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원 (2)
시야를 가득 채우는 들꽃, 태청신공과 어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선기와 영기.
이상적인 색감을 품고 있는 하늘이라.
불가해한 광경에 백무량은 고개를 뒤로 돌렸다.
행낭 안에서 흔들리고 있는 목함의 존재감은 나중으로 미뤘다.
지금 당장은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절벽이 없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해안의 절벽과 마주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 과거가 무색하게도, 백무량은 들꽃으로 가득한 평원에 있었다.
기이한 일이다.
‘환술 같은 게 아니라면 이곳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백무량은 깊게 호흡했다. 태청신공이 유형화한 청운이 평원 곳곳을 훑고, 하늘로 향했다.
저항감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백무량이 한쪽 입술을 비틀었다.
‘이게 대체 무슨…….’
마땅히 허공에 있어야 할 기운.
요컨대 자연기라고 불리는 것이 없었다.
들꽃과 하늘, 그 위에서 내리쬐는 태양조차 청운을 밀어 내지 않았다.
엄청난 선기와 영기를 품은 채, 그저 그 자리에서만 존재했다.
백무량은 하나의 단어를 떠올렸다.
정지(停止).
영기와 선기를 품은 자연은 정지해 있었다.
백무량의 시선이 들꽃의 이파리로 향했다.
“흔들리지 않는구나.”
대기가 있다면 마땅히 바람이 있어야 하지 않던가? 그것이 섭리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 공간에 바람은 없었다. 자연기와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았다.
백무량이 제자리에서 쪼그려 앉았다. 들꽃의 줄기를 두 손가락으로 붙잡았다.
꾸우욱……!
힘을 주어 눌러 본다. 장정의 손목을 쉬이 비틀어 버릴 정도의 힘이었다.
‘이게 평범하진 않은 것 같은데.’
들꽃은 꺾이지 않았다. 제 몸으로 품고 있는 영기와 선기로 저항했다.
단순히 강도로만 따지자면 한철과 버금간다.
백무량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평범하지 않은 곳이었다.
‘불가(佛家)의 성지로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아.’
제자리에서 일어난 백무량은 행낭의 매듭을 풀었다.
그 안에 든 목함을 두 손으로 잡으니, 진동이 더더욱 커졌다.
쿠궁, 쿠구궁!
안쪽에 있는 영단이 나무를 세차게 두들기는 듯했다.
마치 깨어난 병아리가 알의 껍데기를 쪼는 것처럼.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상왕은 분명 사기를 당한 물품이라고 했는데.’
조원양이 의원에게 수차례 확인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가 그렇게 말했다면 천하의 모두가 그렇게 말할 것이다. 조원양의 말에는 그러한 무게가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어난 변화는 조원양도 알지 못했을 터였다.
백무량은 태청신공을 운용했다.
뒤이어 목함을 한 손으로 꽉 잡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것 봐라?”
언제 시끄러웠냐는 듯 고요해진 목함.
백무량의 입가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어디 한번 보자.”
백무량은 목함의 위쪽을 수도로 도려냈다.
그러자 안쪽에 있던 영단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 모습이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이럴 수가!”
백무량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본래 황색이었던 영단이 금색으로 바뀌어 있었고, 청량했던 향기가 더욱더 강해져서는 가히 폭력적이었다.
무심코 맡다가는 코가 짓이겨질 것 같을 정도로 강한 향이라.
백무량의 오른손이 영단을 붙잡았다.
“……왜 두들겼나 했더니만.”
크기로 치자면 겨우 완자 하나 정도에 불과한 영단.
그 안에 태청신단보다도 훨씬 큰 영기가 들어차 있었다. 정확하게는 지금도 커지고 있었다.
백무량의 시선이 평원으로 향했다.
아예 정지하고 있던 들꽃들이 좌우로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없었던 바람이 부느냐? 그건 아니었다.
제 몸으로 품고 있던 영기와 선기가 천천히 영단을 향해서 흐르고 있었다.
백무량은 그것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누구십니까?”
“…….”
상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백무량은 두 눈으로 신색을 훑었다.
얼굴 전체를 가린 죽립, 먼지가 잔뜩 눌어붙은 도복.
문파를 알아보기에는 복식이 너무나도 해졌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게 있는 법이다.
“곤륜도인가?”
