼썽사나운 꼴이 되었다.

심천검의 얼굴에 꼴좋다는 미소가 맺혔다.

“결국 네놈도 한낱 마인에 불과하다는 게지.”

“……불쾌하도다.”

칠성교주가 주먹을 꽉 쥐었다.

심천검이 완전히 흩어 내지 못한 자연기가 순식간에 모이더니, 완연한 형태를 갖췄다.

그뿐만이 아니다.

낡은 가면 아래에서 고통 어린 메아리가 울렸다.

그중에 심천검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있었다.

‘아직도 품고 있는가……!’

심천검은 옛 기억을 떠올렸다.

기신지체란, 자연기와 귀기를 일으키는 체질이자 재능.

칠성교도가 품은 요신과 악신 모두 칠성교주가 찾아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외 나머지 영혼은 모두 가면 아래에 있을 터.

“오늘에야말로 해방시킬 수 있겠구나.”

그 말에 칠성교주가 주먹을 풀었다.

“아니, 적어도 오늘은 아니다.”

“……?”

“너와 싸워서는 수지가 맞지 않는다.”

심천검을 꺾으려면 소비할 혼은 적어도 절반.

상황이 불쾌하긴 하지만 대의를 위해서라면 굽혀야만 했다.

칠성교주가 미련 없이 등을 돌리자, 심천검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저대로 두어야 하는가?’

선공으로 칠성교주의 상반신을 망신창이로 만들었지만, 간합의 승리일 뿐.

계속해서 싸운다면 언젠가 공력은 바닥을 보인다. 원한이 있다고 하여 억지를 부린다면, 죽는 건 백무량의 육신이었다.

하지만 칠성교주의 도주를 가만히 둘 수도 없었다.

“……너희는 무엇을 꾸미고 있느냐?”

“허, 끈질기게도 묻는구나.”

칠성교주가 가면을 매만졌다. 그 순간 많은 말소리가 상단전을 두드렸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수십의 ‘칠성교주’가 가면 아래에서 대화했다.

“좋다. 뱉었던 말은 지켜야겠지.”

칠성교주가 걸음을 멈추고는 심천검을 바라보았다.

“네 무공은 뜻을 관철하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나는 도망치려 했고, 무슨 이유였든 너는 곤륜도로서 등 돌린 자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해 주겠다는 거다. 무엇이든 물어라.”

심천검은 당황스러운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서 칠성교주에게 물었다.

“현 무림에 마교가 몇이나 있느냐?”

“넷. 그 이상은 자세하게 말할 수 없다.”

그 말에 상처를 다스리던 청노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무슨 말을 하느냐! 그만둬라!”

“……다른 질문이 있느냐?”

칠성교주의 말에 심천검이 깊게 숙고하고는 물었다.

“백련교와 같은 편이더냐?”

이 질문은 심천검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했다.

백무량에게 들은 백련교주는 칠성교주와 비교하여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

만일 백련교와 칠성교가 같은 편이라면 각개격파의 묘수를 떠올려야만 했다.

적이라면, 그 둘을 싸우게 만드는 쪽이 더 쉽다.

그 이유를 알아차린 칠성교주가 가볍게 웃었다.

“속이 훤하게 보이는 질문이군. 우리와 백련교는 같은 편이 아니다.”

‘청노가 백련교가 아니라는 뜻이 되겠군.’

칠성교주를 신뢰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도망칠 여력이 되는 놈이 저러는 것도 참으로 기이하긴 했다.

심천검은 마지막 질문을 입에 담았다.

“너희들은 목표는 무엇이더냐?”

“선을 넘는군. 말해 줄 수 없다.”

그 대답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에, 심천검이 다른 지점을 찔렀다.

“하면, 칠성교의 뜻은 과거와 다르지 않더냐?”

“……허.”

칠성교주가 저도 모르게 탄식을 흘렸다.

“방금 펼친 기예부터 시작하여, 그 질문까지. 평범한 망령은 아닐 것이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

심천검은 침묵으로 대답했다. 칠성교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청노의 실수가 더욱 큰 손해로 이어졌군. 다음에 본다면, 반드시 죽이겠다.”

“그때는 쉽지 않을 것이다.”

심천검의 엄포에 칠성교주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의 걸음이 청노에게 향했다.

“알아서 일어나시오, 청노.”

[저놈에게 너무 많은 걸 이야기하지 않았소!]

청노의 분노를 칠성교주가 가볍게 비웃었다.

[그대가 먼저 강호에 다른 동지가 암약하고 있음을 밝혔소. 곤륜파에 원한을 가지고 있음은 알고 있으나, 선후를 따지시오.]

“……끄으으.”

할 말이 없어진 청노가 다리를 질질 끌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청노의 시선이 잠시 곤륜산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주 오랜 기억이 심상으로 화했다.

만년한철로 만든 삼천존을 짊어지고 올라가는 한 남자…….

천마신교의 장로로서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광경.

청노가 이를 뿌득 갈았다.

심천검은 그것을 지켜보며 백무량에게 전해 줄 정보를 정리했다.

