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비원 (2)
“크으윽…….”
고통은 사라졌지만 잔도에서 추락한 충격은 여전히 남아 있다.
뒷머리를 부여잡은 백무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장 먼저 살펴야 할 것은 절벽에 부딪친 상처.
스윽.
백무량은 도복을 위로 걷었다. 낙상으로 복부가 피멍으로 물든 데다 부러진 갈비뼈가 안쪽으로 휘었다.
만약 태청신공을 계속 운용했다면 어땠을까?
‘끔찍하군.’
고개를 내저은 백무량이 코를 벌름거렸다. 은은한 매향이 콧속을 헤집고 전신을 순환하는 듯했다.
어디 그뿐이랴.
자색으로 물든 하늘이 현실감을 떨어뜨렸다.
낯선 세계의 풍경이 생경하다. 절벽에서 떨어지며 생긴 상처가 아니라면 꿈이라고 여겼을 광경이었다.
“거기 누구 있소?”
백무량은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것만으로 폐부에 들어찬 핏물이 턱까지 올라온다. 한차례 컥컥거린 백무량이 매화나무에 손을 가져갔다.
휘잉.
그저 허상이었다는 듯 손이 매화나무를 통과했다. 백무량의 균형이 앞으로 기울어지고, 넘어졌다.
이때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파스스스…….
땅바닥에 깔려 있던 매화 잎이 위로 붕 떠올랐다. 사람이 일부러 던져도 나오지 않을 풍경이 백무량의 눈앞을 장식했다.
“……허.”
자색의 하늘 아래에 흩날리는 매화라.
백무량은 잠시 감탄했다.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이 공간이 빚어내는 광경은 그가 본 어떠한 것보다도 화려했다.
그러다 매화 잎 하나가 부자연스럽게 피멍에 달라붙었다.
“……!”
설마 이 공간이 누군가의 주술은 아닐까?
백무량은 다급히 손가락으로 매화 잎을 떼어 내려고 했다. 하지만 한번 붙은 매화 잎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 동안 매화 잎과 씨름하던 백무량이 한숨을 내쉬었다.
“화산에 이런 곳이 있다고 듣지 못했는데.”
손등의 운룡은 여전히 빛나고,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곳이 사대사행 같은 성지거나 근처에 마인이 존재한다는 뜻이리라.
백무량은 주변을 경계하면서 매화 잎을 곁눈질했다.
그렇게 일다경째.
시뻘겋게 물든 매화 잎이 저절로 툭 떨어졌다.
‘상처가 치유되었다?’
매화 잎이 달라붙었던 피멍이 깔끔하게 지워졌다.
그걸 본 백무량은 매화 잎을 한 움큼 쥐고는 온몸에 뿌렸다. 그러자 매화 잎이 상처 입은 곳에 자리 잡았다.
“신기하군.”
어이가 없어서 너털웃음을 짓고 말았다.
사형의 안배를 취하기 위해 화산을 오르다가 습격을 당했거늘, 절벽에서 떨어져서 도착한 곳이 성지라니.
기연도 이런 기연이 없다. 주백천이 글에 쓴 대로 자신에게 무언가 천명이 있는 게 분명했다.
“자, 그럼 이제 여기서 어떻게 나가냐는 건데.”
백무량의 시선이 매화나무숲으로 향했다.
매향이 흐르지만 매화나무는 실재하지 않는 장소.
사대사행처럼 화산파만의 신령한 공간일 것이리라.
백무량은 매화 잎을 온몸에 덕지덕지 붙인 채 걸음을 재촉했다.
‘화산에서 습격한 이상, 확실하게 끝을 보려고 하겠지.’
화산파의 손님을 공격했다는 건 엄청난 각오를 했다는 뜻.
치명상만 입히고 가기에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확인 사살을 하기 위해서라도 백무량을 찾고 있을 게 분명했다.
백무량은 몸을 움직였다.
그저 걸었다. 이곳이 정녕 선경이 아닌 이상 걷다 보면 바깥으로 향하리란 생각이었다.
그러는 동안 매화나무숲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어떤 성지일까.”
청성의 사대사행은 도사에게 고행을 준다.
곤륜의 검해는 도사에게 곤륜파 무학의 정수를 가르친다.
하면 매화나무로 가득한 이곳은 무엇을 위해 있는가.
‘여기서 무언가를 얻어 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백무량은 이곳저곳을 거닐었다. 길 하나 없이 빽빽한 나무, 자색의 하늘은 길을 헤매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후두둑.
걷다 보니 어느새 치료가 끝났다. 몸 구석구석에 붙어 있던 매화 잎이 떨어져 나갔다.
“으윽.”
백무량이 손으로 뼈가 부러진 부분을 매만졌다.
애석하게도, 매화 잎은 출혈을 잡을 뿐 뼈를 붙이진 못했다.
이대로 싸웠다간 다시 내상을 입으리라.
