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5)
무공에는 남다른 두각을 드러냈지만, 도학은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던 백무량이다.
그런 그가 저 아이를 도사로 만들어야 한다니?
‘사형이 그걸 모를 리가 없잖아.’
백무량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을 더듬었다.
“설, 설마요.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지요. 도사님이 말씀하셨을 때는 보타암에 천무검성의 후인이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백무량이 입술을 달싹이려던 찰나에 유성한이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저도 저런 아저씨한테 배우고 싶진 않네요!”
“애야, 말하는 중이잖냐.”
백무량은 자기도 모르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유성한이 몸을 움찔거리더니, 한쪽 입술을 깨물고 어깨를 비틀었다.
“아……아무튼 싫어요!”
등을 돌린 유성한이 빠르게 달아났다.
백무량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상처가 많은 아이군요.”
“불가의 가르침으로 다스리려고 해 봤지만, 속에 품은 살기가 사라지진 않더군요.”
비구니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타고난 기질 또한 살성에 가까운지라, 무공을 가르치기가 어려웠습니다.”
“저한테는 무공을 배운 것처럼 말하던데요?”
“간단한 호신술만 가르쳤지요. 무심코 가르쳤다가는…… 무공에 휘둘릴 것 같았으니까요.”
그 말에 백무량의 표정이 굳었다.
살성을 타고난 무인이 어떤 말로를 맞이하는지, 아주 오래전에 목도한 적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절실하다고 해서 없던 능력이 생겨나지는 않는 법이다.
백무량은 낮은 목소리로 자신의 부족함을 뇌까렸다.
“저는 무공이 뛰어난 무인이지, 도학을 배운 학자는 아닙니다. 도학을 가르치려거든 저보다 더 좋은 사람이 있을 겁니다.”
“인연이라고 하지요. 저는 그것을 백 소협에게서 보았습니다.”
비구니가 백무량에게 두 손을 모아 올렸다.
그 모습을 본 여승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새된 소리를 낼 뻔한 것을 겨우 참는 듯했다.
‘역시,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구나.’
백무량은 비구니의 신분이 생각보다 더 높음을 직감했다.
어쩌면 보타암의 문주 혹은 전대 검후일지도 모른다.
백무량의 눈에 이채가 일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역시……!”
비구니의 얼굴에 화색이 묻어났다.
그걸 본 백무량은 조심스럽게 한 가지를 덧붙였다.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죠?”
“그건…….”
여승들의 눈치를 살핀 백무량이 비구니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
깜짝 놀랐다는 듯, 백무량을 곁눈질하던 비구니가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렇게 하지요.”
“감사합니다.”
“소협께서 알다시피, 상처가 많은 아이입니다.”
비구니의 얼굴에는 자애로운 온기가 가득했다.
“부디 도학에서 답을 찾을 수 있게끔 도와주세요.”
“예, 반드시 그래야지요.”
백무량은 유성한이 달아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가 났다.
***
첨벙!
유성한이 비스듬히 집어 던진 돌멩이가 바다 표면을 두어 번 치고는 아래로 삼켜졌다.
그것만으로 손목이 아픈 건지, 자조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하, 하흐…….”
그마저도 속에서 끓어오를 뿐, 바깥으로 터트리지는 못했다.
유성한의 웃음소리는 어딘가 흐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백무량은 그것을 멀리서 지켜보다가, 천천히 다가갔다.
‘어떻게 해야 할까?’
솔직히,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입담이라고 해 봐야 남을 비웃거나 도발하는 정도에 불과하고, 설법처럼 남을 깨우쳐 줄 재주는 없었다.
하물며 도학?
그것이 싫어서 도망쳤던 게 바로 구천검 백무량 아닌가.
백무량의 머릿속에 온갖 잡념이 떠올랐다.
차라리 보타암의 여승과 싸워서 자격을 얻는 것이라면 흔쾌히 응했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바로 그때, 멀리 서 있던 유성한이 말을 걸어왔다.
“아저씨도 모르겠죠?”
“난 아저씨가 아니…….”
“어쩔 땐 차라리 그냥 뒈졌으면 좋겠어요.”
유성한의 음울한 혼잣말에 백무량이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애가…….’
