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 (1)
사 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지만, 청년이 어른으로 장성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위의 이야기를 하면 호사가들은 단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린다.
곤륜신성 백무량.
칠 년 전, 청해의 소영웅으로 나타나 수많은 업적을 남긴 신진고수.
그는 약관이 되는 사 년 동안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기에 호사가들은 추측에 살을 덧붙였다.
“약관이라면 강호십대고수의 반열에 들 만하지 않겠는가?”
“에이, 이 사람아! 아무리 곤륜신성이라도 어찌 그리 어린 나이에……!”
“사 년이나 두문불출한 걸 보면 아직은 이른가?”
“곤륜파의 장문인, 선풍도인(仙風道人) 현노윤이 길러 낸 후계잖나. 필시 뼈를 깎는 수련을 하고 있을 거야!”
“곤륜신성의 사제인 청운검협(靑雲劍俠) 현종휘는 또 어떻고! 호광성에서 벌인 연속 비무가 아직도 눈에 선하구먼.”
호사가들은 이런 논쟁을 벌이면서 곤륜신성의 무재(武才)를 알 법한 현천신검과 낙매신검을 곁눈질했다.
말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백무량이 정녕 어느 수준의 경지에 있는가, 속 시원하게.
하지만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침묵했다.
입이 가벼운 호걸이라 불리는 현천신검마저 눈을 사납게 부라렸다.
무공을 입으로 떠들기 좋아하는 호사가로선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낙매신검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언젠가 강호로 출도하겠지. 나에게 묻지 말게.
백련교주를 놓친 뒤로 수도 없이 폐관수련을 거친 낙매신검.
그의 기도는 강호십대고수보다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혹자는 낙매신검이 검선이 도달했던 영역에 다다랐다고 했지만, 낭설에 불과했다.
실제로 낙매신검 본인이 말했다.
-내가 검선이라면 현세에 남을 이유가 무어 있겠는가? 흰소리는 그만두고, 자기 인생에나 신경 쓰게.
이에 한 호가가가 낙매신검을 헐뜯는 소문을 퍼뜨렸고, 화산파 속가제자에게 호되게 치도곤을 당했다.
그가 남긴 한마디가 강호에 회자되었으니.
-백련교주로 도발하면 몇 마디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만큼 마교와 곤륜신성, 백련교주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들을 안다고 하면 개방보다 먼저 호사가가 붓을 들고 온다는 소문마저 있을 정도였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산동백가가 부정하게 축적한 재물, 여기에 있다!
강호의 변방.
절강과 운남, 강소성에서 가면을 눌러쓴 칠성교도가 의적을 자칭하며 권문세가를 약탈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주 오래전, 칠성교가 민의를 어지럽혔던 그때처럼.
“강호의 꼴이 말이 아니야.”
호광성의 한 객잔.
일 층 중앙에 앉은 호사가의 한탄에 좌중이 끄덕였다.
관이 나서고 있다지만, 한번 발호하기 시작한 칠성교는 거침이 없었다. 거짓된 증거로 많은 사람을 속였다.
그렇게 세를 불린 것이 어언 수천에서 일만 명.
변방에 사는 양민의 숫자를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수치다.
관에게 도망치던 칠성교도가 아무 민가에 숨어도 도움을 받는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반면 백련교는 어떠한가!
“겉으로는 침잠하나, 그들을 알아볼 방법이 없으니 두려워할 수밖에 없도다!”
한숨을 내쉰 호사가가 술을 연신 들이켰다.
백련교주의 용모파기가 저잣거리에 나돌긴 했으나, 사 년 동안 잡히질 않았다.
지금도 어디선가 때를 기다리고 있다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불길한 상상에 호사가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그때 호사가 옆에 한 남자가 앉았다.
“한잔 살 테니, 이야기 하나 해 주겠소?”
“무슨 이야기를 원하시오?”
호사가는 반색하여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남자의 얼굴을 보니 눈이 번쩍 뜨이고, 입술이 바싹 말랐다.
“아, 저…….”
“미안하지만, 인사는 되었소. 어디를 가다가 잠깐 들른지라 시간이 별로 없어서 말이오.”
남자의 말에 호사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눈빛에 환희가 머물렀다.
그와 만난 이야기로 적어도 수십 일은 풍족하게 먹고 지낼 수 있을 테니까.
‘매일매일 용모파기를 들여다본 게 이런 행운을 부를 줄이야!’
다행히도, 객잔 안의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눈치다.
호사가는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정돈한 뒤, 남자에게 말했다.
“말씀하시지요.”
“무림맹에서 구파일방에게 발본색원을 부탁했다고 들었소.”
“아…… 그거!”
호사가가 눈을 굴렸다.
