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 (2)
매처럼 날카로운 눈빛, 조금의 구부러짐도 없이 길러진 수염.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조원양과 시선을 마주한 순간, 백무량은 느꼈다.
범이 도약하기 전에 몸을 웅크리듯, 정좌하고 있는 저 모습이야말로 조원양의 임전 태세라는 것을.
“뭘 그리 굳어 있나, 무공을 모르는 늙은이라네.”
“인사가 늦었습니다. 곤륜신성 백무량이라고 합니다.”
“흘흘흘.”
까닭 모를 웃음을 흘린 조원양이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백무량은 그에게 향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안내했던 문지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내 기감에 잡히지 않을 정도면, 여기에도 비밀 통로가 있단 건가?’
수많은 고수와 맞상대한 만금상단.
그들이 축적한 경험과 금력(金力)은 어느 정도일 것인가.
백무량은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음.”
푹신하리란 건 알았지만, 구름 위에 앉은 것처럼 부드럽다.
백무량이 탄성을 흘리자 조원양이 차를 한 잔 건넸다.
“급한 용무가 없다면 천천히 들게.”
“상왕을 만나면서 어찌 시간을 촉박하게 잡았겠습니까?”
그 말에 조원양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순진한 청년이군.”
“순진하다니요?”
“자네가 감우상인과 함께 있다기에 속에 구렁이가 수십 마리는 있는 줄 알았네. 한데 가만 보니, 송가 놈이 자네를 많이 아끼는 모양이군.”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그래, 간단하게 직유해 보지.”
조원양은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내가 상왕이 아니라, 황상이어도 대범하게 굴게.”
“……예?”
“자네가 무엇이 꿀려서 스스로를 굽히는가? 첫인사 때도 마찬가지. 인사가 늦으면 얼마나 늦었다고, 상인은 상대가 허리를 굽힐수록 얕잡아 보는 법이네.”
처음에는 놀리는 건가 싶었지만, 조원양의 어조에 경험이 부족한 백무량을 가르쳐 주려는 온기가 있었다.
송우현이 중간에 욕을 섞어서 설명이 뒤죽박죽이라면 조원양은 단순하고 명쾌하다.
백무량은 조원양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잘 들었습니다.”
“자리에 앉을 때도 무표정하게 있고, 다음부턴 시간도 없다고 하게. 상인이라 함은 상대가 안달복달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몰아치길 좋아하거든.”
“……으음.”
백무량은 침음성을 흘리며 송우현의 행동을 떠올렸다.
늘 당당하고 걸걸하기만 했지, 상대를 무정하게 몰아친 적은 없었다.
자신의 표정을 살핀 조원양이 가볍게 웃었다.
“이런 면모를 몰랐으니 송가가 자네를 아낀다고 여긴 걸세. 상인으로선 훌륭해도, 꽤나 추한 행동인지라 아끼는 사람에겐 보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야.”
“다음에 한번 써먹겠습니다.”
“써먹겠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송 노야한테 무표정하게 시간이 없다고 하면…… 어떤 표정일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그 말에 조원양이 한쪽 입술을 비틀었다. 그리운 옛 악우를 떠올리는 듯했다.
“호통을 한번 치고 나서, 자네의 표정이나 기색을 살피겠지……. 무덤덤하게 있으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냐며 물을 거야.”
“잘 아시는군요.”
“그와 함께 만금상단을 꾸렸으니 말이야.”
백무량은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함께요?”
“몰랐는가? 감우상인은 나와 함께 상단주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사이였네. 말년에 이상한 귀신 같은 것에 씌어서는, 청해성으로 갔지만 말일세.”
‘이상한 귀신이라니…….’
주백천을 귀신이라고 부르는 거라면 실례가 아닌가.
백무량이 인상을 가볍게 찌푸리자, 조원양이 곧바로 사죄했다.
“미안하네, 내가 무언가 실언을 한 모양이군.”
“괜찮습니다.”
“앙금이 있다면 지금 풀게. 자네와 오래 붙어 있어야 하니 말일세.”
저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백무량은 기겁하여 상체를 뒤로 기울였다.
‘상왕이 남색가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뭔진 몰라도 오해네. 거참, 상상력이 뛰어난 청년이로군.”
조원양이 애써 차분한 표정으로 백무량을 진정시켰다.
그러고는 본제로 들어갔다.
“최근 강호 변방의 상황은 알고 있는가?”
“칠성교 말입니까?”
“그렇네. 의적을 자칭하며 권문세가를 약탈하고, 그 돈을 무분별하게 뿌리고 있지.”