한창 청운의 꿈에 부풀 나이가 아니던가?
한데 유성한의 눈동자에는 천지를 분간하지 않으려는 망연함과 흐린 시선만이 담겨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백무량은 저렇게 음울했던 적이 없었으니까.
억지로 이해하는 척을 해 봐야 적의만 살 뿐이라 여겨, 한숨을 내쉬려던 그때였다.
‘아, 있기는 있었네.’
까마득한 과거.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옛날, 재가 되어 버린 집터를 바라보던 아이.
그 아이를 주자령은 어떻게 달랬던가?
백무량은 옛 기억을 더듬었다.
별 소득은 없었다.
‘너무 옛날 일이잖아.’
뒷머리를 긁적인 백무량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 너를 아끼니까 가만히 두지 못하는 거 아니겠느냐.”
유성한이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모두가 저를 아끼진 않죠.”
“그게 무슨 말이야?”
“다들 저한테 천무검성인지 뭔지를 보니까요.”
그 말에 백무량은 조금 전에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비구니가 천무검성의 후인이라고 말했을 때, 인상을 찡그리던 유성한의 모습.
‘그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그저 왜소하고, 성질 나쁜 아이라고 생각했었지.’
그 생각은 천무검성의 후인이라는 말에 바뀌었다.
무언가 재능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특별한 출생답게 제법 괄괄하단 생각으로, 백무량의 표정이 굳었다.
“……그래, 나도 그렇게 보긴 했지.”
“아저씨는 그래도 솔직하네요. 다들 아니라고 하면서 저한테 눈치를 줬거든요.”
천무검성의 후인이라면 당연히 검에 재능을 가지고 있으리란 기대.
백무량의 시선이 유성한의 손등으로 향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얻어맞은 것처럼 보이는 상처가 듬성듬성하게 나 있었다.
백무량은 입술을 비틀었다.
“내가 가서 혼내 줄까?”
“됐어요. 앞으로 볼 일도 없는 사람들이니까.”
그렇게 말하던 유성한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근데 도사 맞아요? 가서 혼내 준다는 말은 뭐예요?”
“도사라고 그냥 다 용서할 줄 알아? 나처럼 속 좁은 놈도 있기 마련이지.”
“하하하.”
유성한이 보인 웃음에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흐뭇해졌다.
“이제야 자기 나이처럼 보이는구만.”
“왜요? 체구가 너무 작아서요?”
“세상 다 산 노인네처럼 흐물흐물한 눈이었잖아.”
“…….”
유성한이 잠시 침묵했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입술을 어물거리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그걸 본 백무량은 유성한의 어깨에 한 손을 얹었다.
“내가 너한테 뭘 들으려고 한 말은 아니야.”
“예?”
“너한테 한량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나도 그렇게 밝게 살진 못했거든.”
어린 시절 잃은 가족.
쉽사리 적응하지 못했던 곤륜파에서의 생활.
백무량의 삶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어두운 일면들이다. 어둡고 축축하다지만 부정할 순 없었다.
“그저 그러려니, 그런 일이 있었거니, 그렇게 넘겼지.”
백무량은 유성한의 왜소한 어깨를 툭 두드렸다.
“내가 뭐가 대단하다고 너한테 뭘 가르치려고 들겠어. 그냥, 딱 그거야. 옛날에 불운하고 어려웠다고 앞으로 사는 것까지 포기하면 안 된다 그거지.”
“하지만…….”
“그걸 위해서 보타문의 비구니들이 도와주는 거 아니겠어?”
그 말에 유성한이 주먹을 꽉 쥐었다.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쉽사리 사라지질 않아요.”
“뭐가?”
“원수들이 저한테 이런 짓을 해 놨거든요.”
스윽.
유성한이 옷깃을 걷어 오른쪽 어깨를 보여 주었다.
그곳에 일곱 개의 검은 반점이 새겨져 있었다.
백무량의 얼굴이 저절로 굳어졌다.
‘목덜미가 아니라 어깨라니?’
칠성교가 주술을 실수했다기엔 너무나도 희망적이다.
백무량은 심각한 표정으로 반점을 살폈다. 반점에 손을 가져가니 운룡의 문양이 기이한 빛을 발했다.
