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 (1)
이튿날, 정오.
백무량은 낙매신검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게 뭡니까?”
“매화비원의 위치를 자네에게 알려 줄 순 없잖나.”
검은색 안대.
특수한 처리를 했는지, 틈 하나 보이지 않는다.
백무량은 낙매신검에게 안대를 받아 들며 속으로 아쉬움을 표했다.
‘언젠가 다시 찾아올 생각이었는데.’
백련교주와의 조우, 매화비원에 감돌던 신비한 기운.
두 가지 모두 백무량에게 있어 놓칠 수 없는 기연이고, 궁리할 여지가 많았다. 가능하다면 섬서성에 들를 때마다 출입하고 싶었다.
‘이러면 혹시 틈이 생기지 않을까?’
백무량은 안대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면서 낙매신검에게 물었다.
“언제까지 있을 수 있습니까?”
“한 시진 동안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단 너무 멀어져선 안 되네.”
“알겠습니다.”
백무량은 낙매신검에게 예를 표했다.
화산파의 성지를 돌아다니는 데 감시하지 않겠다는 건, 순전히 낙매신검의 후의 덕분이다.
백무량이 두 손을 모아 올리자, 낙매신검이 일파의 장로답지 않게 경쾌한 웃음을 보였다.
“그걸 설득하느라 얼마나 어려웠는지 자네는 모를 걸세. 그러니 안대는 그만 만지작거리게, 구멍 안 뚫리네.”
“신기해서 만져 봤습니다.”
백무량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하곤 안대를 꽉 동여맸다.
꽤 강하게 문댄 것 같은데 빛 하나 새지 않았다.
턱.
백무량의 어깨에 놓인 둔탁한 손바닥.
“자, 이제 출발하지.”
낙매신검이 앞서 걸어가면, 백무량이 뒤따라간다.
화산이 워낙 날카롭고 길이 좁은지라 아주 느릿느릿하게 가야만 했다.
평소의 백무량이라면 인내하기 어려웠을 테지만, 낙매신검의 걸음걸이에서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매화보.
화산파의 대표적인 보법이자 매화검법을 받쳐 주는 뿌리.
백무량은 안대로 눈을 가렸기에 매화보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매화검의 화려함은 매화보의 단단함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구나.’
당장 구장명만 하더라도 매화검과 매화보의 형태는 완벽하지 않았나.
단지 그 테두리를 벗어나려는 노력이 부족했을 뿐이다.
백무량은 낙매신검의 매화보를 같이 걸음으로써 이해했다.
그렇게 이백 걸음.
말 한마디 없던 낙매신검이 입술을 달싹였다.
“자네의 오성(悟性)은 신기하기까지 하군.”
설마 낙매신검이 알아챈 걸까?
백무량은 어리숙한 목소리를 꾸몄다.
“……예?”
“하하, 그리 긴장할 필요는 없다네. 그냥 신기했을 뿐이네, 걸으면 걸을수록 내 걸음과 비슷해진다는 것이.”
백무량이 어색하게 웃었다.
안대를 쓴 채 낙매신검의 걸음걸이에 담긴 흐름이나 무학을 곱씹다 보니 어느새 비슷해진 모양이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하지 않겠다는 말은 안 하는군 그래?”
“거짓말을 하는 것보단 낫지 않겠습니까.”
낙매신검이 백무량을 어린 손자 보듯 했다.
그것도 장난기를 주체할 수 없는 손자.
“무학에 대한 호기심은 무인에게 있어 불가결하지. 하지만 앞으로는 주의하게. 불쾌하게 여길 사람이 많으니 말이야.”
낙매신검의 조언에 온기가 담겨 있다.
백무량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새겨듣겠습니다.”
“나이가 나이이니 주의로 끝낸 것일세.”
‘내가 지금 어려진 상태라서 다행이다.’
만일 외견이 정신적인 나이처럼 이립이었다면 어땠을까?
낙매신검의 물렁했던 태도가 서릿발처럼 차가워지는 걸 떠올렸다. 그것만으로 어깨가 으슬으슬했다.
마인을 베었을 때 보았던 초식과 자신을 꾸짖던 태도.
지금은 한없이 가볍고 유쾌해 보여도, 냉정해질 땐 화산파 무도(武道)의 극에 이른 절대고수의 풍모를 풍긴다.
백무량은 매화보를 이해하던 걸 멈췄다. 낙매신검이 껄껄 웃었다.
“이번은 괜찮네. 곤륜의 유망한 후배가 화산파 무공에 호기심을 드러내는 모습이 제법 좋았거든.”
