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143화 (143/275)

발전 (4)

참으로 가당치 않은 위협이다.

유성한의 시선은 남궁진에게 있어 토끼가 이빨을 드러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의외라면 백무량을 위해서 분노를 드러냈다는 점이다.

남궁진은 피식 웃고는 백무량에게 유성한에 관해 물었다.

“저 아이와 만난 지는 얼마나 되었나?”

“겨우 사나흘 정도밖에 안 됐습니다.”

“사나흘이라.”

사람의 인연에 시간은 중요치 않다지만 유성한이 백무량에게 보이는 감정은 얕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보니 기이한 사람은 오히려 백무량이었다.

“사나흘 만에 아이를 자기편으로 사로잡은 비결이 뭔가?”

“편은 무슨.”

왜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백무량이 핀잔을 던졌다.

“앞선 선배로서, 그리고 곤륜도로서 모범을 보였을 뿐입니다. 그걸 본 후배는 자연스레 뒤따라오는 법 아니겠습니까?”

“지극히 정론이군.”

남궁진은 씁쓸한 감정을 속으로 삼켰다.

정의를 좇는 도사처럼 고루한 대답이었기에 부러웠다.

‘남궁세가 또한 그러했다면 좋았을 것을.’

만일 남궁세가가 정론대로 흘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남궁진은 속마음을 애써 숨긴 채 앞서 걸어갔다. 백무량을 위해 미리 잡아 놓은 숙소가 코앞에 있었다.

그러면서 넌지시, 아무것도 아닌 척 물었다.

“중간에 만금상단에 들렀다는 말을 들었네만.”

“역시 그쪽을 묻기 위해 오신 겁니까?”

“왜 서운하게 그런 말을 하는가? 그저 겸사겸사, 자네 얼굴을 보는 게 주목적이지.”

남궁진의 목소리엔 평소 같은 위압감이 없었다. 백무량의 경지나 위치를 내심 인정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하지만 백무량은 그런 것을 알면서도 신경 쓰지 않았다.

“혼자였다면 밤을 새워 가며 말씀드렸겠지만, 지금은 어린 동행이 있습니다.”

“하면 무용담은 어떤가?”

“……무용담이라니요?”

자기를 낭인처럼 보는 것이냐며, 백무량이 눈을 흘기자 남궁진이 천연덕스럽게 받아쳤다.

“어린 후배에게 자기가 어떤 선배인지 금칠할 좋은 기회일세.”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백무량에게 남궁진은 자신의 패를 과감하게 드러냈다.

권위를 중요시하는 남궁진답게 금으로 도금된 무림맹주패.

그 휘황함에 눈을 사납게 뜨던 유성한도 끔뻑거릴 수밖에 없었다.

“와아……!”

유성한의 순수한 감탄에 남궁진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남은 것은 백무량에 대한 설득이었다.

“무림맹주가 직접 자네 무용담을 듣기 위해 여기까지 왔네. 숙소와 밥까지 떡하니 차려 놓았는데, 이야깃값으론 충분하지 않나?”

그 말에 백무량이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백무량의 손가락 사이로 비치는 고단함과 짜증.

남궁진은 순간 한쪽 입술을 씰룩거렸다.

‘내 앞에선 강호십대고수도 저런 모습은 보이지 않거늘.’

불쾌하다거나 짜증이 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백무량처럼 행동거지에 거침이 없는 후배는 참으로 신선하긴 했다.

단지 그것만이 남궁진의 흥미를 끈 것은 아니었다.

“맹주님, 여기까지 오신 이유가 만금상단에서 충분한 설명을 듣지 못해서입니까, 아니면 저에게 추가로 듣고 싶은 게 있어서입니까?”

“…….”

남궁진은 말없이 빙긋 웃었다.

바로 저것이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침착함.

무림맹주가 눈앞에서 입술을 씰룩거리든 저자세를 취하든 백무량은 상황을 차분하게 보려고 애썼다.

그것이 남궁진에게 있어 가장 흥미로운 점이었다.

백무량을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온 이유이기도 했다.

“만금상단이 왜 무림맹에 숨기려고 하겠는가? 설명은 충분히 들었네.”

“저에게 무언가를 물으러 온 게 아니군요.”

남궁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무량의 표정이 몹쓸 말을 들었다는 듯 구겨졌다.

