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 (3)
‘운이 좋았지.’
솔직하게 말하면,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사 년 전에 받았던 자소단 두 개. 그것만으로 화산파가 충분한 보상을 치렀다고 생각했으니까.
그 예상은 아주 행복하게 틀렸다.
-나도 그만큼 많은 자소단을 취하진 못했거늘.
낙매신검에게 들었던 농담 섞인 투정이 아직 귓가에 어른거린다.
화산파의 배포는 정말로 남달랐다. 그들은 미리 연단하고 있었던 자소단마저 모두 곤륜파로 보냈다.
그렇게 받은 자소단이 총 일곱 개.
다섯 개는 백무량이 취했고, 두 개는 현종휘에게 주고 흡수를 도왔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태청신단에 그런 효능이 있을 줄이야.’
항상 흥망성쇠를 반복했던 곤륜파가 언제 타 문파의 영약을 취해 봤겠는가?
곤륜사(崑崙史)에서 몇 없는 일이었고, 그게 적힌 책은 모두 유실되었으니 사실상 백무량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 효능이 무엇이었는가.
“후우…….”
백무량이 태청신공을 운용하자 파도가 몰아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무공을 모르는 조원양마저도 눈을 크게 뜰 정도였다.
“자네, 그 나이에 얼마나 많은 내공을 가진 건가?”
“운이 좋았습니다.”
백무량은 겸양을 보였다.
정말로, 의도치 않은 일이었다.
‘태청신단이 자소단의 흡수를 도울 줄이야.’
보통은 흡수하지 못한 기운은 어떤 식으로든 배출되기 마련이다. 억지로 받아들였다가는 기맥이 걸레짝이 되고, 폭탄처럼 불안한 내공이 단전에 자리를 잡게 된다.
하지만 태청신단은 달랐다.
‘팔 할은 완벽하게 흡수했고, 이 할은 세맥에 녹였지.’
세맥에 있는 내력도 언젠가는 단전에 녹아 들 것이다.
따라서 현재 백무량의 내공 수위는 최소 백이십 년 이상.
모두 흡수한다면 자소단으로 백오십 년은 적공한 셈이다.
조원양이 옅은 웃음을 보였다.
“강호의 후기지수들이 자네를 본다면 피눈물을 쏟아 낼 걸세. 그 나이에 구파일방 장로급의 내공이라니.”
“하하, 아니꼬우면 그들도 마인과 싸우라고 하지요.”
백무량의 도사답지 않은 언행에 조원양이 실소를 터트렸다.
“흘흘…… 곤륜도가 이렇게 호협한 줄 알았다면 일찍 알고 지낼 걸 그랬네.”
“말은 곱게 하라는 질책이시지요?”
“눈치도 빠르군.”
조원양이 호탕하게 웃고는 백무량에게 조언했다.
“상인의 속이 좁다지만 무인의 질투와 시기는 상상을 초월하는 법이네.”
“그걸 누가 모르겠습니까?”
칠십여 년 전, 강호를 횡행했던 백무량이다.
무림인의 속이 종지만도 못하다는 건 누구보다도 잘 안다.
백무량이 피식 웃자, 조원양도 뒷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그저 놀랄 뿐이었다.
“나이는 어린데 눈빛은 노강호와 진배없으니, 참으로 놀랄 일이로군.”
“생각으로만 하셔도 됩니다.”
“자네도 늙어 보게, 속마음을 숨기기가 어려운 법이라네.”
한차례 농담을 던진 조원양이 백무량에게 호기심을 드러냈다.
정확하게는 최근 강호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백무량의 사제, 현종휘에 대해서였다.
“하면 청운검협도 그만한 내공 수위를 갖추고 있는가?”
“저만큼은 아니지만…… 여느 일대제자와 비교해도 쉽게 이길 수 있을 겁니다.”
“단순히 내공만이 아니라 무공으로 말인가?”
“누구 사제인데요. 당연하지요.”
“약관도 되지 않은 후기지수가 구파일방의 일대제자를 쉽게 꺾는다라……. 참으로 곤륜파는 대단한 제자들을 두었군.”
조원양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백무량은 속으로 흐뭇하게 웃었다.
‘종휘한테 투자한 보람이 있어.’
일 년 전, 실전을 경험시키기 위해 현종휘를 강호로 보냈는데 벌써 인망과 명성을 쌓고 있었다.
