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요귀 (2)
한때 칠성교주에 가장 가까웠던 마인.
백무량이 얼굴에서 여유로운 척하던 미소를 지웠다. 심천검이 말해 준 과거의 무게가 섬뜩하게 다가왔다.
‘선배한테 괜한 이야기를 들었군.’
반쯤 실성한 모습과 갈지자를 그리는 걸음걸이.
청요귀의 겉모습은 범속한 거지와 같았으나 은연중에 느껴지는 살기와 음험함은 어떤 마인보다 짙었다.
청요귀의 격을 가늠한 백무량은 숨을 깊게 내쉬었다. 운검묘에서 서둘러 내려오느라 가빠진 호흡을 골라야만 했다.
바로 그때.
“주지, 않는다.”
청요귀가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달려들었다. 철퇴에 알알이 박힌 마기가 일점으로 모였다.
백무량은 그것을 가만히 기다리지 않았다. 운중용형보가 백무량의 육체를 지우고 앞으로 내달리게 했다.
그 모습을 본 청요귀의 눈꼬리가 가늘게 휘었다. 반걸음 앞으로 나아가면서 철퇴를 휘둘렀다.
‘힘에는 힘으로.’
백무량은 청요귀와의 일 합을 떠올렸다. 검뢰벽천을 밀쳐 내던 괴력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물러날쏘냐.
백무량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일 검으로 부족하다면 연환하여 육합의 공격으로 쳐부순다.
구천화우검의 오초, 현천부휘가 수십 개의 검기를 뿌렸다.
하나하나 청운의 기운이 담겨 있어 마기와는 상극.
청요귀의 시퍼런 마기를 밀어 내기에 충분하다.
“그아아!”
청요귀의 상반신에 상처가 하나둘 새겨지는 사이, 백무량은 앞으로 내디뎠다.
한 걸음, 두 걸음.
운중용형보의 요체, 허류식이 펼쳐진다.
백무량의 몸이 허공에 뜬 채로 머물렀다. 철퇴로는 쉬이 반격할 수 없는 방위에서 선을 점했다.
“크하아!”
청요귀는 괴성인지 웃음일지 모를 소리를 흘렸다.
그 직후, 백무량은 눈을 의심했다. 오른손의 철퇴를 내던진 청요귀가 아무것도 없는 허리띠를 붙잡고 있었다.
[조심해라!]
심천검이 급박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백무량의 손등에 있는 운룡의 문양에서 핏물이 주르륵 흘렀다.
귀명편(鬼鳴鞭).
과거 수많은 도사를 죽음으로 내몬 청요귀의 애병.
그것이 허공을 찢으니 백무량의 눈앞에 많은 것이 떠올랐다.
봄의 바람처럼 따스하고 여린 기억들. 그리워하는 사형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어루만지는 듯했다.
“쓰레기 같은 놈이.”
백무량은 송곳니로 입안을 찢었다. 비릿하고 뜨거운 것이 혀를 적시고, 분노가 전신을 휘돌았다.
“사특한 짓을!”
백무량의 칼부림이 청요귀의 정수리를 향해 휘둘러졌다.
현천부휘에서 이어지는 육초, 양천대소.
나선의 형태로 합쳐진 검강이 벽력을 그린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청요귀의 호신강기를 찢고 마기를 무너뜨렸다.
쩌저적!
그것을 귀명편이 걷어 냈다. 히죽거리며 웃은 청요귀가 대뜸 백무량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아래로 강하게 휘두르니.
꽈광!
땅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일어나고, 흙먼지가 부옇게 일어났다.
청요귀는 진지한 표정으로 땅바닥을 바라보았다.
심천검에게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후로 사냥감의 죽음은 몇 남지 않은 여흥이었다.
그러나 이번 사냥감은 달랐다.
“불쾌한.”
심천검과 어쭙잖게 닮아서는, 눈앞에 있는 것만으로 과거의 상처를 후벼 파는 것 같았다.
그렇게 흙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던 그때.
“후우……!”
백무량의 숨이 가라앉던 흙먼지를 다시 위로 일으켰다.
청요귀의 시야가 한순간 어지러워지는 것을 틈탄 일 검.
균천관일의 찌르기가 허공을 갈랐다.
떠오르던 흙먼지가 좌우로 갈라지고, 백무량의 시야에는 오직 청요귀의 미간만이 보였다.
“쯧.”
청요귀가 혀를 차며 우수를 휘둘렀다.
짧게 휘둘러 친 귀명편에서 귀기 어린 울음소리가 울렸다.