“가, 감사합니다.”
“선을 넘는 말이긴 하네만, 화산파로 입문할 생각은…….”
백무량이 중간에 말을 잘랐다.
“넘으셨습니다.”
“어이쿠.”
낙매신검이 깜짝 놀랐다는 척, 높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차피 어느 쪽이든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장난이다.
그렇게 이야기의 물꼬가 터졌다. 낙매신검과 백무량은 매화비원으로 향하면서 여러 화제를 꺼냈다.
재능, 마인, 내력(來歷)에 이어서 무공까지…….
처음엔 농담으로 시작했지만 내력과 무공에 이르자 대화의 간격이 길어졌다.
그때 백무량이 가장 무거운 질문을 던졌다.
“무공이란 무엇입니까?”
“…….”
백무량은 눈이 가려져 있었지만, 낙매신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는 걸 호흡으로 느꼈다.
“무공이란 무엇인가, 어려운 화제군.”
“선배님 말씀대로 무인이라면 불가결하긴 하지요.”
“그래, 이 나이쯤 되면 매일 저녁마다 머릿속에서 꺼내는 화두이긴 하다네.”
“저는 새벽마다 꺼냅니다.”
“역시 나이가 어려서 일찍 일어나서 그런가? 나는 요새 밤잠이 없어서 말이야.”
가볍게 농담을 던진 낙매신검이 허심탄회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무공을 어떻게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있겠나. 사람마다 깨달음이라 말하고, 노력이라 칭하고, 재능이라 당당하게 외치지. 나는 어느 쪽도 아니었네.”
“그러면 선배께서는……?”
“처음부터 있는 쪽이었지.”
낙매신검이 발걸음을 멈췄다. 백무량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매화의 춤, 흩날리는 냄새, 수십 그루의 생기(生氣).
매화비원의 입구에서 낙매신검이 하려던 말을 이었다.
“사문의 선배들과 후배들은 매화비원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고 하지. 깨달음과 노력의 방향성, 아니면 심상을 구현할 재능을 말이야.”
“매화비원은…… 그러니까, 화산파의 도사라면 부족한 것을 얻어 갈 수 있다는 겁니까?”
“그런 셈이지.”
그렇게 말하는 낙매신검의 목소리가 쓸쓸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게 없었다네. 원래 매화검의 심상을 가지고 있었고, 재능이 있었고, 노력도 충분히 했네. 내가 매화비원에서 본 것은 그저 허상이었다네.”
이십사수매화검법을 형상화한 성지, 단지 그뿐이었다며.
낙매신검이 백무량의 안대를 풀었다.
“이 말을 들은 선배 한둘은 역시 재능이 전부였다며 웃었고, 후배는 질투했네. 원래 모든 걸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화산파 제일고수 낙매신검.
강호십대고수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신위.
수많은 호사가들이 그를 현세대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으로 칭한다. 전설상의 천무지체가 있다면 낙매신검일 거라며 확신하면서.
하지만 안대를 벗은 백무량이 본 낙매신검은 방랑자였다.
“화산파의 성지, 매화비원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한 나는 앞으로 어떻게 강해지면 될지 모르고 있다네. 이정표를 잃은 셈이지.”
이정표를 찾지 못해, 길을 잃어버린 방랑자.
백무량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가 다음에 할 말이 무엇일지 알아 버렸다.
“자네라면 조언해 줄 수 있지 않겠나?”
‘어제 있었던 일이 낙매신검을 자극했구나.’
백무량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엊그제 자신이 무너뜨린 자소원.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한 건 모르지만, 백무량은 그때 검해의 심상을 떠올렸다. 백련교주와의 생사투 이후로 두 번째였다.
그걸 본 낙매신검의 마음이 어땠을까?
자기보다 더 재능이 뛰어난 무인이라면 매화비원 대신 이정표가 되어 줄 거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 대답이 낙매신검의 말이었고, 얼굴이었다.
“부탁하네.”
반쯤 잃어버린 향상심을 붙들고 있는 낙매신검.
낙매신검의 갈급한 표정을 본 백무량은 잠시 침묵했다.
“저는 아직 후기지수에 불과합니다.”
“경지는 구파일방의 고수보다 뛰어나지.”
“그건 잠깐의 깨달음이었고, 일초였습니다. 선배께서 저를 손쉽게 막으셨지요.”
“이곳에서 내 진심을 보일 상대가 자네밖에 없다네. 십 대에 불과한 자네, 곤륜신성밖에 없단 말이야.”