여러 후기지수의 선망을 받고 있다던데…… 그들에게 한 가지를 말해 주고 싶었다.
‘그놈, 자소단 두 개 먹였거든.’
가난한 곤륜파 출신인 줄 알았을 텐데, 화산파의 영약을 두 개나 취했다?
그걸 들은 후기지수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백무량이 혼자 클클 웃자, 조원양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인가?”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실없기는. 하긴, 뛰어난 무인일수록 헛생각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고 하니 이해하겠네.”
조원양이 뒤쪽의 벽을 두어 번 두드리자, 출입구가 열렸다.
그곳에는 백무량을 이곳까지 안내한 문지기가 서 있었다.
문지기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조원양이 눈으로 인사를 받아들이고는 백무량에게 시선을 돌렸다.
“밤이 늦었네. 슬슬 잠자리에 들게.”
“앞으로 닷새 동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하, 기대하겠네.”
백무량은 조원양에게 예를 표하고는 방을 나왔다.
이에 기다렸다는 듯이 문지기가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이야기는 잘되셨습니까?”
“닷새간 잘 부탁드리겠소.”
“무엇이든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저, 그러면 한 가지만 묻겠소.”
“뭡니까?”
“이 건물의 구조가 어떻게 되는지, 내가 알아도 될 정도만 말해 주시오.”
그 말에 문지기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백무량은 그 표정에서 난감함을 읽었다.
“안 되오?”
“아, 아닙니다. 상단주님을 호위하는데 당연히 아셔야지요.”
목소리에서 어딘가 어물쩍거리는 것이 느껴져서, 백무량은 조원양과 한 약조를 털어놓았다.
“어차피 이번 호위가 끝나면 상왕께 이 건물의 설계도를 받기로 했소.”
“아……아!”
어색한 미소를 지은 문지기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제가 아직 부족합니다. 대협께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인 모양이군요.”
‘만금상단 아니랄까 봐, 문지기도 눈치가 보통이 아니군.’
백무량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문지기와 대화를 나눴다.
그와의 대화에서 안 정보는 총 두 가지.
‘칠성교가 조원양을 납치하고, 그를 이용해서 강호에 혼란을 초래하려는 것으로 추측한다……라.’
강호의 변방을 공격하고, 양민과 부자를 이간질한 행적이 만금상단과 이어지면 제법 심각해진다.
만금상단이야말로 강호를 대표하는 부호 집단이니까.
조원양을 납치당한 만금상단이 칠성교를 적대할수록, 다툼은 더욱 격해질 것이다.
백무량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참으로 비겁한 놈들이오.”
“예?”
“무림인끼리 싸우면 될 것을, 왜 양민을 끌어들인단 말이오.”
“…….”
문지기가 잠시 침묵했다. 대답할 말, 혹은 단어를 고르는 듯했다.
그렇게 세 걸음 정도를 거닐었을 때.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게 사교(邪敎)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을 반목시킴으로써 그릇된 가르침을 정당화하고, 남의 괴로움을 이용하는 행동 말입니다.”
문지기가 백무량의 눈치를 살피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대협께서 오기 전에는 편협한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겨우 약관에 불과한 무인이 어떻게 칠성교를 상대로 호위를 하겠냐고, 잘난 듯이 떠들기도 했지요.”
당장 백련교 좌호법만 하더라도 단신으로 청성파를 멸문시키지 않았나.
그게 겨우 사 년 전인데, 약관의 신진고수에게 호위를 부탁하니 아니꼽게 보일 만하다.
백무량은 문지기의 의심을 긍정했다.
“그럴 만하오.”
“하하, 근데 지금은 아닙니다.”
“왜 그렇소?”
“저는 한낱 문지기긴 하지만, 그만큼 많은 무인을 봅니다. 천하의 돈이 모인다는 만금상단이기에 심심찮게 구파일방의 장로님들도 볼 수 있었지요.”
문지기의 시선이 한쪽 벽으로 향한다. 백무량 이전에 만난 무인들을 회상하는 시선이었다.
백무량은 말없이 그의 말을 기다렸다.
내심, 그들을 본 문지기가 내리는 평가가 궁금하기도 했다.
“모두 의연했습니다. 하지만 대협처럼 행동하진 않았습니다.”
“나처럼?”
