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요귀 (1)
강적의 등장에 현종휘가 왼손 손등으로 눈가를 쓸었다.
극한에 이른 집중이 이어지기를 대략 일다경.
수없이 쌓인 피로로 만들어진 쌍꺼풀이 느껴졌다.
‘현실감이 없어.’
언제나 평안했던 곤륜파였다.
이 시간대면 곡물을 찌는 냄새가 안채와 바깥채를 휘돌았다.
봄날처럼 따스하고 향긋한 나날이었다.
한데 지금은 어떠한가?
“아…….”
동문이 죽어 가는 광경에 넋을 놓은 어린 도사.
“지금 무얼 하고 있느냐! 얼른 피하지 않고!”
그런 도사를 구하려다 대신 칼을 맞는 일대제자들.
온갖 괴로움과 망념이 머릿속을 파고듦에 현종휘는 입술을 물어뜯었다.
그것으로 모자라서, 손톱으로 팔뚝을 강하게 긁었다. 핏물이 손등을 타고 흘렀다.
“아직은 어리군.”
그 망념을 청가면의 마인이 끊었다.
현종휘를 바라보는 눈빛에 동정심과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본 교가 가만히 두고 볼 줄 알았더냐?”
“…….”
“곤륜신성이 어디 있는지 말하거라. 그렇게 한다면 고통은 줄여 주겠노라.”
“……시끄럽다.”
현종휘는 낮게 중얼거렸다.
약해지려는 마음을 채찍질하듯이, 강적 앞에서 고개를 들려는 두려움을 짓누르듯이.
현종휘가 검을 높게 들었다.
숨을 길게 내뱉으니 뇌검결의 줄기가 가면 앞까지 치솟았다.
꽈르릉!
그 소음에 청가면의 마인이 소리 없이 웃었다.
“백무량과 마주할 때까지의 여흥으로는 충분하군.”
땅이 쩍 하고 갈라졌다.
마인과 현종휘의 거리가 스무 보에 가까웠으나 그들에게 거리는 중요치 않았다.
어차피 단 한 걸음.
그것으로 좁힐 수 있는 거리라면, 누가 먼저 선을 잡느냐.
그 싸움에서 선수를 취한 것은 바로 현종휘였다.
쩌저적!
백무량이 일찍이 뇌창이라고 칭했던 분광뇌운결.
그 총화가 현종휘의 우수에서 발해졌다.
“……호.”
‘눈을 깜빡할 사이에 전신을 옭아매는 검기라.’
청가면의 마인이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내 소개를 안 했군.”
“……?”
“나는 칠성교의 삼존, 백상이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상의 품에서 세 개의 빛이 번뜩였다.
‘빠르다!’
실선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자 현종휘가 숨을 꾹 참았다.
태청신공으로 안력을 돋웠음에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투검이었다.
그러나 며칠 전, 연무장에서 보았던 백무량의 검처럼 압도적이진 않았다.
현종휘의 우수가 좌에서 우로, 장절하게 휘둘러졌다.
완벽하게 펼쳐진 창천명월 끝에 분광뇌운결의 뇌기가 번뜩이니.
“……!”
백상의 투검이 바닥으로 튕겨 나갔다.
당황스러운 기색 아래로 탄내가 진동했다.
현종휘의 일수가 백상의 바짓단을 태운 까닭이다.
‘해볼 만하다.’
현종휘가 숨을 깊게 골라냈다.
아직은 멀지만 분명히, 백무량이 갈랐던 운해의 길을 따라서 걷고 있다는 것이 실감되었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시간이 채워 주리라.
그 일념 하나로, 현종휘가 백상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놈이……!”
겨우 그깟 일수로 기세등등해진 것이냐며, 백상의 쌍수가 허공을 어지럽혔다.
수십 개의 투검이 현종휘의 관절과 근육을 점했다. 하나라도 허용했다가는 사지 말단을 움직일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현종휘의 감각은 개화하여.
“……!”
오직 백상을 보고 있음에도, 현종휘의 칼날은 손쉽게 수십 개의 비도를 쳐 냈다.
