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 (5)
“……역시.”
백무량과 낙매신검은 낙담했다. 그렇다고 그 감정을 끌어안고 절망하진 않았다.
이곳에서 놓친 이상 쉬이 도망칠 수 있으리라 여겼으니까.
그 반응이 의외였던 건지, 칠지검협이 낙매신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습니까?”
“괜찮……지는 않지요. 솔직히 머리가 깨질 것 같습니다.”
폐허가 된 매화비원.
화산파의 도사라면 마음이 찢어지고 창자가 으깨지는 고통일 것이다. 당장 칠지검협만 하더라도 두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이대로 있어선 안 되는 일이다.
낙매신검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우선할 행동을 골라냈다.
“일단은 무림맹과 주변 문파에 백련교주의 출현을 알리고, 매화비원을 되살릴 방법을 찾아내는 게 급선무일 것 같습니다.”
“장로, 이제 그만 쉬시지요.”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있으면, 천천히, 나아질 겁니다.”
낙매신검이 몸을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 언저리에 방금 잡힌 멱살의 감촉이 아직도 남아 있다.
낙매신검의 시선이 백무량에게 향했다.
“약속은 유효한가?”
“비무 말씀입니까?”
“그래, 아무래도, 진심을 다해야 하지 않을까 싶네.”
두 도사의 대화에 칠지검협이 속으로 깜짝 놀랐다.
도대체 이곳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낙매신검이 백무량에게 저자세로 나온단 말인가!
백련교주와의 싸움에서 백무량이 엄청난 신위를 보인 게 분명하다.
칠지검협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래도…… 진담이었던 모양이군.’
화산파의 의원이 이렇게 말했다.
-골절상임에도 하루 만에 거동하는 치유력의 근원은 곤륜산에 있습니다! 화산파의 후기지수를 몇 년간 그곳에서 수련시키는 게 어떻겠습니까?
칠지검협은 당연히 반대했었다.
비용을 떠나서 제자의 체면이나 자존심이 상하리란 판단이었다.
하지만 낙매신검이 백무량에게 진심을 다할 정도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생각을 정돈한 칠지검협은 낙매신검에게 전음을 보냈다.
[곤륜신성의 단련법을 의원이 안다는데, 그걸 후기지수한테 적용하면 어떻겠습니까?]
[당연히 해야 합니다.]
[당연히라니요?]
[아주 잠깐이었지만, 곤륜신성이 백련교주를 제압하는 모습을 보았으니까요.]
칠지검협은 체통을 지키지 못했다. 깜짝 놀란 표정으로 백무량을 곁눈질했다.
저 나이에 백련교주를 제압하다니?
칠십여 년 전, 태청선 주자령조차 이기지 못했던 마인이 바로 백련교주가 아니던가!
칠지검협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자네…….”
“뭐, 뭡니까?”
두 노도사의 대화를 모르는 백무량으로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이곳에 식객으로 있길 바라는 건가 해서, 정중한 거절을 준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쓸모가 없었다.
“불민한 모습을 보여 미안하네.”
“장문인……!”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외쳤다.
어찌 보면 백련교주를 불러온 게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이를 모르는 칠지검협이 고개를 내저었다.
“백련교주가 어떻게 침입했든 상관없네. 중요한 건 외인인 자네가 그 자리에 있었고, 상처를 입었으며, 직접 싸워야 했다는 점일세.”
“마인이 눈앞에 있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여긴 화산파일세. 그것도 성지인 매화비원이었지.”
저 말에 담긴 쓸쓸함과 자조가 진하게 느껴졌다.
폐허가 된 성지를 바라보는 장문인의 마음은 어떠할까.
백무량은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
성지를 되살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는 했지만, 만통자가 현존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해 보였다.
세 무인이 한탄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화산파의 장문인인 칠지검협의 안색이 특히 어두웠다.
