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139화 (139/275)

도원 (3)

영단의 기세가 마치 모든 영기를 빨아들이려는 것 같았다. 심천검이 들고 있는 들꽃마저도 제 색을 잃어가고 있었다.

무시할 수가 없다.

심천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영단으로 향했다.

“도대체 무슨 영단이기에……!”

가히 무한에 가까운 영기를 제 몸으로 담는단 말인가.

심천검의 평정이 깨졌다. 이대로라면 백무량에게 제대로 된 가르침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버릴지도 몰랐다.

그러니, 조금 더 빠르게.

백무량과 심천검의 일격이 교차했다.

콰앙!

커다란 굉음이 터지자 들꽃의 꽃잎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갔다.

그야말로 격류였다.

태청신공과 태청신공, 선인과 후학의 격렬한 부딪침.

“오호라!”

흥이 오른 심천검이 히죽 웃었다.

순식간에 펼쳐지는 아홉 갈래의 검로가 백무량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셋은 허초, 다섯은 변초, 하나는 살기를 담은 일검이라.

백무량은 그 검이 창천명월임을 깨닫고 놀람을 삼켰다.

‘그저 베기만이 전부가 아니었단 말인가?’

창천투(蒼天透).

심천검이 말년에 창안한 초식을 앞에 두고서 백무량은 흥분을 가라앉히려 했다.

하지만 그게 쉽지는 않았다.

‘과거, 마교에 의해 유실된 무학이 눈앞에 있다.’

그것도 초식을 창안한 팔 대 장문인 심천검이 직접 펼치는 초식이라니!

백무량은 청운으로 창천투의 검로를 읽었다.

심천검과 뿌리가 같기에 가능한 기예였다.

“……하!”

웃음을 터트린 백무량이 백선신검을 강하게 쥐었다.

창천투는 분명 생소한 초식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가르침은 새롭지 않았다.

그야, 백무량도 가지고 있었으니까.

백무량의 얼굴에 긴 호선이 그려졌다.

“형식은 다르나, 원류가 같은 초식이 저에게도 있습니다.”

구천화우검의 삼초, 호천풍연에서 이어지는 변초.

백무량은 오른손을 털듯이 꺾었다. 백선신검의 칼날이 뒤틀리면서 기류가 달라졌다.

하지만 충천하는 기세만큼은 달라지지 않으니.

“천간투(天干透).”

가히 용권풍을 떠올리게 하는 청운의 폭풍이 창천투를 향해 쇄도했다.

쿠콰쾅!

꽃잎이 일제히 휘날린다.

백무량과 심천검을 중심으로 거대한 파문이 일어난 것처럼 평원이 들썩였다.

‘……윽.’

백무량은 입술을 비틀었다. 잠깐이었지만 손목에서 부자연스러운 소리가 울렸다.

그것을 알아차린 심천검이 껄껄 웃었다. 지저분하게 기른 수염이 흔들렸다.

“몸이 그래서야 어디에다가 쓰겠나?”

심천검이 잠깐 입을 연 순간.

백무량의 눈에 이채가 일었다. 찰나 동안 운중용형보의 세 초식이 허공을 짓밟고, 흐르고, 머물렀다.

심상치 않은 기세를 느낀 심천검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처음 검을 마주했을 때 제자리에서 서 있던 걸 생각하면, 극적인 변화였다.

“허, 녀석!”

몇 대일지도 모를, 까마득한 사조가 입을 여는데 급습이라니?

심천검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심술궂은 아이에게 매를 들듯이, 심천검의 우수가 좌에서 우로 장절하게 휘둘러졌다.

쩌적!

먼 옛날에 유실된 무공, 개벽수(開闢手)가 손가락 끝에서 펼쳐졌다.

허공이 심천검의 심기에 따라 뭉개지고 붙기를 반복했다.

백무량의 호흡을 흩뜨리는 것뿐만 아니라, 간격이 뒤흔들렸다.

그럼에도 백무량의 얼굴은 고요했다. 심천검이 자아내는 폭풍의 변화 속에서도 그저 침착할 뿐이었다.

단순한 허세인가, 아니면 역공의 전조인가?

심천검은 그것이 궁금했다.

애당초 백무량이 자신과 맞설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여겼다.

그렇기에, 순수하게 오만했다.

“놈!”

외마디 외침과 함께 심천검이 좌수를 내질렀다.

고사에서 나오는 부처의 일 장이 이러했을까?

