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4)
“노야의 뜻이 그러하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다만…… 금원보와 영약은 곤륜파에 보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백무량의 말에 조원양은 그 이유를 짐작했다.
“짐이 많아서?”
“예, 무엇보다, 제가 절강성으로 가는데 칠성교가 보냈던 전서가 강소성에서 오지 않았습니까?”
“과연.”
조원양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백무량이 향할 절강성은 강소성 바로 아래.
길을 걷다가 무심코 칠성교도와 마주칠 수 있는 위치이니, 눈에 띌 만한 짐은 두고 가는 게 옳았다.
“좋은 판단일세. 그래도 여비로 은원보 하나쯤은 가져가는 게 옳지 않겠나?”
“주시면 감사히 받지요.”
백무량이 히죽 웃자, 조원양이 한쪽 입술을 씰룩였다.
왠지 모르게 백무량의 표정에서 남천이 보인 탓이다.
“그치랑 닮으면 좋지 않은데 말이야…….”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신경 쓰지 말게, 나이가 드니 혼잣말이 잦아지는구먼.”
고개를 가볍게 내저은 조원양이 백무량의 앞길을 축원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라네. 어딜 가고,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나, 봄의 소로(小路)처럼 따스하고 부드러운 여정이길 바라네.”
“상왕께서 주신 건 송 노야의 칠 년보다 더욱더 값집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백무량이 던진 농담에 조원양이 호탕한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옛 악우의 똥 씹은 표정이 저절로 떠오른 탓이었다.
“꼭, 꼭 전해 주게!”
“예!”
백무량은 조원양의 배웅을 뒤로하고 동쪽을 향해 걸어갔다.
절강성에 있는 보타암.
그곳에 남아 있을 사형의 안배를 향해서…….
***
“그날, 만금상단에 출입한 명부와 낙매신검의 행적을 조사하도록.”
“예.”
괴성의 말에 백상이 은영보를 펼쳐 사라졌다.
그들을 말없이 지켜보는 청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조원양을 납치하는 데 실패할 줄이야.’
이곳으로 데려올 수만 있다면 조원양을 수족으로 부릴 수 있었거늘.
청노는 오른손으로 턱을 괴며 괴성을 쏘아보았다.
“무조건 가능하다고 하지 않았나?”
“나로서도 의문이다. 삼존 중 둘을 보냈는데 실패한다는 건 대적자가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니까.”
무덤덤한 목소리 안쪽에서 분노가 피어오르고 있다.
괴성의 상태를 알아차린 청노가 한숨을 내쉬었다.
“대적자는 낙매신검이 아니던가? 그때 화산파에 있었던 곤륜신성은 아직 두문불출하고 있고 말이야.”
“그렇지. 금모도왕 혼자서는 요현과 백상의 협공을 이기지 못할 텐데 말이야. 하물며 백상이 말하지 않았나, 천면호가 가면 바깥으로 부상했다고.”
“백상이 어떻게든 알아 오지 않겠나.”
괴성을 말로써 달랜 청노는 다음 화제로 이야기를 돌렸다.
“조원양은 이제 됐고, 다른 놈을 노리는 게 어떤가?”
“다른 놈이라면……?”
“천무검성의 후인 말일세. 비구니들이 꽁꽁 싸매고 있는 그놈.”
“아, 그놈 말인가.”
괴성이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본 교에 입교시키기엔 아주 좋은 재목이지.”
“백련교주가 도주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이상, 대비책으로 써먹을 수 있을 걸세. 대의를 이루기 전까지 말이야.”
청노의 말에 괴성이 껄껄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조금씩 엷어지고, 어려졌다.
과한 분노로 잃어버렸던 주도권이 차츰 ‘가면’으로 돌아오는 듯했다.
“언제로 하면 좋을까?”
“백상이 조사를 마치고 나면, 그때도 늦지 않을 것이야.”
괴성과 청노의 눈이 가늘어졌다.
요현을 죽인 무인.
그놈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일이 쉽게 풀릴 거라는 예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불운했다.
“명부는 어떻게 됐나?”
“상왕께서 복구하라고 하셨지만…… 꼴이 이래서야.”
잡부들이 무너진 건물을 정리하다가 완전히 재가 된 출입명부를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된 이유는 단 하나.
“내가 미안하다니까! 거기에 불씨가 있을 줄 내가 어찌 알았겠나?”