“칠성교나 백련교를 이겨야 할 대적으로 생각하지, 대협처럼 쓰레기처럼 여기진 않았지요.”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머금었다.
말이 너무 자유분방했나, 도사답지 않았나, 그런 망념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하지만 문지기의 눈빛이 제법 진지했다.
“저는 대협의 말에 동의합니다. 칠성교나 백련교나, 강하다고 한들 결국 사교 아닙니까? 당연히 멸절해야지, 어찌 도전해서 이길 대상으로 삼는단 말입니까.”
“내가 괜한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하진 않았소?”
“하하! 허세를 부리려고 백련교 좌호법을 이기는 사람은 없지요!”
문지기의 웃음에 백무량도 껄껄 웃고 말았다.
참으로 낯이 부끄러웠다.
‘사 년 전에 한 일이 아직도 잊히지 않았구나.’
앞으로 해낼 일이 아직 산더미거늘.
문지기를 다음에 만나면 어떤 격찬, 존경의 말을 던질까.
백무량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차라리 쌍욕을 던지는 적이 낫지, 이런 상대는 익숙하지 않았다.
“도착했습니다.”
복도 중간에 멈춰선 문지기가 손을 뻗었다.
드르륵!
기관이 움직이며 벽이었던 문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틈 사이로 가느다란 줄 같은 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참으로 신기하오.”
“설계도를 보면 머리에 쥐가 나실 겁니다.”
농담을 던진 문지기가 머리를 깊게 숙이고, 두 손을 모아 올렸다.
그가 백무량에게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예법이었다.
“좋은 밤 되십시오.”
“감사하오.”
백무량도 마찬가지로 두 손을 모아 올리자, 문지기가 슬쩍 웃고는 등을 돌려 떠나갔다.
처음에는 만금상단으로 가는 것이 꺼려졌지만, 조원양과 문지기를 보고 나니 느낌이 괜찮았다.
‘이것도 다 인연 덕분이겠지.’
만금상단 소속이었던 송우현과 조원양의 목숨을 구한 도사.
그 둘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극진한 대접은 받지 못했으리라.
백무량은 이부자리에 몸을 뉘며 태청신공을 운용했다.
‘과거에는 와공(臥功)까지 이르지 못했지만…….’
내공이 이 갑자에 이르자 자세는 크게 중요치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마저도 태청신단의 효험일지도 몰랐다.
앞으로 있을 싸움에서 엄청난 차이를 불러일으킬 변화다.
어디 그뿐이랴.
“후우우…….”
백무량이 깊은숨을 내뱉자 청운이 주변에 가라앉아 방 안에 있는 틈에도 속속 스며들었다.
이렇게 하면 굳이 기감을 집중하지 않아도 됐다.
‘기감보다 청운이 감지하는 게 더 빠르고, 정확해.’
수많은 사람 속에서 목표로 하는 사람을 정확하게, 그리고 그의 용모까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다.
백무량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청운을 깔아 둔 지금이라면 숙면해도 좋았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 청운이 알려 줄 테니까.
***
삼존(三尊).
칠성교주 휘하, 세 명의 고수를 뜻한다.
그들은 가면으로 정신을 보호하면서 악신(惡神) 혹은 요신(妖神)의 술법이나 무공을 빌려 쓸 수 있었다.
삼존 중 요현(妖現)은 후자에 속했다.
천면호(千面狐).
한때 세상에 재앙을 불러왔던 요괴를 정신에 들인 것이 바로 요현이었고, 변덕이 심한 천면호를 수많은 가면을 이용해서 달래고 있었다.
그 요현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면…….
‘하필이면 아저씨네.’
요현은 만금상단에서 나온 문지기의 발걸음을 좇았다.
가족에게 줄 선물인지, 그의 짐에서 달콤한 냄새가 났다.
‘여기서 덮칠까?’
요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천면호가 가진 감각이 삽시간에 요현에게 동화되고, 위험으로 여겨질 가능성을 인식했다.
홱!
요현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만금상단 정문 너머.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 끝을 알 수 없는 선기가 느껴졌다.
요신을 모시고 있는 요현으로선 절대 감당할 수 없는 기운이었다.
요현의 뺨에 식은땀이 맺혔다.
‘시간을 두자. 그래, 한 사흘 정도는…… 시간을 두고 지켜보자.’
확신이 들면 그때 진입한다.
요현은 문지기의 등을 조용히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