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 (5)
백무량은 심천검의 한숨을 한쪽 귀로 흘리며 등정로에 올랐다.
“어느덧 봄인가.”
앙상했던 나뭇가지에 새파란 새싹이 돋아났다.
백무량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현종휘를 비롯한 곤륜도 또한 저렇게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되살아나지 않았으면 지켜볼 수 없는 일이다.
그것에 어떤 이유가 있든 백무량에게 있어 행운이었다.
[아주 풍류를 즐기지 그러느냐?]
“제가 부러우신 겁니까?”
[흥, 선배를 놀려 먹으니 아주 즐거운 모양이구나.]
“하하, 설마요. 그것보다…….”
백무량은 심천검과 대화를 나누며 등정로를 빠르게 올랐다.
칠 년 전에는 제법 시간이 걸렸는데, 몸이 커지고 내공의 수위가 깊어지니 일다경도 채 걸리지 않았다.
쏴르르…….
정상에 이는 바람,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가지들.
지금 당장은 앙상하나 봄이 되고 여름이 되면 귓가를 싹 쓸어내리는 녹음이 되리라.
백무량은 그것을 잠시 올려다보다가 운검묘로 향했다.
수십 기의 무덤이 시야에 들어왔다. 백무량의 눈이 그것을 한참 동안 훑었다.
과거였다면 그저 보고 흘렸을 것을.
심천검과 함께하니 과거에 살았던 선배가 궁금해졌다.
이름은 외우고 있다지만 정작 어떤 생을 살았는지 모르고 있었다.
십삼 대 장문인 백연곡주, 이십삼 대 장문인 백노.
왠지 모르게 눈에 들어오는 이름이다.
백무량의 시야를 공유하는 심천검이 피식 웃었다.
[별호를 이름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야 당연히 백씨는 아니겠지요.’
자길 바보로 아느냐며, 가볍게 대꾸한 백무량의 걸음이 돌연 멈췄다.
“…….”
부자연스럽게 비어 있는 자리.
백무량은 그곳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미친 게 아니라면 분명, 사형 주백천이 묻혀 있던 자리였다.
대체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는지, 칠 년이 지난 지금도 알지 못했다.
그저 주백천이 남긴 안배와 편지를 따라다녔을 뿐이다.
심지어 이번 보타문에선 편지조차 없었다.
“살아 있다면 연통이라도 하나 남기는 것이 예의 아니오, 사형.”
백무량은 낮게 중얼거렸다.
되살아난 이후 긴 시간이 지났다.
새로운 인연이 맺어지고, 누군가와 친교를 다졌다.
많은 것이 자신의 품 안에 있었다.
그러나 그리움은 희석되지 않는다. 현재의 인연과는 별개로 과거 백무량을 기억하는 사람이 남아 있기를 바랐다.
하물며 그것이 사형 주백천이라면.
‘지금의 나를 본다면 어떻게 말했을까?’
무겁거나 어려운 이야기는 하지 않고, 신수가 훤해졌다는 둥 시답잖은 소릴 꺼냈을 터였다.
주백천은 그러한 사람이었다. 사람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고 편안하게 다가가길 좋아하는 성품이었다.
그런 사형이 자신에게 ‘천명’이니 ‘백선신검’이니 참으로 많은 짐을 주었다.
사형답지 않은 다급함과 절박함이 편지에 적혀 있었다.
그걸 생각하면 주백천이 어떻게 되었는가는 뻔하다.
필시 좋지 않은 상황이거나, 이미 마교에 의해서…….
[마음을 가라앉혀라.]
“나도 압니다.”
심천검의 말에 백무량은 허심탄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만나지 않은 이상 아무것도 모른다.
늘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도 사라져 버린 묘비와 봉분을 보면 마음이 멋대로 움직였다.
“저 말입니다.”
백무량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심천검에게 물었다.
“영웅담의 영웅처럼 보입니까?”
[영웅담?]
왜 갑자기 실없는 소리를 하냐는 듯, 심천검의 목소리가 저절로 높아졌다가 곧바로 차분해졌다.
기억까진 읽진 못해도 백무량이 품은 감정 정도는 공유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미 훌륭한 소영웅이지 않더냐.]
멸문에 가깝던 곤륜파를 재건하고, 마교와의 싸움에 있어 단 한 번도 주저하지 않은 무인.
지방의 호족이 우르르 호광성으로 향하는 가운데 백무량의 행보는 그야말로 파격적이었다.