가난한 민중을 구제해 주는 척 부자를 약탈하고, 양민과 부자를 반목시킨다.
그것이 격해져서 봉기에 이르렀을 땐 곧장 수도로 진격하는 것이야말로 칠성교의 수법이었다.
백무량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상왕께서 그곳으로 가실 참입니까?”
“반대네.”
“……?”
“칠성교가 나를 노리겠다는 예고장을 보내왔네.”
조원양이 품에서 누렇게 변색된 서한을 꺼냈다.
그걸 본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미 수는 다 써 보셨군요.”
“순진하단 말은 취소해야겠군.”
조원양이 백무량에게 서한을 건넸다.
백무량은 그 서한을 촛불에 대었다.
서한이 변색되었다는 건,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어느 지방에서 만들어진 종이인지 알아보았다는 뜻이다.
그 수법을 아는 사람은 강호에서 흔치 않았다. 보통은 흑도와 깊게 연관되어야 알 수 있었다.
백무량은 그것을 아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강소성에서 보냈군요.”
“송가가 알려 주었나?”
“비밀입니다.”
칠십여 년 전에 배웠지만, 말해 줘 봐야 믿지 않을 터.
백무량은 서한의 내용을 읽으며 조원양에게 물었다.
“한데 아직 말씀하지 않으실 작정입니까?”
“자네를 왜 돕는지 말인가?”
“예.”
“하하, 내 무기를 어떻게 간단히 내놓겠나. 이번 일이 끝나면 말해 주겠네.”
그 말에 백무량이 서한에서 시선을 떼었다.
사실 길게 읽을 필요가 없었다. 목이나 닦고 있으라는 간략한 내용이었으니까.
백무량은 조원양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거짓은 아니겠지요?”
“내가 뭐가 아쉬운가. 사실, 휘하의 상인에게 자네를 도우라고 시켜서 본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닐세. 그걸 감내하고 도운 이유가 있다면 반드시 들어 봐야 하지 않겠나?”
“…….”
“그렇게 뚫어져라 보지 말게. 좋아, 지금 알려 주겠네.”
조원양은 선심을 쓰듯 짤막한 말을 던졌다.
하지만 백무량에게 있어 그 말은 몹시 중요했다.
“나중에 나타날 ‘곤륜파의 백무량’을 도와 달란 도사님이 한 분 계셨네. 그분께 목숨을 빚졌지.”
“……!”
백무량은 깜짝 놀라서 할 말을 잃었다. 애써 무덤덤한 척, 표정을 관리했다.
“그게 언제입니까?”
“대략 이십 년 전일 걸세.”
“이, 이름은 어떻게 됩니까?”
“밝히지 않으셨네. 다만 죽립을 깊게 눌러쓰고 있더군.”
대답을 이어 가던 조원양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데 이십 년 전이면 자네가 태어났을 때랑 비슷한데…… 가족인가?”
“만나서 확인해야지요.”
백무량의 단언에 조원양이 침음성을 흘렸다.
“미안하지만 그분이 어디로 간다는 말씀은 남기지 않으셨네. 발길이 닿는 대로, 천명이 인도하는 대로 간다는 말이 전부였네.”
“그렇군요.”
백무량은 깊은 실망감을 품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무엇보다, 어딘가 이상했다.
‘기억을 하고 있잖아?’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주백천을 기억하지 못했다.
정확하게는, 백무량이 되살아남으로써 모두가 주백천을 잊었다.
한데 조원양은 도사를 언제 만났는지, 무슨 말을 남겼는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사형이 아닐 확률이 높아.’
하지만 사형과 연관된 사람일 가능성이 컸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십 년 전에 곤륜파의 백무량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길 리가 없다.
백무량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허공에 헛손질을 하던 것이 어언 칠 년. 이제는 실마리가 조금씩 잡히고 있었다.
“죽립 말고는 기억나는 게 없으십니까?”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나질 않네. 짧은 만남이기도 했고 말이야.”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송우현이나 조원양이나 짧은 인연과 은혜를 늙어서도 기억하여, 자신에게 베풀고 있었다.
이 또한 사형의 안배인 걸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선함은 어떤 사람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한데 그 부탁을 들어주신 거군요.”
“그때 목숨을 잃었으면 상왕이 되기도 전에 비명횡사했을 테니 말일세.”
“그걸 보면 송 노야와 비슷한 거 아닙니까?”
