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115화 (115/275)

매화비원 (3)

마인의 정수리에서 솟구친 피가 매화 잎을 적셨다. 삽시간에 주위 삼 장이 붉게 물들었다.

그야말로 찰나였다.

‘손목과 발목의 힘줄을 끊는 팔(八) 자결을 곧바로 아래에서 위로 올려쳐서 잇다니.’

낙매신검의 섬전과도 같은 칼솜씨에 백무량이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화려하고 주저함이 없는 검이다.

만일 자신이 저 검과 마주했다면 어땠을까?

백무량은 낙매신검에게 호승심을 느꼈다. 만전의 상태라면 그럭저럭 해볼 만했다.

그때 낙매신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몸은 괜찮나?”

“다행히 장로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말을 이어 가던 백무량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낙매신검이 백련교주를 본다면 많은 설명이 필요했다.

하지만 어느새 백련교주의 신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백무량이 의아한 표정을 짓던 차에 낙매신검이 어깨를 두드렸다.

“어딜 보는 겐가?”

“아, 아닙니다. 그저 이곳이 아름다워서 그랬습니다.”

“자네의 심상이 단단한 건 알지만, 이곳에 홀리면 안 되네.”

“홀리다니요?”

“본래라면 외인(外人)의 출입은 엄격하게 금하나, 불상사가 생겼으니 어쩔 수 없지.”

낙매신검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은 화산파의 성지인 매화비원이네. 매화검법이나 심상을 수련하는 데 큰 도움을 주지.”

“하면 여기 있는 잎들은 뭡니까?”

“한번 써 봤으면 알겠지만, 수련 중에 생기는 상처를 치유하는 데 쓴다네. 부러진 뼈가 되돌아가진 않지만 말이야.”

“허어…….”

백무량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사대사행에 비해 매화비원은 자신에게 도움이 될 깨달음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다 생각이 양청교에게 미쳤다.

“양 동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공동의 후배라면 지금쯤 화산파에 도착했을 걸세. 자네를 구해 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서 알 수 있었다네.”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겠군요.”

그 말에 낙매신검이 피식 웃었다.

“나물을 캐는 노파도 잔도를 눈 감고도 건너거늘, 젊은 도사가 겁을 집어먹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네.”

“하하…….”

백무량은 어색하게 웃었다. 원체 겁이 많았는데 자신이 잔도에서 떨어졌으니 오줌을 지렸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떻게 건너긴 건넜나 보네.’

화산파의 도사가 사람을 업고 잔도를 건너는 경우는 없다.

잔도조차 건너지 못한다면 화산파에 출입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니까.

그걸 떠올린 백무량이 낙매신검에게 물었다.

“다시 올라가서 잔도부터 건너면 되겠습니까?”

“그 몸으로?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엄중한 목소리로 다그친 낙매신검이 백무량의 한쪽 어깨를 잡아끌었다.

백무량의 입에서 신음이 저절로 나왔다.

“꺼으윽.”

“아파도 참게.”

‘연무지회에서 만났을 때는 온후한 성격인 줄 알았는데.’

화산에서 만난 낙매신검은 화산파 도사가 그렇듯이 잘 벼려진 칼과 같다.

백무량이 호흡을 고르는 가운데, 낙매신검이 말을 걸었다.

“후배.”

“말씀하십시오.”

“첫 마인을 벨 때의 보법 말일세. 공동파의 보법인가?”

“아닙니다. 곤륜파의 보법입니다.”

“그런가? 내 보기에 공동파처럼 많은 것이 담겨 있어서 말일세.”

그 말에 백무량은 속으로 흐뭇하게 웃었다.

낙매신검의 말대로 아까 밟은 일보(一步)는 운중용형보 그 자체였다.

이를테면, 허공을 때리고[打] 머무르고[정] 흐르는[流] 과정이 모두 담긴 일보.

공동파 무학에서 배우고 싶었던 장점을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접목한 셈이다.

‘예전에도 천재 소리는 들었지만, 이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백무량은 이 사실을 낙매신검에게 숨겼다.

굳이 자기가 잘났다고 해 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

‘화산파에서도 무언가를 배워 갈지도 모르지.’

사형이 남긴 그림이 있을뿐더러 낙매신검의 가르침이 남아 있지 않던가.

백무량의 내심이 쿵쾅거렸다.

무인에게 있어 강해진다는 건 평생 질리지 않는 환희였다.

“후배, 부탁이 하나 있네.”