그의 사제인 청운검협 현종휘의 성공적인 무림행 또한 소문에 살을 붙였다.
심천검은 그것을 말했으나, 정작 백무량이 고개를 내저었다.
“전 이미 실패하여 죽은 무인이었습니다.”
[…….]
평소답지 않은 음울함에 심천검이 침묵했다.
육신이 있었다면 백무량의 어깨를 흔들며 꾸짖었을 테지만, 영단에 머무른 이상 그럴 순 없었다.
단지 한마디를 얹을 뿐이다.
[나와는 달리, 너는 지금 살아 있지 않더냐.]
많은 뜻이 함축된 말에 백무량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심 예상했던 생각에 심천검이 쐐기를 박은 셈이었다.
“그랬군요. 역시, 선배님께서도 실패했던 겁니다.”
심천검이 장문인일 시절에 강호를 침범했던 칠성교.
그들이 아직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건 역시, 멸절하지 못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심천검은 무엇을 잃었을 것인가.
백무량은 그것까지 묻지는 않았다. 그저 비슷한 과거를 가진 곤륜도로서 존중했다.
그때 심천검이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내 때는 그러했지만, 다음 대에도 반복돼선 안 된다는 마음으로 무공을 남겼었다. 그래서 처음 널 봤을 때 마음이 좋지 않았다. 결국은, 또다시 반복되었고 무공마저 잃었으니까.]
“…….”
[어쩌면 그 생각이 나를 현세로 끌어당긴 게 아닌가 싶더구나. 나에게 새로운 구원이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저한테 무공을 가르치면서 말입니까?”
[뭐, 네 무재가 부족하지 않아서 다행이다만.]
심천검이 끌끌거리며 웃었다.
백무량은 그러지 못했다.
그저 가벼운 성격이겠거니 싶었던 심천검의 새로운 면이었다. 흉중에 저런 생각을 품고도 농을 던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백무량의 입술이 가늘게 열렸다.
“앞으로는 경청하겠습니다.”
[하면 지금까지는 귀때기에 들리지도 않았단 말이냐! 고약한 놈!]
심천검의 호통에 백무량은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그러다 순간, 몸을 뒤로 젖혔다.
원숙하기까지 한 철판교의 수법 위로 비도가 하나 스쳐 지나갔다.
“……누구냐!”
백무량의 뒤늦은 외침에 되돌아온 것은 또다시 비도.
두 발등을 노린 비도가 옆을 스쳤다.
재빨리 운중용형보를 펼치지 않았다면 그대로 땅과 함께 꿰였을 터였다.
급격히 치솟은 분노에 백무량이 주먹을 꽉 쥐었다.
“감히 운검묘에서 습격을 해 오다니, 당장 모습을 보여라!”
“보고 싶은 사람이 오는 것이 당연한 섭리이거늘…….”
마인의 느릿한 어조가 백무량의 성격에 불을 질렀다.
백무량은 하늘을 날듯이 검을 휘둘렀다.
허공에서 휘둘러진 검기에 마인의 눈이 커다랗게 일변했다.
“빠르……!”
서걱!
마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선신검이 목을 취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백무량은 피를 털어 내곤 운검묘 끄트머리에 섰다.
“이런……!”
안 좋은 예감은 항상 적중하기 마련.
백무량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저 멀리, 곤륜파에서 수많은 무인과 마인이 서로 다투고 있었다.
***
평소 나긋하던 동도의 목소리가 악에 찼다.
마인을 죽일 듯이 휘두르다가 정작 목숨을 빼앗을 순간 검을 멈췄다. 단지 그 이유로 곤륜도 하나가 죽었다.
현종휘는 마음이 얼음장처럼 얼어붙는 듯했다.
언젠가는 찾아올지도 모를 마교의 습격이 눈앞에 있었다.
‘침착해.’
검을 꽉 쥐었다. 태청신공의 맑은 기운이 굳으려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언젠가, 오리라 생각한 것에 왜 두려움을 품느냐!’
자신에게 채찍질을 하면서, 현종휘가 앞으로 걸었다.
한 걸음, 한 호흡에 펼치는 뇌전.
분광뇌운결이 마인의 등짝을 갈기갈기 찢었다.
옆에서 현 사형께서 등장하셨다며 사기를 북돋으려는 외침이 들렸다.
현종휘의 가슴이 묵직해졌다.
백무량이 자리를 비운 이상, 현종휘가 대사형을 대신하여 싸우는 것이 당연했다.