땅바닥에 나동그라진 비도들은 백상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이대로라면 곤륜신성에게 다다르기는커녕, 이런 소년에게 패배하고 말 것이라고.
불쾌함을 느낀 백상이 한쪽 뺨을 씰룩였다.
“청요귀(靑妖鬼)를 해방해라.”
백상의 한마디에 마인들이 일제히 멈췄다.
그들 중 서넛은 제 몸이 베이고 있음에도 백상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렇게 찰나의 시간이 흐른 뒤.
“……명을 받듭니다.”
싸움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던 마인이 낮은 음성을 흘렸다.
현종휘는 그 음성에서 두려움을 느꼈다.
그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퍼걱……!
뼈가 부서지고 살이 뭉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모골이 송연해졌다. 현종휘의 콧등에 비릿한 혈향이 감돌았다.
“흐, 히히…….”
실성한 듯한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들리기 시작한 발소리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의 그것처럼 지저분하고, 불규칙했다.
뒤이어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현종휘의 예상과는 달랐다.
‘가면이 조금씩 깨져 있어?’
지금까지 봐 온 칠성교도는 대부분 가면을 잘 관리했고, 깨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방금까지 손 속을 나눈 백상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청요귀라고 불린 그것은…… 상처투성이인 가면을 덜렁거리면서 움직였다.
가면으로 잡신을 억누른다던 칠성교의 교리와는 정반대였다.
‘저건 뭐냐라고 묻고 싶지만.’
현종휘의 시선이 다시 백상에게 돌아갔다.
어차피 저놈과 싸우게 된다면, 그 전에 적을 줄이는 것이 옳은 판단일 테니까.
현종휘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졌다.
구천화우검의 삼초, 호천풍연.
흐릿한 검경이 백상의 가슴팍을 향해 날아갔다. 그야말로 절묘한 기습이었다.
한데 백상의 반응이 기이했다.
‘반응하지 않아?’
도리어 자신을 향해 묘한 웃음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현종휘가 어금니를 꽉 다문 채 내공을 칼날에 불어 넣었다. 순식간에 백상의 호신강기가 부서지고 피부를 가를 듯했다.
다만 그것이 전부였다.
파스슥.
호천풍연이 부서지고 태청신공의 내공이 흩어진다.
“……!”
현종휘의 눈이 놀람으로 커졌다.
그에 반해 백상은 여유로울 뿐이었다.
“클클.”
백상이 한 손으로 던진 비도가 현종휘의 발등을 꿰었다.
그야말로 섬전과 같은 솜씨였지만, 현종휘로선 기가 막혔다.
“왜……!”
“그건 염라에게 물어라.”
백상의 비도가 현종휘의 가슴팍을 향했다.
실상 눈앞에서 던졌으니 피할 구석이 없다.
현종휘는 눈을 질끈 감았지만, 어째선지 아픔은 찾아오지 않았다.
뒤이어 귓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곤륜도라면 끝까지 눈을 뜨고 싸워라.”
허공에서 떨어져 내린 백무량이 백상에게 검을 겨눴다.
“이제 네놈들의 상대는 나다.”
투둑.
백무량의 일 검에 백상의 손가락이 잘렸다. 비도 또한 마찬가지로 힘을 잃은 채 떨어졌다.
이에 백상이 인상을 찡그린 채 외쳤다.
“청요귀!”
“흐하하!”
백상의 부름에 청요귀가 엄청난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백무량은 속으로 정신을 다잡으며 심천검에게 물었다.
‘아까 들었던 대로 하면 되겠지요?’
[그래, 절대 홀려서는 안 된다.]
백무량은 이곳으로 도착하기 전에 있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약 일다경 전.
[저놈은…… 청요귀가 아닌가!]
‘아는 마인입니까?’
백무량은 서둘러 곤륜파로 향하며 심천검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백련교라면 몰라도 칠성교라면 심천검이 자신보다 더 많이, 아니 수없이 싸워 왔을 테니까.