혀를 가볍게 차고는 기감을 사방으로 풀었다.
‘출구가 어디건 어차피 화산이겠지.’
일단은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급선무다.
한참을 걷던 백무량은 눈이 번쩍 뜨이는 걸 느꼈다.
“코가 삐뚤어질 정도의 매향이라.”
선기가 집중된 곳일까?
백무량의 걸음이 저절로 북쪽으로 향했다. 가까워질수록 손등의 운룡이 뿜어내던 빛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기이한 일이다.
사대사행에선 거의 횃불처럼 빛나던 것이 왜 지금은 꺼진단 말인가.
그곳까지 조심스럽게 움직인 백무량은 뜻밖의 사람과 마주했다.
‘……백련교주?’
백련교주가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옷이 해지고 얼굴엔 근심이 가득하다. 과거에 보았던 자신만만함과 오만함은 그에게 없었다.
권태와 무료(無聊).
칠십여 년이 지나도 여전히 남아 있는 절대적인 기세.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만전의 상태도 아니고, 갈빗대가 부러진 몸으론 싸울 수 없었다.
다시 한 걸음, 백무량이 물러나던 그때.
“누구인가?”
백련교주가 입을 열었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이곳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는 줄 몰랐군. 그래, 몇 년이 지났는가?”
“…….”
백무량은 침을 꿀꺽 삼켰다. 백련교주는 지척에 누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기색이었다.
“누구냐고 물었어.”
백련교주가 짐짓 노한 기색으로 말한다. 그가 자그맣게 말아 쥔 주먹에는 단천(斷川)의 힘이 서려 있었다.
예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그렇기에 백무량은 어깨와 허리를 바르게 폈다.
“백무량을 기억하느냐?”
“……백무량?”
이름을 자그맣게 중얼거린 백련교주가 고개를 기울였다.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났어. 얼굴을 보여 주면 알 것 같군.”
그 말에 백무량은 백련교주에게 다가갔다. 운룡의 빛은 완전히 꺼졌고, 그의 주위로는 선기조차 침범하지 못했다.
어딜 보나 불길한 징조다. 정상적인 정신을 가진 무인이라면 그에게 다가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백무량의 보보는 당당했다.
“눈앞에 왔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련교주의 신형이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그가 백무량의 얼굴에 주먹을 내지른 뒤에야 소리가 울렸다.
꽈과광!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울린다. 매화나무가 수많은 잎이 떨어뜨리며 가지를 흔들었다.
그 모습이 마치 숲 전체가 우는 듯했다.
하지만 백무량에게 백련교주의 주먹이 전혀 닿지 않았다.
백무량과 백련교주가 숨 쉬는 세계가 다른 것 같았다.
“죽었나?”
백련교주의 말에 백무량은 대답했다.
“아니.”
“그러느냐, 거참 아쉽군.”
백련교주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가늘게 뜬 그의 눈이 검게 멀어 있었다.
“이곳에 오랜 시간 동안 있으면서 많은 이름을 잊었다. 하지만 네 이름은 머리에 남더군.”
“…….”
“너는 어땠나? 나를 원망하고 증오했나?”
백련교주의 물음에 백무량은 입술을 짓씹었다.
육시랄 놈, 사문의 원수 등 수많은 관용구들.
그걸 알면서도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백련교주에게 좋을 대로 대답해 주고 싶지 않았기에, 백무량은 그에게 반문했다.
“내가 어떻게 살아 있는지 묻진 않느냐?”
“하하, 수백 년 동안 이곳에 붙들려 있는 내가 있는데, 사람 하나쯤 되살아난다고 뭐가 이상하겠느냐.”
‘……칠십 년이 아니라 수백 년?’
백무량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백련교주가 어딘가에 갇혀 있는 듯했다.
그걸 보니 머릿속에서 연결이 되었다.
‘사실 이화겸이 반라 상태였던 것도 이상했어.’
칠십여 년 동안 강호에서 암약했을 백련교의 좌호법이 그렇게 추레한 모습으로 있을 이유가 없다.
한데 지금 백련교주를 보니 어딘가에 갇혀 있는 모양새였다.
‘내가 만났던 마인 중에 칠성교가 있었지.’
사실, 백련교는 칠성교처럼 표식이랄 게 없었다.
그저 마공을 쓰면 백련교도라고 판단했다. 사천당가에서 마주한 석두와 요안의 남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면 어떨까.
백무량이 심각한 표정을 짓는 사이, 백련교주가 물었다.
“왜 갑자기 말이 없느냐? 구천검, 묻고 싶은 게 없느냐?”
“나오지도 못할 놈한테 말을 걸어 봐야 뭐 하겠나. 거짓말에 속고 싶지도 않아.”
“대곤륜의 도사라는 녀석이 의심이 많고 속이 옹졸해서야 어찌 대도(大道)를 깨닫겠느냐?”