그 안에는 그가 예전부터 지금까지 목숨을 빼앗아 온 수백의 영혼들.
시퍼런 귀기가 휘감겨 있었다.
백무량의 눈이 흔들렸다. 아무리 백전의 무인일지라도 저런 광경은 난생처음이었다.
[정신 차려라!]
심천검의 청명한 외침이 백무량의 눈빛을 맑게 했다.
그 순간 백무량은 귀명편의 울음소리 사이에서 곤륜도의 기척을 느꼈다.
복식은 지금과 아주 다르지만, 심천검과 비슷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선배, 이건…….’
[싸움이 중하다.]
묻지 말라는 듯, 심천검의 단호한 말에 백무량이 입술을 비틀었다.
사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눈앞에 있는 청요귀가 과거, 곤륜파를 무너뜨리는 데 일조했다는 뜻일 테니까.
까드득, 백무량이 이를 꽉 다물었다.
심상이 극에 달하며 검해와 현실이 조금씩 겹쳐졌다.
뒤이어 펼친 것은 운룡대팔식.
백무량의 발이 허공을 짓눌렀다. 곤륜산맥의 운해가 짓눌리며 그 자리를 청운이 대신 채웠다.
콰르르르!
도복 옷자락이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펄럭였다.
청명한 선기를 느낀 청요귀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시퍼런 귀기를 끌어냈다.
한데 그의 가면이 조금 기이했다.
[……완전히 망가진 것은 아니었나.]
심천검의 혼잣말이 얼핏 들려왔다.
백무량은 고개를 빳빳이 든 채 청요귀의 변화를 감지했다.
그저 백자처럼 하얗던 가면에 분노한 표정이 그려졌다.
한 올 한 올, 시퍼런 귀기로 음각되어 주변의 운해마저 좌우로 밀어 낼 정도로 강력했다.
그렇다고 하여, 달라진 것은 없다.
백무량이 입술을 비틀었다.
운룡대팔식에서 이어지는 호천풍연의 검경.
검해의 심상이 담긴 일초가 청요귀를 향해 쏘아졌다.
“……커.”
이에 청요귀가 입에서 시퍼런 연기를 뿜으며 중얼거렸다.
“어찌, 너에게서 심천검이 보이느냐?”
“……!”
백무량이 인상을 찡그렸다.
어떤 잡귀를 다스리고 있는지는 모르나, 청요귀가 감을 잡은 것만으로 죽일 이유가 하나쯤은 더 늘어났다.
백무량이 호천풍연에 내공을 주입하자, 청요귀가 귀명편에 귀기를 더했다.
“커, 역시, 죽인 뒤에 알아보는 수밖에.”
“헛꿈을 꾸느냐.”
청요귀를 비웃은 백무량이 운룡대팔식을 이어 갔다.
첫걸음에 호천풍연의 검경을 담았으니, 이제는 두 번째.
호흡을 잘게 쪼갠 걸음이 운해를 짓이기고 하늘을 때렸다.
꽈과광!
한데 모인 운해마저 흩뜨린 굉음에 청요귀가 인상을 찌푸렸다.
마기와는 상극인 선기가 한가득 담겨 있어, 귀명편이 순간 밀려 났다.
백무량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검해에 담긴 심상을 끄집어냈다.
구천화우검의 사초, 염천일원.
심상을 검기로 빚어낸 검경. 백무량이 그려 내는 검의 바다가 청요귀를 향해 몰아쳤다.
청요귀가 서둘러 귀명편을 강하게 휘둘렀으나, 단단했다.
보타문주와의 비무에서 얻은 무학이 구천화우검에 진득하게 녹아 있었다.
“그깟 채찍에 굴할 무공이 아니다.”
백무량은 선언하듯이 청요귀를 꾸짖었다.
그 말대로, 다른 문파의 무학을 녹여 낸 구천화우검은 절벽에 새긴 검흔처럼 앞으로 곤륜파의 미래가 될 무공이었다.
그깟 마인에게 질 수는 없다.
그 태도가 청요귀의 귀기를 폭주시켰다.
“네 이놈……!”
청요귀가 염천일원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귀명편을 부여잡았다.
뒤이어 손잡이부터 자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뒤로 물러나라!]
심천검의 경고에 백무량이 허공에서 몸을 뒤틀며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귀명편에서 한 줄기 솟아난 가시가 뺨을 스쳤다.
한데 청운이 꿰뚫리는 감각이 없었다.
‘저게 무슨…….’
백무량의 뺨에 식은땀이 맺히던 그때, 심천검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귀명편에 닿으면 안 된다.]