그 경험으로 곤륜파의 피해를 줄일 수 있다면, 무조건 따라야 했다.
‘선배!’
[수백 년이 지난 이때까지 생존해 있을 줄이야.]
심천검의 목소리가 짙은 후회로 가득했다.
그것으로 백무량은 엄청난 적임을 직감했다.
‘선배가 죽이지 못한 놈이군요.’
[그때 반드시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거늘.]
한숨을 푹 내쉰 심천검이 청요귀에 대해 이야기했다.
[저놈은 한때 칠성교주의 후보였던 놈이다. 사람의 정신을 꺾고 희롱하는 데 능하지.]
‘술법 같은 겁니까?’
[술법? 차라리 그런 거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꼬.]
심천검은 허심탄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매라는 말을 아느냐?]
‘어릴 적에나 듣던 설화 아닙니까?’
[그게 청요귀의 정체다. 사람의 정신과 감각을 희롱하여 제대로 된 싸움을 할 수 없게 만들지.]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리 칠성교가 이해하기 어려운 마교라지만 어찌 그런 사특한 술법을 펼칠 수 있단 말인가?
그 해답은 멀리서 벌어지고 있었다.
“왜……?!”
현종휘가 백상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순간에 깜짝 놀라서 뒷걸음치는 모습.
백무량은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가 어려웠다.
심천검은 그 마음을 안다는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걸 알기 전까지는 수없이 많은 동도를 잃어야 했지. 다행히도…… 지금은 제정신이 아닌 듯하다만.]
“…….”
백무량은 정신을 다잡고 청요귀를 바라보았다.
과연, 심천검의 말대로 상처투성이인 가면을 덜렁거리며 침을 흘리고 있었다.
‘저게 선배가 남긴 상처입니까?’
[지긋지긋하지. 저런 상태로도 살아 있다는 것이.]
청요귀와 심천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일단은 종휘부터 구하고 보자!’
백무량은 그 호기심을 속으로 묻은 채 언덕 위에서 뛰어내렸다.
“네놈……!”
잘린 손가락을 꼭 쥔 백상이 백무량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네놈이었구나! 만금상단에 있었던 녀석이!”
“하면 너는 바깥에서 검을 던졌던 놈이겠구나.”
백무량은 태청신공을 운용했다. 기수식을 취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시간을 허비하면 곤륜파의 피해가 커지기만 할 테니까.
스릉!
백선신검의 검명이 크게 울려 퍼졌다. 선기가 담긴 소리에 백상과 청요귀가 움찔거렸다.
“그 사실을 바깥에 알릴 순 없으니, 목부터 취하마.”
그렇게 백무량이 백상의 목에 검을 휘두르는 순간.
제법 거리가 있던 청요귀가 앞으로 달려들었다. 조금 전까지 정신을 반쯤 잃은 듯했던 놈처럼 보이지 않았다.
“심천, 검.”
청요귀의 중얼거림에 백무량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뭐냐?”
“네놈, 그놈과 닮았구나.”
싯누런 이를 드러낸 청요귀가 허리띠에서 철퇴를 꺼냈다.
백무량 또한 백선신검을 휘둘렀다.
쩌엉!
커다란 파음이 귀를 찢는 듯했다.
인상을 찡그린 백무량이 분광검의 삼절광식, 검뢰벽천을 펼쳤다.
좌에서 우로 자르는 일 검에 철퇴가 옆으로 밀려 났다.
‘무슨 놈의 힘이……!’
어찌 철퇴를 자르기는커녕 힘에서 밀린단 말인가.
백무량은 백상보다 청요귀가 훨씬 강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와 동시에 현종휘에게 전음을 보냈다.
[종휘야.]
[예!]
[내가 이놈을 상대하는 동안, 다른 마인을 상대하거라.]
[알겠습니다, 사조님.]
현종휘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무량은 청요귀의 하복부를 발로 차 냈다.
“나와 싸우자!”
“죽여, 주마.”
청요귀는 반쯤 실성한 듯한 목소리로 살기를 풀풀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