“그놈과 비교하지 말게! 그놈은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나는 적어도 죽립을 쓴 도사님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오래전 은혜를 잊지 않으셨잖습니까.”
“뭐, 은혜를 갚느라 손해가 막심하기는 하지.”
조원양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손해를 메꾸려고 자네를 지금 부른 것이지 않나.”
“오래 지켜 드릴 순 없습니다.”
백무량은 낮은 목소리로 단언했다.
보타암에 들르고 곤륜파로 돌아가기까지 말을 타도 삼십 일은 족히 걸린다.
그 여정에서 조원양의 호위까지 해야 한다면, 얼마나 긴 시간이 지체되겠는가.
‘일주일이 한계야.’
백무량이 날짜를 헤아리던 그때, 조원양이 피식 웃었다.
“허어, 상인에겐 시간이 없다고 하라는 걸 지금 써먹는가?”
“사실이라서 어쩔 수가 없습니다.”
“어차피 닷새면 되네. 그 후에는 나와 친분이 있는 고수가 찾아올 걸세.”
“적어도 강호십대고수는 되어야 칠성교도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칠성교주는 불가능하고요.”
“다행히도, 강호십대고수라네.”
“누구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금모도왕(金毛刀王) 남천(南天)일세.”
‘금모도왕 남천이라.’
백무량은 턱을 매만졌다.
특별한 내가기공을 익혀 머리가 누렇게 물들었다는데, 내심 관심을 가지고 있던 고수였다.
‘태산검문의 진전을 이어받았다던가.’
칠성교와 치열하게 싸웠던 태산검문.
그들의 후예 남천이라면 칠성교와의 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할지도 모른다.
백무량은 조원양의 판단에 감탄했다.
“좋은 선택입니다. 태산검문의 후인인 금모도왕이라면 칠성교와의 싸움에서 적어도 패배하진 않을 겁니다.”
“하하…… 자네의 말을 남천이 들었다면 어떤 반응이었을지 궁금해지는군.”
“……?”
“아무것도 아닐세. 뭐, 닷새 뒤에 한번 만나게 될 터이니 얼굴은 서로 익혀 두게.”
조원양의 말에 백무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남천에게 비무를 청하고 싶었다.
‘태산검문의 무학은 과연 어떨까?’
양청교와의 비무에서 운중용형보을 새롭게 발전시킬 실마리를 얻었다.
공동파보다 오래된 역사를 가진 태산검문이라면 독자적인 무학 체계가 있을 터였다.
호기심 또한 컸다.
검문(劍門)의 무공을 도(刀)로 승화한 이유.
‘그것으로 어떻게 강호십대고수에 올랐는지도 궁금해.’
생각을 정리한 백무량은 조원양에게 물었다.
“어디서 지내면 되겠습니까?”
“방에서 나가면 아까 만났던 문지기가 있을 걸세.”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 바깥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문지기가 있던 정문에서 이곳까지 곧바로 올 수단이 있다는 뜻이다.
백무량은 속으로 헛숨을 삼켰다.
“대체 만금상단의 구조는 누가 만들어 낸 겁니까?”
“나네.”
“상왕께서요?”
“워낙 무인에게 욕먹을 짓을 많이 하니, 나 나름대로 고심했다네. 아까 말한 남천이 많이 도와줬지.”
“정말로, 대단하십니다.”
백무량의 감탄에 조원양이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이번 일이 끝나면 이 건물의 구조도를 필사해 주지. 곤륜파의 장문인이 학도사라고 하나, 구명할 수단 정도는 될 걸세.”
그 말에 백무량의 눈이 번쩍 뜨였다.
확실히, 현노윤의 처소를 만금상단처럼 구축한다면 전보다 몇 배는 안전해질 터였다.
“정말입니까?”
“내가 비록 상인이기는 하나, 한번 내뱉은 말은 지켰네.”
“감사합니다.”
“감사하기는, 이곳을 만드는 데 드는 자재가 얼마나 많은 줄 아는가? 재정이 휘청거릴지도 모른다네.”
조원양이 가벼운 농담을 던졌지만, 백무량은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이곳의 구조를 알려 준다는 건, 자신의 약점을 알려 준다는 것과 마찬가지.’
물론 조원양에게도 곤륜파를 믿을 만한 점이 있기는 했다.
감우상인 송우현.
옛 친우가 있는 이상 구조가 유출될 일은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이 또한 조원양이 베푸는 은혜였다.
백무량은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있는 한,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자소단 다섯 개.
지난 사 년 동안 백무량이 취한 영약의 숫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