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비원 (1)
일식경 동안의 비무가 끝나고, 백무량은 양청교에게 천을 건넸다.
계속해서 검법을 펼친 탓에 그의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었다.
이에 양청교가 불만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자네는 왜 땀 하나 흘리지 않았나?”
“그게…….”
‘육체는 이미 칠십여 년 전에 완성한 그대로니까.’라고 대답한다면 망령이 들렸다고 욕할 터였다.
세상이 천재라고 말한다면 그냥 긍정하는 편이 낫다.
백무량은 그냥 가만히 웃기만 했다. 그러자 양청교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도 사문에서는 잘나가는데 강호는 넓구나.”
“나이에 비해 뛰어난 건 맞아.”
“나이에 비해? 누가 들으면 자네가 이립은 된 줄 알겠어!”
“……하하.”
백무량은 맥없이 웃었다.
나이는 비슷하다지만, 자기도 모르게 어른의 시점으로 말하게 되었다. 그게 더 편하기도 했다.
“우리 문파 장로님이랑 자네랑 크게 다르지가 않아.”
“그럴 수도 있지.”
백무량이 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기자 양청교가 낄낄 웃었다.
“비무의 성과는 있었나?”
“공동파의 무공에 대해 잘 알게 되었지.”
“본 문의 무공이 어떻던가?”
“많이 담더군. 흘러넘칠 정도로.”
양청교가 깜짝 놀랐다. 백무량의 말은 공동파의 장로들이 하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 사형께서 그렇게 말해 주었나?”
“말해 주기는. 아무리 그래도 고 선배가 나한테 공동파의 무론을 알려 주진 않지.”
“현천신장은 배웠잖아.”
“…….”
백무량은 할 말을 잃었다.
하긴, 내기의 결과라고는 하나 공동파의 절학 하나를 거의 도둑질하듯 배우기는 했다.
그 모습을 본 양청교가 짓궂은 목소리로 놀렸다.
“장로님 같은 말버릇에, 현천신장에, 공동파의 도사도 함께 겸하는 게 어떤가?”
“그만 놀리게. 아직 화산파까지 갈 길이 먼데.”
“뭐…… 그럼 그만하지.”
양청교가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비무를 완벽하게 패배했으니 말로 놀려서 이겨 먹으려고 한 듯했다.
‘내가 왜.’
피식 웃은 백무량은 몸을 가볍게 풀며 생각했다.
공동파의 무학에 무슨 가르침이 있는가.
그걸 한 번의 비무로 알아낼 순 없었다. 하지만 어렴풋이 느껴지는 게 있었다.
담는다는 것.
‘하나를 파훼하면 안에 담겨 있던 또 다른 것이 튀어나오고, 그것이 이어지면서 순환을 그린다.’
양청교는 네 가지 검형을 하나에 담았다.
처음에는 불안정하게 보였지만, 그것과 싸우다 보니 어렴풋이 균형을 느꼈다.
필요할 때마다 불쑥 나타나는 검형.
자칫 잘못하면 백무량도 공동파의 검에 말려들 뻔했다. 그만큼 공동파의 검은 단순무식해 보이면서도 현묘했다.
‘그걸 보면 고 선배가 마인에게 패한 게 이해가 가.’
순환한다는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뜻.
압도적인 힘이 수많은 고리의 연결점을 끊는다면 어쩔 수 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백무량이 본 공동파 무공의 한계는 그 점이었다.
‘고 선배와 옥기린의 무공을 보고 판단하기엔 아직 섣부르긴 하지만, 그걸 보완하거나 더욱 강하게 밀고 나가는 게 심의(深意)겠지.’
문득 궁금해졌다.
현천신검 척준환이 펼치는 검은 어떠할까?
후기지수와 놀듯이 휘두르는 게 아니라, 눈앞에 마인이 있다면 척준환은 어떻게 검법을 펼칠 것인가…….
백무량은 그 광경을 보고 싶어졌다.
“뭐 하는가! 얼른 가야지!”
양청교의 목소리에 백무량이 고개를 들었다.
비무에서 느낀 점을 정리하다 보니 멍하니 서 있는 것처럼 보인 듯했다.
“그래, 그러지.”
백무량은 등짐을 고쳐 멘 채 동쪽으로 향했다.
앞으로 하루면 종남파, 이틀이면 화산파였다.
***
다음 날, 종남파.
연무지회에 참석했던 종남파 장로 목허도장은 백무량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
“종남파엔 들르지 않는다고?”
그 물음에 일대제자가 구슬땀을 흘렸다.
“그렇습니다, 장로님.”
“왜지?”
목허도장은 길게 기른 수염을 쓸었다.
“검선 여동빈께서도 이곳 종남에서 도를 닦았고, 북파의 적통인 전진교도 종남에서 일궜다! 한데 왜 하필 화산파더냐?”
“……음,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후기지수라 그런지 강호십대고수라는 허명에 빠진 것이로다.”
