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 (4)
일 보에서 이 보, 가만히 머무르다가 급격히 세차게.
백무량의 신형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아무렇게나 움직이는 듯하여도 발걸음에 운중용형보의 이치가 있었다.
단순히 담기만 했던 걸음에 화려함이 실린다.
안력이 뛰어나지 않으면 나아가는 방향조차 모를 보보가 수련장 전체를 누볐다.
그렇게 어느덧 시간이 흘러 정오.
“대사형인가? 그런데 저 보법은 뭐야?”
“걸음을 보면 운중용형보 같은데……?”
수련장 주변에 모여든 도사들의 웅성거림이 귓가를 스치나 백무량은 듣지 않았다. 아니, 듣지 못했다는 말이 옳으리라.
진정한 무인이라면 한 번씩 겪곤 하는 극에 이른 집중.
찰나를 잘게 쪼갠 듯한 부스러기.
그곳에서 보석을 주울지 쓰레기를 주울지 알지 못한다.
무의 신이라면 알겠지만, 애석하게도 친절하게 알려 줄 위인은 아니었다.
유일한 답이 있다면, 오직 하나.
[직접 부딪쳐 봐라.]
심천검이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백무량을 응원했다.
언뜻, 백무량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맺혔다.
스릉……!
백무량이 검을 뽑으니 날카로운 검명이 수련장 전체를 갈랐다.
웅성거림이 멎었다.
도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가운데, 백무량이 검을 가볍게 내리그었다.
적전제자는 그 검로를 알아보았다.
“창천명월!”
장인이 수백 번을 내리쳐서 만든 듯한 날카로움이 운해를 저몄다.
한순간에 불과했지만 길이 하나 열렸었다.
백무량은 그 길로 향해 뛰어들듯이 운중용형보를 펼쳤다.
걸음은 곧 나비처럼 우화하여, 운룡대팔식으로.
백무량의 발이 허공을 짓눌렀다.
콰르르!
도복의 앞자락이 찢어질 것처럼 펄럭거렸다.
인간의 몸으로 운해로 이루어진 벽과 맞부딪친 것 같아, 도사들의 눈이 커졌다.
심지어 백무량을 오래 지켜본 철유조차 마른침을 삼켰으나, 현종휘는 달랐다.
“……오르셨구나.”
현종휘의 나직한 중얼거림에 화답하듯.
백무량은 전신의 압력을 떨쳐 내고서 허공을 걸었다.
다섯 장 거리에 있는 운함석에 백무량의 발자국이 찍히고, 습기로 눌어붙어 있던 진흙이 사방으로 퍼졌다.
잔잔한 호수에 조약돌을 던진 것과 같은 파문이다.
[대팔식이되, 대팔식이 아니구나.]
심천검의 말에 백무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운룡대팔식은 여덟 호흡으로 나누어 펼치는 고등한 신법이었다. 곤륜파의 검법과 함께 펼친다면 천하에 적수가 없었다.
하지만 백무량이 변용한 대팔식은 달랐다.
저벅.
백무량이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디자 운해가 양옆으로 갈라졌다.
호흡은 조금도 쓰지 않은 채, 유유자적 걸었다.
“……허.”
“맙소사.”
어떤 도사는 감탄을 터트리기도 했고, 보보에 실린 현묘함을 보고 벽을 느끼기도 했다.
현종휘라고 다르지 않았다.
다만 눈으로 담았다. 언젠가 다다를 수 있도록.
그 시선을 알아차린 백무량이 걸음을 우뚝 멈췄다.
비단 현종휘 말고도 다른 제자들 또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보여 주어라. 네가 펼칠 수 있는 최대한의 무공을.]
심천검이 진지한 목소리로 조언했다.
[그것이 바로 대사형으로서 보여야 할 모범이다.]
그 말에 백무량은 검을 다잡았다.
심천검의 조언 정도로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이곳에 모여든 제자뿐만 아니라, 후대까지 볼 수 있도록.
백무량의 눈이 청색으로 물들었다. 태청신공이 대성에 가까워지면서 생긴 기이한 현상이었다.
뒤이어 운룡대팔식을 펼쳐 앞으로 크게 내디뎠다.
어느 때보다 무거운 걸음에 커다란 굉음이 하늘을 때렸다.
꽈과광!
곤륜도 모두가 눈을 찡그리는 가운데, 현종휘만이 유일하게 목도했다.
운해를 일점에 집중시킨 일검.