그걸 보니 저도 모르게 물어보고 싶어졌다.

“내가 무슨 말을 꺼낼지 알겠나?”

“저를 청룡대에 포섭하려는 게 아닙니까?”

“허.”

남궁진은 숨을 훅 내뱉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확실히, 청룡대는 마교의 은거지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백무량이 돕는다면 엄청난 힘이 될 터였다.

하지만 그러자고 여기까지 찾아온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칠 년 동안 쌓인 백무량의 명성은 청룡대주보다 더욱 높아져 있었다.

“겨우 그런 말을 꺼내자고 여기까지 왔겠는가?”

“하면……?”

“곤륜파 장문인께 전해 주게.”

남궁진의 음색이 진지해졌다.

“무림맹과 조금 더 밀접해졌으면 한다고 말일세.”

“……!”

백무량의 눈가가 좁혀졌다.

그걸 본 남궁진은 여유로운 미소를 보였다.

“곤륜산으로 돌아가는 동안 자네도 진지하게 고민해 주길 바라네. 숙소는 저쪽일세.”

백무량은 남궁진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낡은 건물이었지만, 안쪽에서는 고소한 냄새가 은은하게 풍기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인상이 찡그려졌다.

“떠들썩하게 행동하진 않았겠지요?”

그 말에 남궁진이 미리 준비한 답을 내놓았다.

“최근 칠성교가 기승을 부리는데 어찌 그럴 수 있겠나. 조용히, 마차 하나 없이 움직였지.”

“……다행입니다.”

“이번에는 내가 묻지.”

남궁진의 표정이 짓궂어졌다.

“보타암에 들른 적은 없나?”

‘이미 알고 있는 건가?’

백무량은 참으로 악취미라는 생각을 품은 채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적은 없습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알고 있겠네.”

암묵적으로 동의해 주겠다는 듯, 남궁진이 눈웃음쳤다.

백무량은 그것을 본체만체하며 숙소로 향했다.

이에 작은 불만을 느낀 심천검이 한마디를 툭 던졌다.

[언젠가는 부딪칠 사람처럼 느껴지는구나.]

‘저러다 한 번쯤 저한테 제대로 혼날 겁니다.’

백무량이 피식 웃었다.

***

다음 날 아침.

맑게 갠 하늘이 백무량의 얼굴을 비추었다.

보타암에서 했던 고생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이, 얼굴이 올라온 기름기로 반질반질했다.

이 모두가 남궁진이 준비한 것 덕분이었다.

‘너무 속 보이는 짓이었습니다, 맹주님.’

백무량은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상쾌한 바람을 맞이했다.

숙소는 안락했고, 식사는 만금상단 못지않게 뛰어났다.

백무량이라는 무인에게 보이는 성의(誠意).

그것을 위해 남궁진이 투자했을 금액과 사람이 가늠조차 되지 않는 하룻밤이었다.

물론, 백무량은 한 시진도 안 되어서 잊기로 했다.

‘내가 곤륜파의 행사에 영향력이 크다는 걸 깨달은 모양인데.’

남궁진은 두 가지를 착각하고 있었다.

백무량이라는 도사는 백련교의 난 이래로 의심병이 도진 상태였으며, 만금상단이라는 뒷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사실, 이런 대접이 백무량에게 있어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조원양에게 부탁하면 이것보다 두세 배는 더 좋은 곳에서 지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거절하지 않은 것은 역시…….

[하는 짓이 저래도 맹주라는 게냐?]

‘뭐, 그렇지요.’

백무량은 어깨를 으쓱였다.

앞으로 남궁진과 얼마나 마주칠지도 모르고, 최대한 호감을 유지하는 쪽이 좋았다.

그런 것치고는 꽤 선을 넘나들고 있지만 개의치 않았다. 도리어 가만히 있으면 남궁진이 자신을 써먹을 수 있는 패로 여길 가능성이 컸다.

백무량에게 있어 문제는 사실 남궁진이 아니었다.

‘선배.’

보타문의 영기를 빨아들인 영단 안에 갇힌 심천검.

유성한을 이용해 이런저런 실험을 해 봤지만, 아무래도 심천검과 대화할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백무량으로선 조금은 두렵고 어처구니없는 일.

하지만 정작 심천검의 태도는 무덤덤했다.

[네가 되살아난 것과 비슷한 이유이지 않겠느냐?]