발본색원이라 함은 칠성교의 표식을 탐색했던 사건을 말하는 것일 터!
‘그걸 언제 했더라? 분명…… 무림맹주가 구파일방에 반쯤 명령하듯이 해서 말싸움이 일어났었는데.’
“모르는 모양이군. 그러면 이만…….”
“자, 잠시 기다리시오, 대협! 기억을 떠올리는 과정이니!”
남자가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자 호사가는 필사적으로 머릿속을 굴렸다.
어젯밤 마신 빌어먹을 화주 때문인가, 시간은 조금 걸렸지만 어떻게든 떠올릴 수 있었다.
“그, 그래, 대협께서 사문으로 돌아간 직후였소!”
“나를 아시오?”
“어찌 모르겠습니까! 곤륜……읍!”
남자, 백무량은 호사가의 입을 한 손으로 막았다.
‘사 년 동안 인상이 많이 달라졌으니,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송우현이 말한 대로 ‘자기 연인의 초상화를 보듯이’ 백무량의 용모파기를 외우는 사람이 많은 듯했다.
“후우.”
한숨을 내쉰 백무량이 호사가에게 전음을 보냈다.
[듣는 귀가 많으니 거기서 멈추시오.]
“……!”
말뜻을 알아차린 호사가가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뒤이어 백무량이 손을 떼자,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무림맹주에게 반발하기는 했으나, 미연에 칠성교도를 잡는다는 말에 모두가 동의했습니다. 사 년 전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었지요.”
“지금은 모두가 그 반점을 안다?”
“옙. 예를 생략하고 오른쪽 목덜미를 확인하는 사람이 생겼을 정도지요.”
“그래서 발본색원한 결과는 어떻게 되었소?”
“구파일방에는 칠성교도가 없었습니다.”
긍정적인 결과이기는 하나, 아예 몰랐던 사실이다.
백무량은 오랜 폐관수련 때문에 눈과 귀가 어두워졌음을 직감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중간중간 한 번씩은 나올 걸 그랬어.’
송우현이 항상 불만을 토하지 않았던가.
무공 한 초식보다 중요한 정보 하나가 목숨을 구하고, 더 좋은 결과를 부른다며.
물론 쥐뿔도 듣지 않았다.
‘백련교주를 만났다면 그런 소리는 못 하지.’
무인이 궁구하여 빚어낸 기예를 힘과 의지로 뭉개 버리는 강함.
무한하기까지 한 마기 앞에서는 청운이나 매향마저도 무의미했다.
백련교주를 이기려면 벽을 넘는 것이 아니라, 벽을 디딤돌 삼아 하늘로 올라서야 했다.
그것을 위해 사 년을 잠적했고, 약관이 된 지금 나왔다.
이유가 그것 하나만은 아니었다.
‘나를 잊어 줬으면 했는데.’
사형의 안배를 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교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다.
아직은 전면전에서 이길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백무량은 그의 명성이 하늘을 찌를 때, 곤륜산에서 잠적했다.
칠성교나 백련교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하길 바랐다.
‘그게 성공했을지는 잘 모르겠군.’
백무량의 눈이 호사가에게 향했다.
사 년의 시간이 지나고 얼굴이 성숙해져도 한눈에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나를 한눈에 알아볼 사람이 더 있겠소?]
“……음, 있을 것 같습니다.”
호사가의 말에 백무량의 심정이 복잡해졌다.
‘이걸 좋아해야 하나, 아니면 질색해야 하나.’
솔직한 본심으로는 전자였다.
원래 백무량은 명성을 즐겼고, 그것을 이용해서 많은 곳을 유람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곳저곳에서 부른단 말이지, 거절하기 힘든 미끼를 가지고 말이야.’
남들이 자신의 출도를 알지 못할 때, 사형의 안배를 찾으러 무당파나 보타암에 가려고 했거늘.
백무량이 한숨을 내쉬자, 호사가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웬 한숨입니까?”
“그냥, 그냥 쉬었소.”
“이유가 있으시니…….”
“당신은 이유가 있어서 숨을 쉬시오?”
“…….”
호사가가 입을 꾹 다물었다.
어디선가 악평이 나올 것 같았지만,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이 없어졌다.
백무량은 크게 만족하며 행선지를 떠올렸다.
‘만금상단주 조원양이라…….’
과거, 송우현의 친우이자 조윤과 정우백의 윗사람.
천하의 돈을 좌지우지한다는 상왕(商王) 조원양이 백무량에게 전서구를 보냈다.
[내가 왜 자네를 돕는지 궁금하지 않았나? 알고 싶다면 직접 찾아오게.]
다시 생각해 봐도 찾아가지 않고서는 못 배길 질문이다.
‘이래서 상왕이라는 건가.’