“만일 자네까지 중상을 입거나, 죽었다면…… 우린 명예까지 잃어야 했을 걸세. 그것이 장문인인 내가 말하는 불민한 모습이네.”
“…….”
“백련교주와 맞서 싸워 준 은혜까지 입었지. 원래는 화산파의 무인이 했어야 할 일이네.”
그 말에 낙매신검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백련교주를 놓친 한순간이 눈앞을 스쳐 간 듯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그늘에서 벗어나야 한다.
백무량은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은 고갈된 선기를 되돌릴 방법을 찾고, 백련교주의 출현을 알리는 게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당장 보내도록 하겠네.”
칠지검협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백련교주가 매화비원을 폐허로 만들었으니 다른 곳도 안전하지 않았다.
특히 옆에 있는 종남이 위험하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칠지검협이 등을 돌리던 그때, 백무량이 붙잡았다.
“제 이름은 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음? 그게 무슨 소린가?”
“그게…….”
백무량은 낙매신검과 나눈 이야기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러자 칠지검협이 넌지시 궁금함을 털어놓았다.
“한데 그것으로 충분한가?”
“예?”
“백련교주와 동수를 겨뤘다는 사실이 퍼진다면, 물론 시선이 쏠리기는 하겠지만…… 강호십대고수로서 대우받을 기회일지도 모른다네.”
“하하.”
백무량은 까닭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과거, 그러니까, 아주 옛날이라면 좋다고 고개를 끄덕였을 터였다.
그때의 목적은 강호십대고수였으니까. 사부와 같은 명성을 가진다면 대등한 위치에서 놀릴 수 있으리란 심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그보다 위.’
사형의 안배를 모두 취하고, 검해에 있는 무학을 습득하여 발전시킨다면 강호십대고수보다 위에 오를 수 있다.
그것을 목표로 하는 이상 쓸데없는 허명(虛名)에 휩싸이고 싶지 않았다.
백무량은 부드러운 웃음을 보였다.
“괜찮습니다. 차라리 제 이름보다는 여기 계신 선배님들의 이름이 들어갔으면 합니다.”
낙매신검과 매화비원을 관리한다던 장로.
그 둘의 이름이 들어간다면 화산파에 많은 극찬과 도움의 손길이 이루어질 테니까.
어쩌면 매화비원을 되살릴 방법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백무량의 뜻을 알아차린 칠지검협이 크게 감동했다.
“자네는 대체……!”
“저는 정말로 괜찮으니, 화산파 내부를 살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백무량의 말에 칠지검협이 다시 한번 감사함을 표했다.
-낙매신검과 하일화 장로가 백련교주를 쫓아냈다!
-화산파의 피해를 수습하기 위해 강호 동도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 소식이 퍼진다면 되살릴 방법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칠지검협의 눈에 백무량은 완전히 탈속한 도사로 보였다.
백무량이 그걸 알았다면 헛웃음을 터트렸을 것이다.
자기만큼 욕망에 충실한 도사가 없다면서…….
이를 모르는 칠지검협이 백무량에게 전음을 보냈다.
[나중에 일이 조금 정리되고 나면 따로 얘기할 수 있겠나?]
[기꺼이요.]
백무량은 흔쾌히 대답했다.
어차피 낙매신검과의 비무가 남아 있는 데다, 칠지검협의 용무가 무엇일지 눈치채고 있었다.
의원에게 말한 단련법.
필시 그것을 묻고 싶을 터였다.
‘적어도 자소단 두 개는 받아야겠어.’
백무량 자신과 현종휘.
두 곤륜도가 취한다면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훨씬 밝아질 테니까.
백무량은 칠지검협에게 예를 표하고는 매화비원을 떠났다.
그렇게 두 노도사가 남았으니.
“강호에 저런 후배가 남아 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곤륜파가 재건되어 모습을 당당하게 드러낸 것은 정말이지, 천하의 홍복입니다.”
낙매신검과 칠지검협이 백무량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다가 화산파로 향했다.