세인이 부르기를, 강호십대고수.
그중 단연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가 바로 화산파의 낙매신검.
목허도장은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문파의 역사를 보나, 무공을 보나 종남파가 화산파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낙매신검을 바라보았다.
‘강호십대고수라는 허명과 타성에 젖어서야 어찌 강호가 안정을 찾는단 말인가.’
종남파의 재정이 근래 좋지 않았던 까닭도 모두 낙매신검 때문이다.
목허도장의 미간이 좁혀졌다.
“곤륜신성을 종남파에 초대하거라.”
“오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까마득한 후배가 감히 내 말을 무시할 리가 있겠느냐?”
목허도장은 꼬장꼬장한 눈으로 일대제자를 쳐다보았다.
오랜 시간 동안 수련한 내가기공이 일대제자의 어깨를 압박했다.
“아, 아닙니다. 장로님 말씀이 맞습니다.”
“마땅히 그래야지. 암! 서둘러 가서 불러오너라!”
목허도장이 백무량이 걷고 있을 방향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백무량이 칠십여 년 전 구천검이며 까마득한 후배가 사실은 자신이란 것을.
진실을 모르는 이상, 백무량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제가 왜 갑니까?”
백무량의 대답에 종남파 도사가 진땀을 흘렸다.
“아니, 목허도장께서 후배를 꼭 봐야겠다고 말씀하셨네.”
“저는 분명히 화산파에 들르겠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선후가 있다면 장로님이 아니라 저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백무량은 형형한 눈으로 도사를 바라보았다.
조리 있는 말임에 틀림이 없었고, 무림맹에 들르면서 화산파로 향하겠다 말했던 만큼 종남파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억지를 부리는 까닭이 무엇인가.
백무량의 시선을 이기지 못한 도사가 고개를 돌렸다.
“그, 그게…… 오지 않으면 아마 노하실 걸세. 종남파에 대한 자부심이 워낙 강하신 분이라 말이네.”
“자부심은 장로님만 있는 게 아닙니다. 저는 곤륜파의 대사형으로서 사문의 명예를 짊어지고 있는 몸입니다. 그런데도 저를 강제하겠다면, 다른 구파일방에 도움을 청하겠습니다.”
“…….”
도사가 침묵했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백무량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나이가 어리고 강호의 경험이 적어서 잘 구슬리면 된다고 생각한 건가?’
백무량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목허도장이 무슨 용무로 부르는지 몰라도, 이딴 식으로 나와서는 안 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양청교가 ‘와’ 하는 소리를 냈다.
“자네는 칼만 잘 쓰는 게 아니라 설검(舌劍)에도 재주가 있었나?”
“상인에게 배웠지.”
삼 년 동안 송우현과 대화하면서 얼마나 골탕을 당했던지.
입씨름이라면 질릴 정도로 많이 했다. 어떻게 말해야 상대의 말을 지우고, 위에 설 수 있는지 알았다.
백무량은 도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여기서 더 권한다면, 더 독하게 말하는 수밖에.’
“……음, 으으.”
한숨을 깊게 내쉰 도사가 두 손을 들었다.
“미안하네. 하지만 장로님의 명은 들어야 했네.”
“이해합니다.”
“그렇게 말하지 말게. 자네가 거절했다고 하면 분명 화산파까지 쫓아올 테니까. 오히려 내가 미안해진다네.”
목허도장 아래에서 배운 제자인 걸까.
그의 행동을 예측하는 말에서 수많은 경험이 느껴졌다.
“이만 돌아가겠네.”
“강녕하십시오.”
백무량은 도사를 안쓰러운 눈으로 봤다.
그런 스승 아래에서 수학하면 제자가 모든 고생을 떠안는 법이었다.
도사를 동정하는 것도 거기까지다.
시야에서 도사가 사라지자 백무량이 입술을 달싹였다.
“앞으로 더 빨리 이동해야겠네.”
그 말에 양청교가 눈을 끔뻑였다.
“왜?”
“저 선배께서 목허도장한테 내 대답을 전달하면 얼마나 귀찮게 굴겠나? 아예 화산파에 도착한다면 그러지 못할 거야.”
“일리 있군.”
고개를 끄덕인 양청교가 보법을 펼쳤다.
이에 백무량도 운중용형보를 걸음에 뒤섞었다. 내력이 많이 소모되긴 하지만, 자주 펼쳐야 실력이 쇠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공동파의 무론을 운중용형보에 적용시킨다면 어떨까?’
운중용형보에 담긴 세 개의 초식.
공타식, 공정식, 허류식.
그 세 초식은 서로를 떼 놓을 수 없을 만큼 완벽하고, 잘 이어졌다.
‘만일 그걸 공동파처럼 하나에 담을 수 있다면…….’
초식을 이어 갈 필요가 없다.
허공을 때리고, 허공에 머무르고, 허공을 노니는 움직임.
그 모두를 일보에 접목시킬 수 있다면 운룡대팔식과는 다른 방향의 발전인 셈이다.