구천화우검의 팔초, 변천승운(變天乘雲)이 먼 곳에 있는 절벽을 종잇장처럼 찢는 광경을.
‘그것만이 아니야.’
변천승운이란 본디 곤륜파 무공의 총화가 담긴 일검이다.
하지만 백무량이 펼친 변천승운은 운해가 일으키는 파도마다 다른 초식을 품고 있었다.
공동파의 경(經)이 담긴 셈이다.
어디 그뿐이랴?
절벽에 새겨진 검흔(劍痕)은 화산파처럼 사방팔방으로 찢는 형상이고, 그 중심에 보타문의 단단함이 있었다.
그 일격에도 절벽이 무너지지 않은 것은 오로지 백무량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눈에 담았느냐?]
백무량이 보낸 전음에 현종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쿠궁, 쿠구궁…….
항상 운해가 끼어 있던 곤륜산맥의 절벽.
그곳에 새겨진 백무량의 검흔은 안력을 돋우지 않아도 쉬이 볼 수 있었다.
“구름이 범접하질 못하는구나.”
한 도사의 중얼거림에 다른 곤륜도 또한 마른 입술을 핥았다.
“구천화우검이 극에 이르면 운해를 가른다더니……!”
전설로만 치부했던 일화를 목도한 곤륜도의 눈빛에 이채가 감돌았다.
‘나도 수련한다면 언젠가는…….’
‘대사형처럼 될 수 있지 않을까?’
백무량의 일검이 곤륜파 도사의 이정표가 되는 순간이었다.
***
강호에 혼란이 일었다.
산서성을 시작으로 칠성교의 마인들이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그들의 기치는 예나 지금이나 같았다.
평등.
처음에는 부자의 재산을 빼앗아 사람에게 나누어 줬던 것이, 이제는 목숨을 빼앗는 것으로 화했다.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인 양.
칠성교도의 말은 교묘하게 사람들을 이끌었다.
그 때문에 호광성엔 날이면 날마다 마차가 들어섰다.
“여기라면 안전하겠지…….”
“무림맹과 무당파, 소림사가 가깝지 않나. 가산을 전부 털긴 했지만, 안전을 위해서라면…….”
호광성의 빈집이 모두 채워졌다.
안전을 위한 이주가 점점 잦아지고, 변방의 권문세가라고 불리는 것들이 단체로 와서는 혈맹을 자처했다.
“골치가 아프군.”
무림맹주 남궁진은 탁자 위에 쌓인 전서들을 노려보았다.
그 시선이 마치 원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칠성교가 무서워서 온 도망친 주제에 짖어 대는 꼴이 가관이야. 본 맹한테 맞을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 건가?”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냐는 듯, 남궁진의 시선이 제갈후와 모용청에게 향했다.
이에 제갈후가 온건한 답을 내놓았다.
“그들이 지금 이러는 것도 도망치듯 떠났기에 버려진 권위를 되찾기 위한 책략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맹주님께 저런 서한을 보낸 건 자기 위치를 보전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자리를 만들어 주어야지요.”
제갈후가 벽면에 있는 지도로 시선을 던졌다.
“청룡대를 비롯한 무림맹의 세력이 하루가 멀다고 마교와 격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들에겐 명예를 회복할 좋을 장소지요.”
“그것이 전부인가?”
남궁진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책략인 데다, 무림맹에게 짖어 댄 대가를 치르게 하기엔 부족했다.
그때 모용청이 입을 열었다.
“제가 일군사의 말에 한마디를 거들어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게.”
“지금 저들은 무림맹이 있음에도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려는 것입니다. 칠성교 말고도 백련교가 있는데도 그런 꼴을 보이니, 명분 또한 무림맹이 가지고 있지요.”
“음.”
마음에 든다는 듯 남궁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진의 눈치를 살핀 모용청이 하려던 말을 계속했다.
“따라서 그들을 정당한 명분으로 흩뜨리되, 무림맹의 영향력이 미치는 문파를 돕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을 오히려 역으로 이용하자는 것이군.”
“그렇습니다.”
호광성에서 추한 꼴을 보이고 있기는 하나, 변방의 권문세가로서 군림했던 것은 사실.
하나하나의 전력은 부족하지만 모아 두면 마교와의 싸움에서 도움이 될 건 필연이다. 그러니 기를 꺾어 두고 중용하는 것이 옳았다.
모용청의 설명을 듣던 남궁진이 씨익 웃었다.