낙매신검의 목소리에 백무량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무리가 되지 않고, 무보수만 아니면 들어드리지요.”

“맹랑한지고.”

헛웃음을 터트린 낙매신검이 뜻밖의 사람을 거론했다.

“본문의 장문제자를 아는가?”

“장로님께서 저한테 부탁할 정도라면, 매화비룡 말입니까?”

“잘 아는군. 그래. 그놈의 코를 한번 제대로 꺾어 주게.”

절벽에서 자기 새끼를 밀어 떨어트린다는 건가?

백무량은 낙매신검의 의도를 쉬이 이해할 수 없었다.

굳이 자신과 싸움을 붙이는 것보다 자기가 직접 가르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게, 제가 장로님한테 가르침을 받으러 왔는데, 매화비룡을 꺾으면 화산파의 제자들이 저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못 이긴다는 말은 하지 않는군.”

“그만한 실력이 없으면 연무지회에서 나가지도 않았을 겁니다.”

“과연.”

낙매신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무지회에서 본 백무량의 검무는 심오한 면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실력 좀 있다고 오만불손하게 구는 매화비룡과는 다르다.

‘곤륜신성이 아니라 화산신성이었다면 좋았을 터인데.’

속으로 입맛을 다신 낙매신검이 백무량의 어깨를 쥐었다. 그러자 백무량이 새된 소리를 내며 투덜거렸다.

“이기라면서 왜 괴롭히십니까? 그보다 제가 매화비룡을 꺾으면 뭘 해 주실지 말씀해 주십시오.”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겠네.”

“……!”

낙매신검의 선언에 백무량이 깜짝 놀랐다.

화산파의 장로이자 강호십대고수인 낙매신검.

그가 가진 권한이 얼마나 크겠는가!

‘사형의 그림을 공짜로 받아 갈 수도 있겠어.’

백무량이 속으로 손익을 셈하자, 낙매신검이 피식 웃었다.

“일단은 빨리 나아야 하지 않겠나?”

“사나흘이면 붙을 겁니다.”

부러진 뼈가 사나흘 만에 제자리를 찾아가서 붙는다니.

백무량이 농담을 하는가 싶어, 낙매신검은 짧게 경고했다.

“……선배에게 거짓말을 고하면 안 되네.”

“그게, 가능합니다.”

백무량은 어색하게 웃었다.

삼 년 전에 취한 태청신단과 사대사행에서 얻은 선기, 태청신공의 대주천이라면 회복력을 크게 높일 수 있었다.

백무량의 표정을 흘깃 곁눈질한 낙매신검이 의문을 표했다.

“곤륜파는 몸을 돌보는 좌선좌공보다는 몸을 강건케 하는 동공이 아니던가?”

“오래전부터 전해지는 특별한 영약을 취했습니다.”

“곤륜이라면 태청신단이겠군.”

백무량은 낙매신검의 학식에 혀를 내둘렀다.

무인 대부분이 운룡대팔식과 구천화우검, 태청신공을 제외하면 모르기 마련인데, 낙매신검은 곤륜파의 자세한 것까지 알고 있었다.

‘그게 나쁜 건 아니지만, 뭔가 좀…….’

낱낱이 까발려진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백무량이 눈을 끔뻑이자 낙매신검이 껄껄 웃었다.

“일문의 장로라면 이 정도 학식은 기본일세. 하물며 곤륜파는 종남 못지않은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당연히 알아야지.”

“장문인께서 그 말을 들으셨다면 좋아하셨을 겁니다.”

“좋아. 당연하지만 부탁은 비밀에 부쳐야 하네.”

“알고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낙매신검이 화산파로 향하는 계단에 올랐다.

“슬슬 귀를 막게.”

“……예?”

“선배가 그러라는 데 다 이유가 있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낙매신검이 실언할 사람은 아니다.

백무량이 두 손으로 귀를 막기가 무섭게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부쩍 수척해진 양청교가 낙매신검에게 허겁지겁 달려오는 소리였다.

“아이고! 장로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아직 살아 있…….”

낙매신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양청교는 백무량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보게! 말 좀 해 보게-!”

“……시끄.”

“뼈가 움푹 들어갔군! 맙소사! 그러니까 조심하라니까!”

“시끄럽다!”

백무량은 고함을 버럭 내질렀다. 어찌나 귀찮게 구는지 저도 모르게 태청신공을 운용했다.