이 불운한 소식을 강호에 알려야 할 때였다.
***
백련교주가 화산파에서 나타났다 종적을 감췄다!
그 소식은 한 시진에 천 리씩 주파했다. 무림에 관심이 없는 관인마저도 인상을 찌푸리며 책상을 두드렸다.
“칠성교에 이어 백련교주라니!”
“천하가 혼란하여 요동치는구나! 어찌 이런 일이 내 대에 일어난단 말인가?”
수많은 말이 나돌았다.
기꺼워하는 말, 기회라고 여기는 말, 조용히 웃음을 흘리는 말.
백련교의 잔당이 암중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가면을 뒤집어쓴 칠성교가 의적(義賊)을 자칭하는 세상이 다가온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모두 과거의 기록을 탐독했다. 앞으로 싸울 대적(大敵)은 천하를 뒤집어 놓았던 마교였다.
-알지 못한다면 반드시 당한다!
그 사실은 무림사가 증명했고, 멸문한 청성파가 보여 주었다.
하물며 지금 봉문한 아미파는 어떠한가?
그들의 시선이 자연히 곤륜파로 향했다.
칠성교와 치열하게 싸웠으며, 백련교와 양패구상한 곤륜파.
곤륜파라면 마교와 싸울 방법을 알고 있으리란 판단이었다.
-게다가 곤륜신성은 화산파에 있었다지?
일찍이 마인들과 싸워 이겼으며, 백련교주까지 보았을 곤륜신성.
그들 중에서 가장 먼저 백무량과 접촉한 문파는…….
“백 도우!”
“종남의 어르신이 왔거늘! 지금 무얼 하는가!”
양청교와 목허도장이 백무량의 처소를 두들겼다.
개인적인 친분이나 양심을 떠나서, 어제 있었던 일이 너무나도 궁금했던 탓이다.
양청교가 옆에 있는 목허도장을 흘낏 쳐다보았다.
“백 도우는 저와 친우이니, 잠시 뒤로 물러나 계심이 어떠신지요?”
“흥! 후배가 되어선 선배에게 양보를 하지 못하는 것이냐? 공동파의 도량이 겨우 그 정도였군.”
“말이 심하십니다!”
“아니, 가장 심한 건 해가 중천에 떴음에도 말 한마디 없는 곤륜신성이지!”
콧방귀를 뀐 목허도장이 처소의 문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파앙!
문의 경첩이 힘없이 풀렸다. 양청교로선 눈이 휘둥그레지는 기예였다.
“허어……!”
“이게 어르신의 연륜이라는 게다.”
어깨를 으쓱거린 목허도장이 문을 크게 열었다.
그 직후, 두 도사의 눈이 갸름해졌다.
본래 있어야 할 사람.
백무량이 처소에 없었다.
“백 도우는 어디로 간 거지?”
“허, 후배가 직접 찾아온 선배한테 말도 안 남기고 떠나?”
양청교와 목허도장이 허탈한 소리를 하는 와중에, 화산파의 일대제자가 그들에게 향했다.
“곤륜신성은 다른 처소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게 어딘데!”
목허도장의 고함에 일대제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장문인의 명입니다. 목허도장께서 종남의 어르신인 건 알고 있으나, 화산파에서 소란을 피우진 말아 주십시오.”
“끄응…… 그럼 낙매신검은 어디에 있느냐?”
“장로님께서도 처소를 옮기셨습니다.”
“어디 있느냐고!”
“저도 모릅니다.”
일대제자의 무덤덤한 대답에 목허도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선을 넘진 않았다.
일대제자가 말한 대로, 이곳은 화산파.
불만을 터트리면 온갖 지탄이 종남파로 향할 터였다.
그렇지 않아도 목허도장을 욕하는 말이 많았다.
낙매신검을 질투하여 날이 갈수록 추해지는 고수.
목허도장도 귀가 뚫려 있는 이상 들을 수밖에 없었다.