일을 도와주겠다며 나선 금모도왕 남천 때문이었다.
***
보름 하고도 몇 시진 뒤.
백무량은 보타암이 있는 섬에 도착했다.
“여기 있소.”
“다음에도 좋은 인연으로 마주하길 바랍니다!”
백무량에게 은원보 조각을 건네받은 뱃사공이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왜 저러는지 대충은 알 것 같았다.
‘외인의 방문을 좋아하진 않으니까.’
대놓고 내쫓지는 않지만, 나갈 것을 권고한다.
백무량은 방긋방긋 웃으며 자신에게 선식(禪食)을 건네던 비구니들을 떠올렸다.
그때의 맛은 대단히 끔찍했다.
“삼시 세끼를 그걸로 채워야 한다니…….”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 벌써 손끝이 저리고 속이 쓰리다.
백무량은 인상을 찌푸리며 앞으로 걸었다. 해안가에서 벗어나면 금방 비구니와 마주칠 터였다.
바로 그때.
“누구냐!”
바위 뒤쪽의 기척을 느낀 백무량이 단호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그러자 아이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러는 너는 누구냐! 네가 먼저 밝혀라!”
저 맹랑한 대답을 듣자니, 백무량은 역지사지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사부가 이런 마음이었을까?’
백무량이 딱 저 나이였을 때.
주자령에게 저런 식으로 말하곤 했으니까.
헛웃음을 머금은 백무량이 아이의 신색을 훑었다.
왼쪽 눈과 뺨에 새겨진 상처, 총기라곤 없는 눈동자.
무언가 사연이 있으리란 생각이 불쑥 들었다.
“나는 곤륜의 백무량이라고 한다. 어른들은 어디 계시니?”
“그걸 내가 어떻게 믿지?”
아이가 팔짱을 끼고서 되물으니, 백무량도 눈을 끔뻑일 수밖에 없었다.
“내 도복에 곤륜파의 표식이 보이지 않느냐?”
“난 표식이라는 것도 모른다!”
“허, 생떼를 써도 유분수지.”
백무량의 중얼거림에 아이가 어깨를 쫙 펴고 외쳤다.
“갈!”
‘……갈?’
자기가 무슨 노승도 아니고 왜 사자후를 따라 한단 말인가?
백무량은 실소를 연신 터트렸다.
그러자 아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나를 비웃은 걸 후회하게 해 주지!”
“어떻게?”
“당연히 무공으로!”
자신감과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대답에 백무량이 귀를 의심했다.
‘애초에 보타암에 아이가 있다는 것도 이상했는데, 뭐 이런…….’
현종휘가 예의와 선함으로 똘똘 뭉쳤다면, 저 아이는 너무나도 공격적이었다.
당장 지금만 하더라도.
스으윽.
해안가의 모래를 밀어 내면서 마보세를 취하고 있었으니까.
백무량으로선 아이가 가소롭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됐고, 보타암으로 안내해 주겠니?”
“흥!”
코웃음을 친 아이가 모래를 박찼다.
무공을 배운 움직임은 아니었지만, 타고난 용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살기!’
아이가 두 눈에서 발한 살기는 진득하고, 깊었다. 사람을 한둘이 아니라 수십은 죽여야 가능한 눈빛이었다.
겨우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애가 담을 것이 아니다.
‘칠성교도인가?’
기괴망측한 마공을 가진 그들이라면 저렇게 어린 외견으로 위장할 수 있을 터.
백무량은 태청신공을 운용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아이와의 거리는 이제 세 걸음.
그저 내지르기만 하면 끝나는 순간에, 백무량이 쥐었던 주먹을 풀었다.
쩌억!
눈꼬리 옆에 있는 요혈, 동자료.
그곳을 얻어맞은 아이가 제자리에서 풀썩 쓰러졌다.
“마인이라면 이 정도 공격은 받아쳤겠지.”
백무량은 속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품은 채 아이를 한쪽 어깨에 둘러업었다.
한편으로는 의아하기도 했다.
‘보타암에 왜 이런 아이가 있는 걸까?’
그것도 웬만한 마인보다도 진득한 살기를 품은 아이라니.
백무량이 걸음을 재촉하던 그때, 보타암 쪽에서 한 줄기 전음이 들려왔다.
[누구십니까?]