이에 양청교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는 ‘무량청정’을 중얼거렸다.

“죽은 사람이 말을 하는구나. 이럴 수가…….”

“이놈이 망령이 들렸나, 정신 차려라! 좀!”

“잔도에서 떨어지면 반드시 죽는다고 들었는데…….”

“아니, 이런 미친놈이…….”

백무량이 재차 입을 여는데, 내상의 여파가 다시 찾아왔다.

양청교에게 고함을 내지른 탓이다.

주르륵.

핏물이 백무량의 입술을 타고 흘렀다.

“아이고, 자네!”

양청교가 다시 시끄럽게 주절거리려는 차에 낙매신검이 살기를 흩뿌렸다.

“적당히 하게. 당황스러운 건 알겠으나, 내가 옆에 있지 않나.”

“죄, 죄송합니다, 장로님. 저는 그저 당황해서…….”

“다시 시끄럽게 군다면 하산시키겠네.”

“…….”

양청교가 입을 꾹 다물었다.

백무량은 가슴에 얹혀 있던 돌덩이가 쑥 내려가는 기분을 느꼈다.

“장로님이 계셔서 다행입니다.”

“듣고 있는 내가 주화입마가 올 뻔했네.”

“……걱정한 게 그리 잘못입니까?”

양청교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둘은 그를 완전히 무시했다.

“장로님, 화산파 내에서 돌아다녀도 되겠습니까?”

“일단은 의원에서 몸을 다스리게. 거동이 가능해질 때 허락하겠네.”

“감사합니다, 장로님.”

백무량은 속으로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한 시진 뒤.

백무량이 병석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만히 있다 보면 좀이 쑤셨고, 사형이 남긴 그림이 어디 있는지 찾아볼 생각이었다.

‘무명의 도사가 남긴 그림을 줘라, 이런 식으로 말하긴 그렇잖아. 그때 둘러보려면 한참 늦어.’

화산파의 전각에 있는 그림의 숫자는 가히 수백이 넘는다.

사실상 매화비룡의 비무가 무서운 게 아니라, 그걸 뒤적거리는 시간과 고생이 두렵다.

백무량은 여유가 날 때마다 계속 전각으로 향했다.

그것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니 학도사가 백무량의 얼굴을 외웠다.

“또 왔는가?”

“예.”

“자네처럼 시서화에 관심이 있는 후배가 있었으면 좋으련만, 요즘 도사들은 무공밖에 모르니. 쯧쯧. 통탄할 세태가 아닌가?”

“아, 예…….”

백무량은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자신도 사형이 남긴 그림이 아니었다면 평생 시서화와 인연이 없을 도사였다.

그걸 모르는 학도사가 백무량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무얼 찾는지는 몰라도 화산에서 많이 얻어 가길 바라네.”

“감사합니다.”

“혹여 궁금한 게 있다면 뭐든 물어보게!”

‘물었다간 내 밑천이 완전히 드러나겠지.’

학도사의 착각을 굳이 정정해서 호감을 없앨 필요가 없다.

백무량은 학도사에게 예를 표하고는 전각 안쪽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제법 헤맸지만, 이젠 아니었다.

“그래도 너무 많아.”

저번에 보았던 그림은 제외하고, 약 백이십 점.

무명의 도사가 남긴 그림만 헤아린 숫자였다.

백무량은 기가 질린 표정으로 전각 곳곳을 돌아보았다.

‘누가 화산파 아니랄까 봐, 무슨 다 매화나무야?’

학식이 있는 도사라면 그림마다 담긴 화풍이나 속뜻을 알아차리고 감탄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백무량이 보기에는 그저 조금씩 다른 매화나무였다.

그림에 대한 학식이 부족할뿐더러 하나하나 붙잡고 볼 여유가 없었다.

‘매화비룡과의 비무가 언제 시작될지 몰라.’

전각에 도착하기까지 자신을 지켜보던 눈이 다섯 쌍은 넘었다.

아무리 길어도 이틀.

그 안에 사형이 남긴 그림을 찾아야만 한다.

백무량의 시선이 양옆을 누볐다. 성급해지려는 마음을 억누르고서 복도를 거닐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하늘이 완전히 깜깜해지자 일 층에 있던 학도사가 백무량을 찾아갔다.

“편의를 봐주는 것도 여기까지네. 이제 슬슬 나오게.”

학도사가 가까이 다가왔음에도 백무량은 심경이 복잡한 눈으로 한 그림을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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