백무량은 호사가 앞에 철전을 두어 개 두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거면 술값은 되겠소?”
“대협과 마주한 이야기로 수백 배는 벌 수 있습니다.”
“……가급적이면 열흘 뒤에 해 주지 않겠나?”
그 말에 호사가가 씩 웃었다.
“예, 그러지요.”
당연하지만 백무량은 호사가의 말을 신뢰하지 않았다.
자신을 알아볼 사람이 더 많아지기 전에 조원양을 만나고, 보타암으로 향해야 했다.
‘지금이야말로 적기야.’
어느 누구도 백무량이 보타암과 친분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백무량은 만금상단의 중추로 나아갔다.
***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협.”
만금상단 문지기의 정중한 예법에 백무량은 할 말을 잃었다.
다른 곳에서는 이렇지 않았는데, 호광성에 들어오고 나서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갑자기 많아졌다.
그 시선을 알아차린 문지기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며칠 전부터 저희가 대협의 용모파기를 외워서 그렇습니다.”
“며칠 전이라니요?”
“완전히 외우기 전까지는 집에 돌아가지도 못했지요.”
백무량은 문지기의 말에 마음을 다잡았다.
상왕이라는 별호를 가진 이상, 틈이 있을 리가 없다.
‘아니, 어쩌면 문지기한테 저런 말을 시킨 걸지도 모르지.’
그 의문을 품으니 속이 열 배는 복잡해졌다.
송우현은 그래도 우리 편인 능구렁이지만, 조원양은 완전히 남남이었다. 그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자신을 불러냈을지 아직 알지 못했다.
이에 대해 송우현이 한마디를 남겼다.
-만만하게 보지 마라. 강호십대고수 앞에서 호위 하나 없이 파산을 논했던 작자니까.
요컨대 낙매신검이나 현천신검 앞에서 돈을 갚으라고 혼자서 맞섰다는 소리다.
그 담대함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절대 무시해서는 안 된다.
백무량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문지기의 안내를 따라갔다.
‘마치 미로 같군.’
왼쪽에서 오른쪽, 그곳에서 다시 중앙으로 향했다가 위층으로 올라간다.
게다가 집의 평형이 마구잡이로 기울어져 있었다.
‘무인의 감각을 흩뜨리려는 건가?’
일류 이상의 무인이라면 자신의 위치를 내디딘 발바닥의 감촉과 공기의 흐름만으로 알아내기 마련이니까.
그런 점에서 만금상단은 완전히 개판이었다.
창문의 위치는 물론, 천장의 높이도 방마다 다르다. 정말 수많은 곳에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백무량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목수가 보면 기함하겠지만, 이만큼 방비가 철저한 곳은 난생처음이오.”
“과연 강호의 소문대로 대단하십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상인인 척 침입했던 양상군자(梁上君子 : 도둑)만이 만금상단의 보안을 알아챘는데, 대협은 곧바로 알지 않았습니까!”
문지기가 던진 농담에 백무량은 피식 웃었다.
“내가 양상군자란 말이오?”
“하하, 못 들은 걸로 하십시오. 그나저나…… 그거 아십니까?”
“그거라니요?”
“최근 호광성에서 유행하는 물건 중에 대협의 영웅담이 있습니다. 보름 전에 삼 편이 나왔지요.”
“허……!”
“숙소에 하나 있는데, 보여 드려도 되겠습니까?”
“아, 아니, 됐소. 오글거려서 못 볼 것 같소.”
문지기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가는 모습에 백무량은 속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보통 문지기라고 함은, 인상을 잔뜩 쓰고 눈으로 꺼지라고 하는 족속들.
한데 만금상단의 문지기는 길을 안내하면서 대화에 막힘이 없다.
백무량은 문지기와 대화를 나누며 생각했다.
‘문지기가 이런데 여기 있는 상인은 얼마나 대단할까.’
하물며 그들을 부하로 두는 조원양이라면?
백무량은 조윤과 정우백의 면면을 떠올렸다.
그들은 만금상단주를 어렵게 대하거나, 따라잡을 대상으로 여겼다.
‘그런 사람이 여기 있다 이거지.’
백무량이 주변을 살피며 걸은 것이 어언 한 식경.
뚝.
발걸음을 멈춘 문지기가 부드럽게 웃었다.
“이 문 앞에 계십니다.”
“문? 문은커녕 창문도 없지 않소.”
“놀라지 마십시오.”
스윽.
문지기의 손이 틈 하나 없던 벽에 쑥 들어갔다.
백무량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림……!”
정교하게 그려진 그림이 입구의 위치를 숨기고 있었다. 하물며 창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감탄만 할 수 없었다.
“어서 오시게.”
저 멀리.
천하의 돈을 쥐고 흔드는 상인, 조원양이 정좌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