‘언제까지고, 등을 보진 않겠다고 생각했잖아.’
끝없이 자신을 다잡으며.
현종휘가 서늘한 눈빛을 드러냈다.
태청신공이 구름을 유형화하니, 색이 연한 청운이 마인을 향해 쇄도했다.
쩌억!
가슴팍을 얻어맞은 마인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이에 다른 마인들의 시선이 현종휘에게 향했다.
“청운검협이다!”
“저놈을 잡으면 곤륜신성을 포획하는 데 용이할 것이다!”
‘포획?’
현종휘가 속으로 웃었다.
저놈들 따위에게 백무량이 질 리가 없다.
마음속에 희망이 싹텄다.
잠시만 버티어 낸다면 백무량이 반드시 곤륜파를 구하러 오리라는 확신이 생겼다.
한편으로는 자기 생각에 오한이 들기도 했다.
‘버텨?’
어째서 자기 자신이 무찌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가.
현종휘는 그 생각에서 과거의 자신을 보았다.
코흘리개 시절, 무공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때 고수가 되겠다고 했던 과거.
저절로 이가 꽉 앙다물렸다.
백무량의 뒷모습을 항상 지켜보아선 안 됐다.
‘언젠가는 옆에 서겠다는 마음이었을 텐데.’
백무량의 무위에 의지하려는 생각부터 하다니.
자신을 꾸짖은 현종휘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다급한 마음과 주변에서 흐르는 피가 자신을 조급하게 만들었지만, 현종휘를 뒤흔들지는 못했다.
그야 당연하다.
현종휘가 목표로 하는 것은 구천검 백무량이자, 검해를 이은 절대 고수였으니까.
‘사조님이었다면 저런 놈들에게 패하지 않았을 거야.’
정신을 또렷하게 각인시킨 현종휘가 다시금 걸었다.
원숙하게 펼쳐진 운중용형보. 그러나 백무량의 방식과는 달랐다.
상대를 죽이기 위해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마인의 공격을 막고 곤륜도를 살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사형!”
“그럴 시간에 움직여!”
현종휘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에 곤륜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확인한 현종휘가 다른 곳으로 몸을 날렸다. 자연스럽게 이어진 분광검결이 마인의 팔을 날리고, 목을 취했다.
새하얗던 도복이 어느새 피로 물들었다.
“장문인을 챙기고 뒤로 빠져라!”
그 말에 철유가 불복하겠다는 듯 검을 슬쩍 들어 올렸다.
“제가 옆에서 보위하겠습니다!”
“자신 있느냐?”
“물론이지요. 누구 아래에서 지냈는데!”
“……큭.”
현종휘는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확실히, 백무량 아래에서 칠 년을 수련하면 평범한 사람도 기재가 되기 일쑤였다.
하면 자신은 어떠할까?
현종휘의 눈동자에 작지만 분명한 광망이 번뜩였다.
망설이던 마음을 버림으로써 개화한 재능.
그 재능의 조각이 칼날에서 뻗어 나왔다.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마인의 팔다리가 듬성듬성 잘렸다.
칠 년 동안 동고동락한 철유마저 경악할 정도였다.
“어느새……!”
“자신 있다고 하지 않았더냐!”
현종휘는 쉼 없이 마인을 베며 나아갔다.
검을 한 번씩 휘두를 때마다 심상이 분연히 일었다. 현종휘의 시야에 하나의 길이 보이는 듯했다.
백무량이 갈랐던 운해의 길.
그곳을 향해 현종휘가 맹진했다.
자소단 두 개로 인해 불어난 내공이 약동했다.
콰르르륵……!
현종휘가 자아낸 청운이 세차게 몰아쳤다. 검과 손목의 움직임에 따라 마인을 격살하고, 밀쳐 냈다.
그 때문에 피할 수 있었던 치명상이 어언 십수 개.
현종휘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저 재능이 속삭이는 대로 움직이고 분광뇌운결을 펼쳤다.
“크아악!”
백무량이 뇌창이라고 평했던 현종휘의 분광뇌운결 또한 검과 공명하듯이 윙윙거렸다.
가히 뇌검결(雷劍訣)이라 불러도 과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현종휘 홀로 삼 할의 마인을 상대하던 그때.
“곤륜파에서 조심할 건 곤륜신성밖에 없다고 하지 않았나?”
청색의 가면을 뒤집어쓴 거한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