“마교의 교주가 할 말은 아니지.”
그 말에 백련교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예나 지금이나 너희는 우리 백련교를 마교라고 칭하는구나. 통탄할 일이다.”
“평범한 양민들을 죽여 놓고 마교가 아니라고 발뺌할 테냐?”
“그마저도 백련교가 뒤집어쓴단 말이냐.”
백련교주가 한탄 어린 음색으로 중얼거렸다.
백무량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거짓말이라는 거냐?”
“그래. ……뭐, 너희는 믿고 싶은 대로 믿겠지만 말이다.”
“곤륜산에 불을 지른 놈들이 사람을 안 죽였다고 하면 믿어 주겠냐?”
“하하! 그건 그렇지.”
호쾌한 웃음을 터트린 백련교주가 다시 제자리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네가 망령이든, 그놈이 보낸 환상이든 간에 참으로 값진 시간이었다. 앞으로 수십 년은 이 기억으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겠어.”
그 말을 들은 백무량이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왜 갇힌 것이냐?”
“내가 왜.”
“뭐라고?”
“내가 왜 너에게 말해 주어야 하느냐?”
백련교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그의 초점이 백무량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했다.
‘나는 저놈이 보이지만, 저놈은 아니구나.’
그 사실을 깨달은 백무량은 잠시 숙고하고는 백련교주에게 답했다.
“그래야 내가 너를 죽일 수 있으니까.”
“하하, 하하하하!”
광소를 터트린 백련교주가 한쪽 입술을 비틀었다.
“그래. 네 말대로 지루해서 죽고 싶을 지경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야.”
“그렇다면…….”
“하나 그럴 수 없다.”
백무량의 말을 딱 잘라 낸 백련교주가 짧게 대답했다.
“나는 백련의 교주로서 할 일이 남아 있다. 천하가 나를 기다리고 있으며, 날 이곳에 밀어 넣은 백련의 원수를 멸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니, 너에게 죽을 수 없다.”
“…….”
백무량은 백련교주의 목소리에서 한과 의지를 읽었다. 그라면 지옥에 끌려갔다 하더라도 반드시 기어오를 것만 같았다.
그때 백련교주가 물었다.
“나와 싸운 이후로 개화하였느냐?”
“……그건 왜 묻느냐?”
“나를 죽이려거든 천하를 검 아래에 둘 수준은 되어야 할 것이다.”
강호십대고수를 능가하는 무인.
그게 아니고서야 자기를 이길 수 없다며, 백련교주가 딱 잘라서 말했다.
“너에게는 그런 가능성이 보였지. 그래서 죽였거늘…… 용케 살아나서 내 말상대가 되어 주는구나. 좋다. 한 번은 살려 주도록 하지.”
“누구 마음대로 그런 걸 정하느냐!”
백무량의 고함에 백련교주가 끌끌 웃었다.
“말상대를 해 준 대가로 하나 알려 주지.”
“네가 누구에게 갇혔는지 말이냐?”
“아니.”
백련교주가 순간 백무량의 어깨를 노려보았다.
“뒤다.”
‘저놈, 처음부터 내가 보였는데 거짓을……!’
백무량은 생각을 중간에 멈췄다.
그 말대로 바로 등 뒤에서 검을 내리치는 존재가 있었다.
“죽어라!”
“……!”
위기의 순간에 백무량은 한 걸음을 옆으로 내밀었다.
그러나 단순하지는 않았다.
양청교가 펼쳤던 검법처럼, 단 일보에 많은 것이 담겼다.
운중용형보의 세 초식.
그것들이 모두 담긴 걸음이 허공에 미끄러졌다.
백무량을 급습한 남자가 깜짝 놀라서 외쳤다.
“허공답보!”
백무량의 시야에 가면을 쓴 마인이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우수가 백선신검으로 향했다.
운중용형보를 담은 한 걸음에 이어지는 일 검.
스걱!
구천화우검의 이 초, 창천명월이 마인의 몸을 베었다.
‘담았다!’
백무량은 직감했다.
지금 펼친 일수(一手)가 운중용형보의 경지를 한층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하리란 것을.
그러나 상황이 좋지 않았다.
“쿨럭!”
부러졌던 갈빗대가 가슴팍을 찔렀다. 가까스로 멈췄던 출혈이 일어나며 비릿한 냄새가 올라왔다.
백무량의 눈앞이 흐려지는 순간.
“신중을 기하길 잘했어.”
다른 곳에서 숨어 있던 마인이 백무량에게 달려들었다. 앞서 마주했던 마인들보다 더욱 큰 가면을 쓰고 있었다.
이자야말로 진짜다.
백무량이 힘없이 검을 들었다. 심각한 내상이었지만 이대로 죽을 순 없었다.
그렇게 두 검이 부딪치려던 그때였다.
“그만.”
스걱!
낙매신검이 마인을 일도양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