상대에게서 은연히 느껴지는 선연(善緣).
백무량은 자신의 감각을 신뢰하는 편이었다. 무엇보다 이런 성지에서 만났다면 사형과 관련이 있을 터였다.
답은 간단했다.
조원양의 목숨을 구하고, 보타문에 자취를 남긴 도사.
자신의 사형인 주백천과 관련이 있을 남자이리라.
백무량의 목소리에 확신이 깃들자, 죽립을 쓴 도사가 입을 열었다.
“허.”
어딘가 웃음기가 섞인 듯한 첫마디다.
백무량은 급한 성질이 올라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사형과 친분이 있다면 척을 지고 싶지 않았으니까.
“고명(高名)을 여쭈고 싶습니다.”
“고명? 고명이라…….”
죽립을 쓴 도사가 백무량의 말꼬리를 붙잡았다. 첫마디에 보였던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
백무량은 불쾌함을 느꼈다. 이런 말꼬리 잡기나 하자고 찾아온 보타문이 아니었다.
“말씀해 주시지요.”
“뭐, 여기까지 왔으니 칭찬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어딘가에서 들어 본 목소리인데.’
백무량의 미간이 좁혀졌다.
“여기까지 잘도 왔다! 처음 만났을 땐 수십 년은 걸릴 줄 알았는데 말이야!”
백무량이 참으로 기특하다는 듯, 껄껄 웃은 도사가 죽립을 벗어 던졌다.
그 과정을 백무량은 아주 천천히 훔쳐볼 수 있었다.
삐뚤어진 수염, 고집스럽게 닫힌 입술, 부리부리한 눈.
백무량의 눈동자가 커졌다.
오랫동안 마주하지 못했기에 내심 잊고 있었던 남자였다.
무엇보다, 이런 곳에서 마주할 것이라고 예상도 하지 못했다.
“그래, 사 년의 시간은 어떠하였느냐?”
칠 년 전, 검해에서 처음 마주했던 이래로 위기에 빠지거나 의문이 생기면 그걸 풀어 주었던 심상 속 도사.
심천의 노인.
그가 육신을 가진 채 자신과 마주하고 있었다.
백무량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쉬이 버리지는 않았지요.”
“그걸 어찌 네가 확신한단 말이냐?”
심천의 노인이 히죽 웃었다. 장난기를 담은 듯했지만, 눈빛 어디엔가 서늘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 시선부터 강호십대고수와 다르다. 호승심이나 살기 따위가 아니라, 서너 개의 벽 너머에서 바라보는 것 같다.
백무량은 움츠러들려는 어깨를 당당하게 폈다.
“노야야말로 긴장하셔야 할 겁니다. 여기 있는 후배는 곤륜파의 진전을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발전시켰으니 말입니다.”
“하하하!”
하늘을 향해 웃어 젖힌 노인이 주먹을 꽉 쥐었다.
“오만하다! 오만하도다! 검해를 이은 네가 그렇게 말해 주지 않으면, 곤란할 따름이지.”
백무량은 백선신검을 쥐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검해에서 후학에게 가르침을 내리던 노인과 가르침을 받던 백무량이 만났는데 어찌 검 없이 이야기만 한단 말인가.
“성질 한번 급하도다.”
노인이 혀를 가볍게 차더니 씩 웃었다.
그걸 본 백무량은 태청신공을 전력으로 운용했다.
노인의 정체를 모르던 사 년 전과는 달리, 지금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곤륜파의 팔 대 장문인, 심천검.
백선신검의 원래 주인이자 그 당시 활개 치던 마를 벤 절대고수.
백무량은 옛 전인을 상대로 검을 들었다.
노인, 심천검이 기껍다는 표정을 지으며 화두를 던졌다.
“처음에는 분광뇌운결이 어떻겠느냐?”
“아둔한 후배는 분광검밖에 알지 못합니다.”
백무량의 대답에 심천검이 혀를 찼다.
“고얀 놈, 전에 가르치지 않았더냐?”
“지금은 분광검이지요.”
“내가 익힌 분광뇌운결이 뛰어난지, 네가 정립한 분광검이 뛰어난지 대보자는 뜻이렷다?”
백무량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금모도왕 남천에겐 느끼지 못했던 호승심이 가슴속 가득히 차올랐다.