“그렇다면 호광성과 가장 먼 곳이 괜찮겠군. 본가에 연락하기도 어렵게 말이야.”
“……곤륜파 말씀입니까?”
“그래, 그곳이라면 권문세가랍시고 어깨를 으쓱거리자마자 혼을 내 줄 테니 말이야.”
남궁진은 절강성에서 만났던 백무량을 떠올렸다.
무림맹주를 독대했음에도 당당하던 모습은 호걸에 가까웠고, 성격 또한 괄괄했다.
하물며 곤륜파의 위치는 어떠하던가?
강호의 숱한 도가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처음 가면 숨 한 번 제대로 쉬기가 어려울 터였다.
‘거기가 딱 기를 꺾어 놓기에 좋지.’
곤륜파와 무림맹의 상부상조.
무림맹은 골치 아픈 놈들을 교육해서 좋고, 곤륜파는 더욱 힘을 기를 수 있다.
‘게다가 곤륜신성, 그놈. 다른 문파의 무학을 견식하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니…….’
변방의 권문세가에는 고유한 무공이 존재하기 마련.
백무량에게도 좋은 기회가 되리라고, 남궁진은 머릿속으로 주판을 때렸다.
***
“잠시 아미파에 다녀오려고 한다.”
백무량의 말에 현씨 조손이 입술을 어물거렸다.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하산하느냐고, 여러 말들이 입안에서 메아리치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본 백무량은 품에서 혁낭을 꺼냈다.
“단순히 무공을 교류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보타문주님의 부탁이 있었다.”
“보타문……!”
현노윤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보타문이라면 누구나 궁금해하는 신비 문파였다.
그걸 보니 백무량은 내심 속이 쓰렸다.
‘생각해 보니 내가 어디로 간다고 말조차 하지 않았구나.’
아무리 항렬이 높다고 한들 현노윤이 장문인이거늘, 너무 마음대로 움직인 게 아닐까?
백무량이 잠시 반성하던 차에 현종휘가 물었다.
“하면 아까 보여 주신 대팔식에 담긴 것 중 하나가 보타문의 것이었나요?”
“그럼. 뛰어난 무학이었지.”
현종휘가 대단하다는 눈빛을 보내자, 심천검이 부리나케 우쭐거렸다.
[그걸 엮어 낸 선배가 바로 나지.]
‘……이럴 땐 좀 가만히 계십시오. 대화 중이잖습니까.’
백무량은 심천검의 목소리를 반쯤 흘리며 현종휘에게 구결을 불러 주었다.
긴 시간 번뇌했지만 정립하고 나니 생각보다 짧았다.
현종휘가 구결을 곱씹는 동안, 한 가지를 주의시켰다.
“모두 이해하기 전에는 펼쳐선 안 된다.”
“왜요?”
“구결로선 짧게 설명할 수 있지만, 세 문파의 무학이 뒤섞인 무공이다. 하나라도 허투루 펼쳤다가는 균형이 깨져서 몸에 큰 무리가 갈 거야.”
자칫 잘못하면 힘줄이 찢어질지도 모른다.
백무량의 위협에 현종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데 그 눈빛에는 여전히 감탄이 맺혀 있었다.
“그럼 사조님께선 그 무학을 온전히 이해했단 거네요.”
“……음?”
“서로 다른 세 무학을 섞어서 원숙하게 익혔을 정도니까요!”
“아, 그건, 크흠. 음.”
보타문에서 팔 대 장문인인 심천검과 만났고, 현재 영단에 기거하고 계시다. 그분이 도움을 주셨다.
그걸 진심으로 말했다가는 현종휘에게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몰랐다.
[그럼 거짓으로 말할 게냐?]
‘선배께선 저 말고 다른 사람과 대화가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갈! 그렇다고 너 혼자 잘했다고 말할 생각이더냐!]
‘하지만 결정은 제가 하지 않았습니까?’
백무량과 심천검이 대화하는 사이, 현노윤이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다 사조님께서 가진 재능 덕분 아니겠느냐. 곤륜파의 홍복인 게지.”
“아, 역시!”
현종휘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백무량은 그걸 굳이 부정하고 싶진 않았다.
심천검이 도움을 주긴 했지만, 어쨌든 서로 다른 무학을 곤륜파의 무공으로 정립한 건 자신이었으니까.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더니만, 허.]
심천검의 한탄이 백무량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백무량은 속으로 웃음을 참으며 대꾸했다.
‘하산하기 전에 제가 조사전에 절이라도 올리겠습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꼬.]
심천검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