***

[너무 감정이 앞섰다. 만일 내가 없었다면, 그 자리에서 천 번을 죽어도 모자랐을 것이다.]

심천검은 백무량의 실책을 짚었다.

혈기는 좋았으나 실력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 점은 백무량도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저도 압니다.”

백무량이 한숨을 거듭 내쉬었다.

“하지만 어찌 주적을 두고 침착할 수 있겠습니까?”

[적을 앞에 두고서도 명정의 마음을 품고, 그것을 관조할 줄 알아야 한다. 수십, 수백 번은 들었을 터. 곤륜의 호흡을 제대로 유지했다면 정신을 잃진 않았을 것이다.]

심천검은 진지한 목소리로 백무량을 거듭 꾸짖었다.

평소라면 그저 자연스럽게 흘렸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방금 마주한 칠성교주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때보다 더욱 강해진 상태였다.

만일 전투를 지속했다면 필패라는 답밖에 나오지 않는다. 가면 아래의 영혼을 소모시키는 것이 전부였다.

[그들이 물러간 건 오로지 전력을 소모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아예 깨어나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백무량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착잡하고 복잡한 마음이었다.

“마인이 보내 준다고 하여, 그대로 듣고 떠난다면 자존심이 상하지 않습니까?”

[자존심이 목숨을 살려 주더냐?]

“허, 뭐 그건 아니지만.”

사문의 역사에 얽힌 수많은 마교들.

그들을 두고서 등을 돌린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백무량은 그걸 말하고 싶었지만, 심천검의 과거를 알기에 함부로 말하기도 어려웠다.

사실 심천검이야말로 가장 괴로웠을 테니까.

“다음에는 칠성교주, 그놈은 꼭 잡읍시다, 선배.”

[그래, 그러자꾸나.]

심천검은 백무량이 자신을 배려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솔직하게 말해서, 백무량의 몸을 빌려서 칠성교주를 베고 싶은 마음이 크기는 했다. 수백 년 전 곤륜파가 멸문한 까닭이 그에게 있었다.

하지만 백무량에게는 무거운 짐이 있었다.

과거, 심천검 자신이 그랬듯이.

천하의 안정은 검해를 이은 도사에게 달려 있었다.

[내가 옆에서 계속 도우마.]

“그럼 지금 가르쳐 주시지요. 칠성교주를 상처 입혔다던 그 무공 말입니다.”

[놈, 선배에게 공양조차 하지 않고 잿밥을 원하느냐?]

“하하…….”

백무량은 심천검과 담소를 나누며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스르륵, 스륵.

심천검과 대화하다 얼핏 들려온 소리가 있었다.

백무량의 시선이 허리띠에 묶어 놓은 혁낭으로 향했다.

“설마……?”

정혜신니에게 전해 주라던 목함.

그것이 사분오열되어 주머니 안에서 서로 부딪치고 있었다.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선배님, 얌전히 싸울 순 없었던 겁니까?”

[내가 부쉈다고? 지금 내 탓을 하는 게냐?]

“싸운 사람이 바로 선배이지 않습니까!”

[목숨을 구해 준 은인에게 고맙다고 하지 못할망정 물건 하나 부쉈다고 탓을 해?]

“물건 하나라니요. 보타문주가 아미파 장문인에게 전하라는 신물인데……!”

백무량의 난데없는 남 탓에 심천검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만일 자신에게 몸이 있었다면 가슴을 두들겼을 터였다.

[내가 저런 놈을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니!]

“제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번도 말한 적은 없습니다.”

백무량은 심천검에게 농을 던지면서 칠성교주의 모습을 떠올렸다.

도저히 이겨 낼 수 없을 것 같던 존재감.

백련교주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강함이 그에게 있었다.

옆에 심천검이 없었다면 살아남을 수 없었을뿐더러, 마음이 안정을 찾지 못했으리라.

“선배가 좋기는 합니다.”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예?”

백무량은 순간 눈을 끔뻑거렸다. 항상 자신의 마음을 읽곤 하던 심천검답지 않았다.

‘노친네, 어이!’

심천검이 듣기만 하면 피를 토할 소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백무량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안 들리셨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더냐?]

“제가, 속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는데요.”

[욕이었느냐?]

“…….”

백무량의 침묵에 심천검은 불만을 내비쳤다.

[나한테 안 들리는 것 같다고…… 쯧! 대사형이라는 녀석이 모범은커녕!]

“뭐, 그건 그렇고, 어찌 된 영문일까요?”

[아무래도 네 몸에 잠깐 들어섰던 게 문제였던 모양이구나.]

“…….”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같이 지낸 시간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인연은 제법 깊었다.

무엇보다 백무량에게 있어 심천검의 존재는 의지할 선배이자 안 좋은 경험을 거리낌 없이 공유할 수 있는 스승과 같았다.

백무량은 그 감정을 내비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사천에 도착하면 검해에서 수련하지요.”

[그러자꾸나.]

심천검은 백무량의 마음을 어렴풋이 눈치챘지만, 말을 아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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