‘예상이 가는 게 있으십니까?’

[글쎄다.]

평소에는 남에게 독설을 퍼부으면서, 중요할 때는 도사 같은 말을 하니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백무량이 한숨을 푹 내쉬자 심천검이 낄낄거리는 소리를 냈다.

[다 때가 오면 알 수 있지 않겠느냐. 곤륜도가 되어서 성급하게 굴어선 안 되느니라.]

‘예, 예, 그렇겠지요.’

백무량은 심천검의 말을 한쪽으로 흘리며 유성한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드르륵.

언제부터 일어난 건지, 미리 채비를 마친 유성한이 정좌한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부님, 기침하셨습니까?”

억지로 어른스럽게 꾸며낸 듯한 목소리.

백무량의 눈꼬리가 둥글게 휘었다.

유성한은 현종휘처럼 정직하진 않지만 나름대로 웃긴 면이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해 봐야, 내가 무슨 반응을 할까?”

“에이, 그래도 이른 아침부터 준비했는데 고생했다는 말 정도는 괜찮잖아요.”

“고생? 고생은 앞으로 곤륜산으로 되돌아가는 동안 실컷 할 텐데……?”

“으엑.”

백무량의 말에 유성한은 온갖 투정을 부리며 약한 척을 해 댔다.

“제가 몸이 약합니다, 사부님.”

“요즘 뼈마디가 쑤십니다.”

“섬에 오래 있어서 그런지 육지를 걸으면 머리가 어지러워요.”

유성한이 수십 마디를 마구잡이로 쏟아 냈지만, 결국은 마차를 타자는 말로 귀결되었다.

참으로 웃긴 소리가 아닌가?

뼈마디가 쑤시고 육지가 어색하다는 놈이 마차를 타고 가면 말짱해질 것 같다는 것이.

백무량은 유성한의 등짝을 약하게 때렸다.

“요놈, 꾀를 쓰려거든 유익한 곳에 쓰거라.”

“제 몸이 편해지는 게 유익하지 않으면 뭐가 유익한 겁니까?”

“보타문에서 불가의 가르침을 받았을 터인데…… 너를 짊어질 말의 고생은 생각하지도 않느냐?”

“제가 말은 아니잖아요.”

“말의 뜻을 꺾을 수는 있지.”

“……사부님도 편하게 가실 수 있잖아요.”

유성한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백무량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아직 유성한의 육체가 여물지 않았으니, 길이 험하지 않은 한 마차를 타고 갈 생각이기는 했다.

단지 놀려 먹고 싶을 뿐.

그 생각을 읽은 심천검이 껄껄 웃으며 농을 던졌다.

[누굴 닮았는지 참으로 배배 꼬였구나.]

‘옆에 계시잖습니까.’

[너……!]

‘실질적으로 대화를 제대로 나눈 건 하루 이틀 정도인데, 선배께서 한 말들을 잘 떠올려 보십시오.’

백무량의 핀잔에 심천검은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별로 좋은 소리를 한 적은 없었다. 백무량을 골리거나 백무량과 만난 사람에 대해 악평을 날린 게 대부분이었다.

심천검이 볼멘소리를 흘렸다.

[그리도 부덕한 선배를 꾸짖고 싶었냐?]

‘잘 아셔서 다행입니다.’

[…….]

심천검이 침묵에 빠진 동안 백무량은 유성한에게 말했다.

“슬슬 가자꾸나.”

“맹주님께 인사도 않고요?”

“우리한테 대접한 것만으로 만족하실 거다. 그리고 원래 손님은 조용히 빠져나가는 게 좋은 법이지.”

“……그런가요?”

유성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님보다는 도둑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하늘과 같은 백무량이 하는 말이었기에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백무량은 짓궂게 웃으며 유성한을 채근했다.

“짐은 다 챙겼겠지?”

“예!”

“사문에 가면 너를 도와줄 사형이나 사백, 사숙이 많을 거야.”

그 말에 유성한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보타문에 있는 목락윤과 여승을 떠올린 듯했다.

백무량의 오른손이 유성한의 어깨로 향했다.

“걱정하지 마라. 다들 좋은 도사들이니까.”

정확하게는 지난 사 년 동안, 백무량이 좋은 도사가 되게끔 손을 본 것이지만.

그것을 모르는 유성한은 그저 환하게 웃을 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