‘…….’
백무량은 침묵으로 대답했다.
이유는 단번에 알았다.
귀명편에 얽혀 있던 귀기 중 일부분이 사라졌으니까.
저것에 닿으면 분명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터였다.
백무량이 모든 내공을 끌어올리는 사이, 청요귀가 가래가 끓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에게, 왜…….”
처음에는 백무량이 심천검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손 속을 나눠 보니 아니었다. 외견은커녕 무공의 일부마저 닮지 않았다.
한데 왜, 청요귀는 백무량을 심천검과 착각했는가?
그 이유가 청요귀의 시야에 드러났다.
“심천검의 영이 너에게 있단 말이냐!”
“…….”
왜 너에게 대답해야 하냐는 듯, 백무량이 말없이 검을 들었다.
그것을 본 청요귀가 낮게 웃었다.
“곱게 죽어 주진 않겠다.”
방금의 초식으로 우위는 확실하게 나뉘었다.
청요귀는 백무량을 이길 수 없다.
운룡대팔식에서 이어지는 구천화우검은 귀명편으로 쳐 낼 수 없고, 귀기로도 메꾸기가 불가능한 격의 차이가 있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귀혼해방.”
청요귀의 언령에 귀명편이 쪼개졌다. 그 사이로 수백 개의 눈이 뒹굴거렸다.
범인이라면 보자마자 기절했을 광경이었으나, 백무량은 무심했다.
만금상단에서 보았던 마인이 그랬듯 청요귀 또한 마찬가지일 거라고 여겼으니까.
한데 그 모습이 백무량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그, 그흐윽…….”
귀명편 사이에서 나온 귀기가 청요귀를 조금씩 삼켰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청요귀로는 모자라다는 듯, 귀기가 조금씩 땅을 검게 물들이며 청운을 밀어 냈다.
그것을 본 백무량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딜 감히 곤륜의 토지에 발을 들이미느냐.”
청운이 한데 모여 바다를 이루고, 백선신검에 얽혔다.
백련교주와의 싸움에서 보았던 검해의 심상.
그 모습을 따라 백무량이 태청신공을 운용했다.
거듭된 운용에 내공이 고갈되고 속이 울컥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곳에서 청요귀를 없앨 수 있다면, 과거의 은원 하나를 없애는 셈이니까.
모든 내공을 끌어모은 백무량이 백선신검을 든 그때.
“네놈, 그것은…….”
귀기에 반쯤 먹혀 가던 청요귀의 시선이 백무량의 손등으로 향했다.
영혼을 다루고, 환상을 심는 그였기에 운룡이 단순한 문양으로 보이지 않았다.
수백 년의 업이 담긴 심화(心畫).
그 사실을 백상에게 전하려고 했지만, 청요귀는 입을 열지 못했다.
귀명편을 해방한 이상 청요귀에겐 죽음만이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눈앞에 검해를 쥔 백무량이 있었다.
“변천승운.”
꽈르르르!
구천화우검의 팔초가 청요귀의 전신을 가르고, 귀기를 정화했다.
***
‘이놈, 틈이 보이지 않아.’
금방 죽이고 청요귀에게 합류할 수 있을 줄 알았거늘.
백상은 현종휘에게 얕은 상처만 입힐 뿐,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다.
흔들리지 않는 의지와 완성에 가까운 초식.
그것이 백상의 비도를 계속해서 쳐 내고, 주위의 곤륜도마저 수호하고 있었다.
심지어 백상이 몸을 내빼려고 할 때도.
“어딜 가느냐.”
현종휘가 반쯤 지친 듯한 표정으로 따라붙었다.
그것은 백상에게 있어 신비로운 광경이었으며, 불길해 보였다.
‘구파일방의 장로조차도 날 이길 수 없거늘.’
어찌 약관도 되지 못한 소년이 자신을 상대로 붙들고 늘어진단 말인가.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백상이 마침내 가면을 붙잡았다.
일이 어떻게 되더라도 일단은, 신을 풀어놔야 모든 일이 정리될 것 같았다.
하지만, 상황은 찰나에 뒤바뀌었다.
콰르르르!
백무량의 검이 청요귀를 귀기와 함께 일도양단한 것이다.
백상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이게, 무슨……!”
이윽고 백상은 자신의 혼잣말에 큰 충격을 느꼈다.
‘저렇게 어린 놈한테 몇 번을 당해야 한단 말이냐.’
그렇게 백상이 백무량의 등에 비도를 날리려던 순간.
“다음은 너다.”
백무량이 고개를 돌려 백상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