백무량은 공동파의 무론에서 그런 가능성을 보았다.
‘운함석에 대고 수련하지 못한 게 아쉽군.’
처음에는 곤륜산에서 수련을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가 섬서성까지 오게 된 걸까.
단순한 직감인가 아니면 주백천이 말한 천명인가.
‘가면 알게 되겠지.’
백무량의 시선이 화산파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
“이게 길이야?”
양청교가 깎아지른 절벽을 바라보며 경악했다.
길이라곤 말뚝 위로 얹은 판자 외에 전무.
칼을 거꾸로 세워 놓은 것처럼 삐쭉삐쭉하고 험했다.
백무량은 그 길을 감회 어린 눈으로 보았다.
“도사라는 녀석이 여길 몰라?”
곤륜산은 높고, 숭산은 넓다.
그 외에도 각 명산마다 칭하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화산은 다른 명산과 남달랐다.
화산 잔도(棧道).
어떠한 산길보다도 위험하다고 하여 검산(劍山).
이곳을 지나지 못하면 화산파로 향하는 건 요원한 일이었다.
“얼른 가지 않고 뭐 해?”
“아, 아니, 이걸 어떻게 간다고 그러냐?”
양청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백무량은 순간 심술이 들어서, 그의 등을 슬쩍 누르며 속삭였다.
“에비.”
“아잇, 육시랄할 놈아!”
“같은 동도한테 그런 욕을 하면 쓰나.”
“넌 여기만 지나면 생사결이야! 알겠어?”
욕을 주절거리니 양청교의 얼굴이 붉어졌다. 적어도 하얗게 질렸을 때보단 나았다.
백무량은 짓궂게 웃었다. 놀리는 맛이 있는 녀석이었다.
“선풍인으로 빨리 건너는 게 어때?”
“바, 바람이 세! 휩쓸리면 개죽음이잖아!”
“도사란 놈이 간이 콩알만 해서야 어디에다가 쓴다고.”
백무량이 양청교 옆을 스쳤다. 앞서 건너면 그도 빨리 건너리란 생각이었다.
“자, 잘 봐라. 이 형님께서 건너는 걸 말이야.”
“얼른 가!”
“그래.”
백무량은 한 걸음을 내디뎠다.
‘끼이익’ 하는 소리가 둔중하게 울렸다. 양청교가 자기도 모르게 입을 가렸다.
“무너진다!”
“안 그래, 이놈아.”
화산파가 미친 것도 아니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겠는가.
겁 먹고 휘청거리지만 않으면 잘 건널 수 있는 길이었다.
화산파는 잔도를 문파의 상징처럼 쓰기도 했다.
‘절벽을 건너는 용맹함.’
매화에 미쳤단 멸칭과는 다르게 화산파는 곤륜파와 비슷할 정도로 마교와 많이 싸워 온 문파였다.
운이 좋다면 이곳에서 칠성교의 기록을 더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백무량은 계획을 구상하면서 판자를 건넜다.
아니, 정확하게는 건너다가 판자가 부서졌다.
콰직!
백무량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돌멩이가 시야에 들어왔었다.
‘그때 죽지 않았던 건가?’
양청교가 죽였던 마인은 사실 가짜!
백무량은 잔도 아래로 떨어지면서 양청교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당혹과 공포로 가득했다.
연기로 꾸며낸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백무량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렇게 죽는다고?’
백무량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생에 대한 집착이 곧 의지가 되어, 태청신공을 극한으로 운용했다.
쿠궁, 쿵!
절벽에 몸이 수차례 부딪쳤다.
온몸이 부서지는 고통이 백무량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커헉, 컥!”
부러진 뼈가 장기를 찌른 건지 선홍색 핏물이 입술에서 튀어나왔다.
내상이 깊다.
그 생각이 든 순간 백무량은 운용을 멈췄다.
이대로라면 태청신공의 공력을 이기지 못한 대맥이 터질 지경이었다.
‘차라리 천명에 맡기자!’
살 운명이라면 절벽에 머리가 깨지진 않을 것이요, 죽는다면 본래 운명대로 흐르는 것이다.
백무량은 눈앞에 흐르는 주마등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때 콧등을 스치는 한 줄기 매향(梅香).
‘……점차 멈춘다?’
빠르게 낙하하던 백무량의 몸이 점차 느려지기 시작했다.
절벽과 부딪치던 고통도 삽시간에 사라졌다.
마치 민담에서 말하는 선경(仙境)에 온 것 같다.
손등이 따끔거리는 감각에 백무량이 눈을 크게 떴다.
“여기는 어디지?”
매화나무로 가득한 숲이라.
손등이 계속해서 따끔거리자 백무량이 곁눈질했다.
사대사행에서도 빛을 발했던 손등의 운룡이 무수한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백무량은 알지 못했다.
이곳이 바로 화산파의 비처이자 성지인 매화비원(梅花秘園)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