“네 살기와 귀기가 이것 때문이었구나.”
“……예.”
유성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이 어째 매우 익숙해 보였다.
“보타문의 여승님들께서 봐주고 계시지만 사라지진 않았어요.”
“어쩌다가 여기로 온 거야?”
“그건 천운이었죠.”
유성한은 과거사를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칠성교에 의해 어딘가로 끌려가다가, 보타문주에 의해 구출된 것이 삼 년 전이라고.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딘가로 끌려갔다고 함은 이 근방이라는 소리인데, 강소성이 아니었을까?’
조원양이 받은 서한이 강소성에서 보내지지 않았던가.
아직은 확실하지 않기에 백무량은 속으로 추측을 갈무리했다.
그 대신, 내심 품고 있었던 궁금증을 드러냈다.
“그나저나 아까 왜 내 검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던 거야?”
백무량은 백선신검 옆에 묶어 둔 천예검을 가리켰다.
솔직하게 말해서 깜짝 놀랐었다.
동자료를 얻어맞았는데도 일다경도 안 되어서 깨어나질 않나, 천예검의 칼집까지 매만지다니.
백무량의 집요한 시선에 유성한이 말을 더듬었다.
“그건 나도 모르겠어요. 그냥, 그냥 손이 갔어요.”
“그냥 손이 가? 단것을 본 아이처럼 말하는구나.”
“정말! 진짜로!”
유성한은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불쑥 들이밀었다.
그 모습을 본 백무량이 턱을 매만졌다.
‘천무검성의 후인이라서 그런 건가?’
천예검은 과거 천무검성 유성백이 썼던 애검.
특별한 인연이 이어지듯이, 유성한에게 무언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백무량은 천예검을 묶어 두었던 매듭을 풀었다.
“자.”
“이, 이게 뭐예요?”
“네가 만지작거린 거, 한번 자세하게 보라고.”
그 말에 유성한이 조심스럽게 천예검을 받아 들었다.
어딘가 조심스럽고, 경건해 보였다.
“이거 뽑아 봐도 되죠?”
“베이지 않게 조심해.”
“예!”
빨갛게 상기된 유성한의 얼굴.
천예검을 슬쩍 뽑고 넣는 모습이 참으로 방정맞았다.
‘역시 애는 애네. 진검은 처음 만져 보는 건가?’
백무량은 속으로 피식 웃으며 깍지 낀 손으로 뒷머리를 주물렀다.
일단은 유성한을 지켜보면서 어떻게 살기와 귀기를 없앨지 고민해 볼 생각이었다.
그럴 참이었는데.
스르릉!
천예검을 힘껏 뽑아낸 유성한이 갑자기 기수식을 취했다.
백무량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무공을 배우지 않은 애가 어떻게?’
하물며 눈이 반쯤 돌아간 듯했다.
깍지를 푼 백무량은 곧바로 두 손을 교차했다.
쩌엉!
기수식에서 이어진 살초가 백무량의 살갗을 긁었다.
태청신공이 와공의 단계에 이르지 않았다면 손쉽게 막아 내지 못했을 일격이었다.
백무량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유성한!”
“…….”
백무량의 외침에도 유성한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다음 초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마저도 정상은 아니었다.
‘자기 몸에 걸맞지 않은 힘을……!’
유성한의 몸 곳곳에 올라오기 시작한 피멍.
백무량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만난 지 하루도 안 돼서 두 번이나 기절시키게 생겼구나.”
“……주.”
무언가를 작게 중얼거리는 유성한의 입가에서 피거품이 흘렀다.
‘더는 좌시할 수 없겠어.’
백무량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극에 이른 운중용형보는 유성한의 이목을 속이기에 충분했다.
쩌억!
백무량의 일격을 얻어맞은 유성한이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제야 왜 그랬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살기와 귀기를 만들어 내는 게 다가 아니었구나.”
유성한의 오른쪽 어깨에 새겨진 반점.
그것들이 천예검의 예기를 흡수하면서 덩치를 키우고 있었다.
‘그뿐이라면 다행일 텐데.’
어째서일까?
백무량은 유성한이 펼쳤던 살초에서 불안한 명운을 느꼈다.
최대한 빨리 해결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