그것을 알아차린 심천검이 피식 웃고는 들꽃 하나를 꺾었다.
영단에 의해 기운을 빼앗기고 있는 들꽃이라지만, 백무량을 상대로 쓰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오너라.”
심천검의 호령에 백무량이 땅을 박찼다.
들꽃들이 이리저리 꺾여 나갔다. 청운이 세상을 분연히 제 색으로 채우는 것 또한 한순간이었다.
실로, 좋다.
심천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겨우 칠 년, 소년이 청년으로 장성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그동안 수련을 한다고 한들 마를 벨 경지까지 오르지 못하리라고 여겼다.
하지만 자기 앞에 있는 백무량은 어떠한가?
파츠즉!
분광뇌운결이 담긴 분광검의 이초, 일섬운월.
위에서 아래로 가르는 일 검이 심천검의 정수리를 향해 내질러졌다.
그 일격을 본 심천검이 들꽃을 가볍게 휘두르자.
쩌엉!
들꽃이 백선신검의 칼날을 멈췄다.
분광뇌운결의 뇌기는 심천검의 존재만으로 바스러졌다.
“이것뿐이라면 당치 않다.”
심천검이 한쪽 입술을 비틀었다. 그의 기습적인 발길질이 백무량의 기해혈을 노렸다.
아니, 그 안에 담긴 수는 족히 다섯이 넘는다.
백무량은 하, 웃음소리를 터트리며 청운에 뇌기를 담았다.
‘분광검이 세분화한 검격이라면, 분광뇌운결은 정제되지 않은 기운.’
분광뇌운결을 분광검에 녹였다고 한들, 분광뇌운결 자체에 담긴 의의는 잊지 않는다.
백무량이 의념으로 청운을 휘두르자 심천검은 발길질을 회수했다.
“이놈!”
분광뇌운결을 모른다더니, 아주 잘 써먹지 않느냐며.
심천검의 짜증 섞인 호통에 백무량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어린 후배의 장난을 용서하시지요.”
“흥……!”
심천검의 인상이 찡그러졌다.
백무량의 분광뇌운결은 마치 뇌운을 휘두르는 제석천을 떠올리게 했다. 마를 물리치기에는 아주 강력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괴력난신을 밀어 내기에는 부족하다.
하물며 이번의 마는 심천검이 상대했던 적보다 강대하다.
심천검이 오른손에 든 들꽃이 가볍게 휘돌았다.
콰르르르!
분광뇌운결이 담긴 돌풍이 백무량을 향해 내리쳤다.
이에 백무량 또한 자신만의 초식을 펼쳤다.
뇌화(雷花).
백련교 좌호법 이화겸을 무력화시켰던 초식이 돌풍과 부딪쳤다.
남들이 보기에는 단순한 힘 싸움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달랐다.
양옆으로 퍼지려는 뇌운과 그것을 붙잡은 채 꿰뚫으려는 돌풍.
그 기운의 싸움이 매 순간마다 방향성을 달리했다.
백무량의 옆얼굴에 식은땀이 저절로 흘렀다.
그에 비해 심천검은 흐뭇할 뿐이었다.
“분광뇌운결은 이만하면 충분하군.”
“……!”
돌풍을 단숨에 없애 버린 심천검이 뇌화와 직접 마주했다.
그야말로 아찔한 순간이었지만, 심천검의 손에 들린 들꽃이 움직이면서 뇌운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들꽃의 움직임은 백무량이 익히 아는 그것이되, 달랐다.
‘저게 호천풍연이란 말인가?’
백무량도 나름대로 비류폭이나 광풍첩, 천간투와 같은 변초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심천검이 펼치는 호천풍연은 궤가 달랐다.
어떠한 전조 없이 펼쳐지는 검경.
주자령이 말했던 이상적인 운검이 눈앞에 있었다.
“어떠하더냐?”
심천검의 목소리가 낮지만 분명하게 울렸다.
“한번 마주해 보지 않겠느냐?”
그 말은 잠시 굳어 있던 백무량의 정신을 바로 세우기에 충분했다.
“물론이지요!”
“하, 기세 하나는 여전히 좋구나!”
두 도사가 단숨에 땅을 박차고, 검과 들꽃을 마주했다.
그 와중에도 백무량이 가지고 온 영단은 끊임없이 영기를 삼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