위에서 아래로 벌레를 내리치듯이, 천벽장(穿壁掌)이 대기를 찌그러트렸다. 백무량의 청운이 한순간 짓눌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서겅’ 하는 소리가 평원 위로 붕 떠올랐다.

“……!”

백무량이 펼친 염천일원, 구천화우검의 일 검이 천벽장의 힘을 비틀었다.

옆으로 꺾인 장력이 평원 한쪽을 깎아 냈다.

카르륵……!

땅이 거칠게 깎여 나가는 소리 사이에 수백 개에 이르는 들꽃이 끼어든다.

백무량과 심천검의 시야에 들꽃이 가득해졌다.

평범한 검사였다면 들꽃이 땅에 가라앉기까지 기다렸을 터였다. 그것이 상식이었다.

단지, 두 검사의 경지가 벽을 부쉈을 뿐이다.

“하!”

후학의 경지가 상상 이상이라는 것이 즐거워서, 심천검이 기껍다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에 비해 백무량은 어떠한가.

“……큭.”

점차 아려 오는 손목, 비명을 내지르는 것 같은 근육.

백무량의 입가에서 미약한 신음이 흘렀다.

‘염천일원으로는 힘의 방향을 꺾는 것이 고작, 분광검은 미세하게 내가 앞서지만 그게 전부라면.’

분광검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것이 당연하다. 상대의 부족함을 파고드는 것이 무인의 본능이니까.

하지만 이 자리는 후학이 선인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자리이지 않나.

백무량은 고개를 작게 털었다.

‘고난과 고통이 앞에 있을지라도 뛰어드는 것이 곤륜의 정신.’

정신을 새롭게 무장한 백무량은 강한 기세를 떨쳤다. 바닥에 가라앉은 들꽃이 작게 흔들릴 정도였다.

심천검의 입가가 크게 벌어졌다.

“역시! 검해가 선택한 놈답구나!”

개벽수와 천벽장 같은 권장법을 펼치던 심천검이 드디어 진지한 표정으로 우수에 쥐고 있던 들꽃을 펼쳤다.

빈손이 된 심천검은 아무런 검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후배, 백무량은 나의 검을 받아라!”

심천검의 외침에 백무량은 두 손으로 백선신검을 쥐었다.

그것을 본 심천검이 오른손에 태청신공을 집중하여, 무형의 검을 쥐니.

처음에는 균천관일.

균천(鈞天), 하늘의 한가운데 달린 해를 찌르듯이(貫日).

쩌적!

상궤를 넘어선 빠르기가 백무량의 상반신을 향해 내질러진다.

백무량은 한쪽 눈을 찌푸리며 검로를 가늠했다. 청운 또한 균천관일을 감싸듯이 움직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시도일 뿐.

파앙!

백무량의 도복이 꿰뚫렸다.

오른쪽 아래, 백무량의 뱃가죽 옆을 스친 균천관일이 등 뒤에 있는 모든 것을 쓸어 담았다.

심지어 영기로 이루어진 들꽃조차 사라져 있다.

‘이게 무슨……!’

백무량의 뺨에 식은땀이 맺혔다.

심천검이 진정으로 죽이고자 했다면 그대로 배가 꿰뚫렸을 터였다.

그걸 본 심천검이 엄한 표정으로 손주를 다그치듯이.

“무얼 하느냐!”

백무량에게 큰 소리로 외치며 무형의 검을 쥐었다.

백무량은 심천검과 시선을 마주하며 호흡을 골랐다.

‘다르구나.’

심천검이 펼치는 균천관일은 그저 형(形)과 힘에 집착하던 백무량의 것과 달랐다.

정녕 자신의 검으로 해를 꿰뚫을 듯이 휘둘렀다.

어찌 보면 맹신(盲信)에 가까웠다.

인간의 검으로 하늘과 해를 꿰뚫겠다니, 그런 오만함을 진정으로 믿고서 휘두르는 무인이 어디 있겠나.

저잣거리의 애송이도 바보 같다며 웃을 이야기다.

하지만 백무량의 눈앞에 그것을 보여 준 도사가 있었다.

“나도 가능해.”

백무량은 한마디를 툭 중얼거리며 백선신검을 쥐었다.

그에게 보여 줄 초식은 명약관화하다.

“균천관일!”

백무량의 일 검이 앞으로 쏘아졌다.

그 낱말로밖에 설명되지 않는 검로가 심천검에게로 향했다.

“호……!”

가벼운 감탄성을 흘린 심천검이 제자리에서 검을 휘둘렀다.