낮았던 낙매신검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졌다. 복잡한 감정을 담은 격앙이 느껴졌다.
백무량은 어느새 자신의 입술이 말라붙었음을 깨달았다.
‘구천검 시절에도 이런 건 겪지 못했는데.’
현 강호의 최고수가 조언을 갈구하다니.
어린 외견에 너무나 높은 경지로 올라서일까? 아니면 잔도에 떨어지고도 살아남은 행운이 이어진 걸까?
어느 쪽이든 복잡하다.
낙매신검에게 은혜를 입히거나, 적대를 받거나. 백무량은 이번 선택으로 많은 것을 얻거나 잃을 수 있음을 알아차렸다.
“……말로는.”
첫 마디를 떼는 것도 힘겨웠다. 하지만 흉심에 있는 말을 한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편해졌다.
백무량은 낙매신검과 시선을 마주했다.
“말로는 조언을 드릴 수 없습니다. 그건 찰나의 한 수였고, 선배의 뜻을 꺾기 위한 의지였으니까요. 제가 소화하지 못한 것입니다.”
“…….”
“하지만 검으로는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백무량의 손이 잔도에서 부러진 가슴께를 두드렸다.
“이것이 완전히 붙고, 몸 상태가 나아지는 그때…… 선배님과 검을 겨루겠습니다.”
“……내 억지를 받아 줘서 고맙네.”
이제야 진정이 된 것일까.
낙매신검이 평소처럼 유쾌하게 웃었다. 하지만 숨길 수 없는 어색함이 있었다.
“한 시진 동안 자유롭게 있어도 된다고 했지만, 그건 잊게. 내가 힘을 써 놓을 테니 소득이 있을 때까지 있어도 되네.”
“제가 그때 펼쳤던 것을 소화할 때까지 말입니까?”
“……가능하다면, 뭐, 부담을 주려는 건 아닐세.”
그렇게 말하는 낙매신검의 표정이 묘하게 기대에 넘쳤다.
자신의 성장 속도가 워낙 빠르다 보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란 생각이 있는 듯했다.
백무량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답보에 빠진 무인을 꺼낸다. 말은 쉽지만 간단한 게 아니었다.
특히 그가 낙매신검이라면, 간단히 검을 나누는 것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많은 무론과 경험, 그리고 깨달음.
그것이 충분하지 않으면 단서조차 알지 못하는 게 낙매신검의 경지였다.
‘화산파의 무공으로써 전인미답의 경지에 향하려는 건가.’
같은 도문으로서 응원해 주고 싶은 입장이지, 조언자의 입장이라면 자연히 부담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백무량은 낙매신검의 눈동자에 깃든 열망을 보고 고개를 슬쩍 돌렸다.
“부담스럽습니다.”
“백련교를 상대로 호투를 벌이고, 칠성교의 습격을 막아 낸 곤륜신성 아닌가! 이번에도 제법 기대하고 있다네.”
“부담스럽다니까요.”
“클클…….”
짓궂은 웃음을 흘린 낙매신검이 등을 돌렸다. 화산파의 거인(巨人)으로 불리는 고수답지 않게 약간은 초라해 보였다.
‘높은 경지로 향할 이정표를 잃은 고수라…….’
만일 자신이었다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백련교와 칠성교가 강호에서 암약하고 있는 이때에, 벽조차 마주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면…… 그야말로 무인의 절망이리라.
백무량은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도와줄까.’
청성파가 이화겸에게 멸문한 이상, 다른 문파일지라도 마교에게 자유롭지 않다.
연무지회에선 잔뜩 허세를 부렸겠지만 그들 또한 사문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을 터였다.
그 점에서 낙매신검은 솔직한 사람이었다.
자기가 갈 길을 잃었다고 말했으며, 자기보다 한참 어린 백무량에게도 조언을 구했다.
‘나중에 내 어려움을 보고도 모른 척할 사람은 아니야.’
결정을 내린 백무량은 매화비원을 쳐다보았다.
이곳에 어떤 안배가 있을지 알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주백천이 남긴 안배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백무량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매화비원이 하나의 심상과 같다고 말했었지.”
공교롭게도 곤륜파의 검해 또한 심상의 형태이지 않던가.
백무량은 낙매신검이 보였던 열망을 떠올렸다.
‘그만한 고수가 그런 열정을 보이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지금은 낙매신검보다 하수일지언정, 다음엔 그보다 위에서 조언자가 되리라.
백무량은 당당한 걸음으로 매화비원 안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