“칫!”
목허도장이 혀를 강하게 차는 사이, 양청교가 일대제자에게 다가갔다.
“백 도우와 낙매신검께서 같이 있는 겁니까?”
“옳지! 그 말 잘했다!”
목허도장의 탄성에 일대제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제가 모르는 일을 가지고 말할 순 없습니다.”
“하면 내가 화산을 이 잡듯이 뒤지면 되겠군!”
목허도장의 말에 일대제자가 입술을 비틀었다.
“그건 안 됩니다.”
“왜?”
“장문인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화산에 돌아다니는 걸 금지한 건, 폐허가 된 매화비원을 보여 주지 않기 위함이다.
하지만 목허도장은 그 말을 다르게 이해했다.
‘보아하니 곤륜신성 그놈이랑 낙매신검 둘이서 뭐라도 하는 모양인데, 나를 빼놓고!’
목허도장은 곧바로 칠지검협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일대제자가 뒤에서 뭐라고 외치기는 했지만, 듣지 않았다.
더 이상 그를 제재할 수는 없었다. 목허도장 또한 종남의 장로이기 때문이다.
‘백련교주가 종남파로 향하진 않았는지, 자세하게 들어야겠어.’
목허도장의 표정이 몹시 진지해졌다.
***
“이쯤이면 되겠군.”
낙매신검이 백무량을 데리고서 널찍한 공터로 향했다.
내공이 부족하긴 하지만, 생사결이 아닌 비무.
상대를 해하려는 의지만 없다면 적은 내공으로 많은 검을 나눌 수 있었다.
무엇보다, 백무량의 의지가 컸다.
“감사합니다, 제 억지를 받아 주셔서.”
낙매신검과의 비무가 끝나면 곧바로 곤륜파로 돌아가겠다.
그렇게 말한 백무량의 품에는 자소단이 담긴 함이 있었다.
‘아까, 웃음을 참느라 혼났어.’
자소단을 받는 대신 칠지검협에게 자신의 단련법을 말해 주었다.
그러자 칠지검협과 의원이 눈을 끔뻑였다.
백무량은 그저 곤륜산의 높은 곳에서 육체를 혹사하는 것뿐이니까.
명문의 체계적인 훈련과는 다르다. 단지 환경을 이용해서 근육을 쥐어짜는 게 전부였다.
두 도사가 서로 전음을 하던 게 끝나고, 칠지검협이 백무량에게 물었었다.
-곤륜산의 정기를 품는 거겠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으음…… 알겠네.
그것으로 백무량은 칠지검협에게 자소단을 두 개나 받았다.
어디 그뿐이랴?
매화비원에서 있었던 일로 인해 앞으로 십 년 동안 만들 자소단도 받을 예정이었다.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칠지검협의 배포에 얼마나 감동했던지.
백무량은 아직까지 자소단이 담긴 함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걸 본 낙매신검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훔쳐 가지 않으니 어디다 두게. 그대로 비무를 할 건 아니잖나?”
“알겠습니다.”
백무량이 아쉬운 표정으로 자소단을 돌 위에 두었다.
그때 낙매신검이 물었다.
“곤륜파로 돌아가면 무얼 할 건가?”
“대비해야지요.”
“……?”
“백련교주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칠성교가 야욕을 뻗칠 때까지 수련할 생각입니다.”
“……과연.”
대답을 들은 낙매신검이 목검을 들었다.
백무량 또한 호흡을 가다듬었다.
다음 순간.
쾅!
두 목검이 부딪쳤으나, 주변의 풍광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 발자국 하나 남지 않는다.
“……음!”
낙매신검이 탄성을 흘렸다.
백무량은 곧바로 앞으로 치달아서, 권각술을 펼쳤다.
그렇게 삼백 초.
낙매신검에게 무공을 아낌없이 펼친 백무량은 이후에 목허도장을 마주한 뒤 곤륜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사 년.
백무량이 약관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