언뜻 보면 여유롭게 보이지만, 일 검에 담긴 정교함에 사뭇 놀라고 있었다.

청운.

백무량의 태청신공은 청운으로 화하여 심상을 그리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심천검처럼 하나의 화폭(畫幅)을 검으로 그리기 위해 수천, 만 번을 반복할 필요가 없었다.

실로 엄청난 재능이었다.

심천검이 생전에 바라던 재능이 백무량에게 있었다.

“과분한 것을 쥐고 있구나!”

심천검은 질투가 날 것만 같은 마음을 꾹 움켜쥐고서, 창천명월을 펼쳤다.

백무량의 균천관일을 베고서 앞으로 움직였다.

그 움직임은 아주 간소했다.

백무량이 운중용형보를 동시에 펼친다면 심천검은 하나만을 우직하게 수련한 검사였다.

“……!”

한쪽 눈살을 찌푸린 백무량이 발걸음을 옆으로 내디뎠다.

상반신을 거의 눕듯이 해서 검을 피하고, 역으로 창천명월을 펼쳐서 공격했다.

그런 공방이 어언 수십 초째.

백무량은 입에서 단내가 나는 것조차 모른 채 심천검과 수십 합을 교환했다.

심천검와 검을 나누면 나눌수록 개안하는 기분이었다.

태청신공이라는 같은 뿌리 아래.

심천검이 펼치는 초식 하나하나가 곤륜의 것이었다. 눈으로 새기고 앞으로 노력한다면 백무량도 펼칠 수 있었다.

‘이것이 사형의 안배인 걸까?’

백무량은 까닭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걸 본 심천검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가 그리 즐거우냐!”

“홍복이잖습니까! 선배께 검을 지도받을 수 있다는 것이요!”

“그놈, 잘 아는구나!”

어깨를 으쓱인 심천검이 자유로이 검을 휘둘렀다.

그 속에 담긴 곤륜의 검은 백무량이 미처 알지 못했던 구천화우검의 후반초에 대한 깨달음이 녹아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영단은 끊임없이 영기를 흡수하여 부피가 커져 있었다.

꽈지직.

그 영단이 목함을 부수기에 이르렀을 때, 심천검이 검을 회수하고 백무량에게 물었다.

“한데 저것은 무엇이더냐?”

그 말에 백무량이 고개를 돌렸다. 영단의 모습에 눈이 번쩍 뜨였다.

‘언제 저렇게 커진 거지?’

영기를 흡수하는 영단이겠거니 하고 넘겼건만, 끊임없이 흡수하고 있는 모습이 심상치가 않다.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저, 저건…… 받은 것입니다.”

“받다니?”

“어떤 상인이 담보로 받은 물건이라는데…… 사기라고 들었습니다.”

“영기를 흡수하는 영단이 사기일 리가 없지 않느냐?”

의아한 표정을 지은 심천검이 영단을 매만지던 그때.

쏴아악!

심천검의 형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

깜짝 놀란 백무량이 영단으로 서둘러 다가갔지만, 심천검의 기척은 도저히 느껴지지 않았다.

“선배! 어디 계십니까!”

[여기다.]

백무량은 설마 하는 마음에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영기를 한참 동안 흡수하던 영단.

그곳에서 낮지만 분명하게, 심천검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

백무량과 심천검이 한창 비무를 이어 가던 그때.

보타문의 여승들이 해안가에서 상대편을 노려보고 있었다.

각양각색의 가면.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괴한 기운.

상대를 훑은 목락윤이 앞으로 나섰다.

“그대들이 바로 칠성교인가요?”

“……잘 아는군.”

철현(鐵絃)을 쇠톱으로 긁는 듯한 소음.

청색의 가면을 뒤집어쓴 남자가 마인들 사이에서 뛰쳐나왔다.

“네가 보타문주인가……?”

“당장 나가시지요!”

“우리 용무만 마친다면 조용히 떠나지…… 어떤가?”

가면을 고쳐 쓴 남자가 해안가 너머, 보타문이 있는 장소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유씨 성을 가진 아이를 넘겨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피를 보아야겠느냐……?”

“마인을 보고 물러설 수는 없지요.”

애초에 보낼 생각이 없었다는 듯, 목락윤이 내공을 일으키자 남자가 불쾌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거 좋군…… 우리도 여승을 보면 가만히 두진 않거든.”

그 말에 마인들이 일제히 웃어 젖혔다.

목락윤의 표정이 저절로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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