“나는 곤륜신성 백무량이라고 합니다! 중간에 아이를 만나서 데리고 가는 길입니다!”
[데리고 가다니요?]
전음에서 느껴지는 의아함에 백무량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뭐, 그게, 사소한 오해가 있어서 재워 놓긴 했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암자 안쪽에서 나이가 지긋한 비구니가 나타났다.
“아이고!”
아이고, 이를 어째, 세상에, 어쩌다가.
이런 말들을 반복하던 비구니가 백무량을 샐쭉한 눈으로 곁눈질했다.
“어떤 아이인지는 알고 있으나, 너무 심하지 않았나요?”
“살기가 너무 짙어서 저도 모르게 그만.”
“소협 같은 고수라면 이 아이가 무공을 배우지 않았다는 걸 알았을 텐데요!”
비구니의 말에 백무량은 억울하단 목소리로 호소했다.
“요즘 같은 때에 어린아이로 위장한 칠성교도일 줄 누가 압니까? 게다가 제가 먼저 공격당했습니다!”
“보타암이 자리한 이 섬에 칠성교가 어찌 들어올 수 있겠어요? 그리고 소협은 아이의 공격이 두려우신가 보죠?”
“아니, 허 참.”
비구니가 계속해서 말을 쏘아붙이자, 백무량의 얼굴에도 짜증이 일었다.
“이 아이가 누구이기에 이렇게 편을 드시는 겁니까?”
“천무검성 유성백의 후인이에요.”
비구니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소협께서 말한 칠성교가 이 아이를 노리고 있지요.”
‘어딘가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사연이 있을 줄이야!’
깜짝 놀란 백무량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한데 뜻밖의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이건…… 뭐지?”
어깨에 축 늘어져 있어야 할 아이가 천예검의 칼집을 매만지고 있는 게 아닌가!
백무량은 아이를 어깨에서 내려놓으며 비구니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무래도 이 아이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야겠습니다.”
그 말에 아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잠깐. 난 아이가 아니야. 유성한(柳聖汗)이라는 이름이 있다고.”
끝까지 말대꾸하는 모습에 백무량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척 보기에도 애잖느냐.”
“겉모습은 이래도 열다섯이야.”
‘열다섯?’
아무리 봐도 열 살 남짓한 체형이 아니던가.
백무량은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비구니에게 물었다.
“진짜입니까?”
“예, 성한이 말한 그대로입니다.”
비구니의 말에 백무량은 낭패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형의 안배를 취하고 빠르게 곤륜파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예기치 않은 일에 말려든 기분이었다.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본 비구니가 복잡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소협께선 다른 목적으로 방문하신 모양이군요.”
“그게…… 몇십 년 전에 보타암에 방문한 도사가 남긴 자취를 찾고자 왔습니다.”
“방문이라, 흔치 않은 일이지요.”
비구니가 내력을 운용하자 수십 명의 여승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하나가 모두 일류 이상.
백무량은 그녀들의 모습을 보고는 무덤덤한 음색으로 물었다.
“저를 막으시려는 겁니까?”
“아니요. 그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비구니의 말에 모습을 드러낸 여승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백무량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보타암이 어디던가!
예로부터 검후를 배출해 온 강호의 신비 문파이자, 소림사 못지않은 강자들이 머무는 곳.
그들이 한쪽 무릎을 꿇은 이상 평범한 일은 아닐 터였다.
백무량의 음색에 저절로 긴장감이 스몄다.
“무슨 부탁입니까?”
“뭍에서 들려오는 소문은 저희도 늘 듣고 있습니다. 백 소협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지요.”
비구니가 부드럽게 웃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세차게 쏘아붙이던 사람이 맞나, 의아하게 보일 정도였다.
“소협이 무슨 자취를 찾으러 왔는지 짐작이 갑니다. 바로 알려 드릴 수도 있지요.”
불가(佛家)가 아니랄까 봐 서두가 너무나 길다.
불만을 느낀 백무량이 비구니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부탁이라는 게 뭡니까?”
“그때 방문한 도사께서, 자취를 찾으러 온 도사가 있거든 이런 부탁을 하라고 했습니다.”
비구니가 유성한의 어깨를 감싸며 하려던 말을 이었다.
“천무검성의 후인을 도사로 만들라고요.”
‘이게 사형이 남긴 시험이라고?’
백무량은 순간 할 말을 잃고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