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110화 (110/275)

동행 (1)

이틀 뒤.

낙매신검이 백무량에게 온 전서를 보고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긴 제자 하나가 물었다.

“장로님, 무슨 일이십니까?”

“곤륜신성이 나한테 가르침을 구하러 온다는군.”

“그…… 백련교 좌호법을 이겼다는 동도 말이군요.”

“잘된 일이야. 제대로 된 곤륜파 무공을 견식할 수 있겠어.”

낙매신검의 말에 제자가 깜짝 놀랐다.

“그 정도입니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장문제자보다 더 뛰어나다고 생각했네.”

“……!”

제자는 할 말을 잃었다.

화산파의 장문제자가 누구던가!

강호에서 쌍룡이라 불리는 두 후기지수 중 한 명.

화산의 매화비룡(梅花飛龍).

그의 경지는 매향지경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제자가 연초에 보았던 매화비룡은 차기 장문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매화비룡보다 곤륜신성이 뛰어나다니!

“대사형이 들으면 곤륜신성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겁니다.”

“그러라고 하게. 아니, 자네가 그냥 퍼트리게.”

“……예?”

“한 번쯤 져야 분수를 깨닫고 수련에 열중하겠지.”

그렇게 말하는 낙매신검의 얼굴에 엄격함이 가득했다.

제자로선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대체 연무지회에서 무엇을 보셨기에 곤륜신성을 사문의 장문제자보다 높게 치신단 말인가?’

비단 낙매신검뿐만 아니었다.

연무지회에 참여했던 다른 고수들 모두 백무량을 인정하고 있었다.

***

곤륜신성 백무량이 화산파로 향한다!

그 소식을 들은 공동파의 장문인 척준환은 유망한 제자들을 떠올렸다.

“우리도 후기지수 하나 보낼까? 무량이랑 친해지면 좋잖아.”

장문인의 말에 일대제자들이 행낭을 하나 꾸렸다.

그와 마찬가지로 다른 곳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기회인 걸 잊지 마.”

괴성은 칠성교인의 가면에 수염을 그렸다.

일종의 의식이었다.

심상에 내재한 신의 의식을 깨우기 위한 주술.

그것을 거치고 나면 평소보다 두세 배의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끝이 좋지 않을 테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의 기준이었다.

신께 충성을 다하는 칠성교에 있어 가장 좋은 끝.

신에게 정신이 먹히는 것.

괴성은 칠성교인의 행복을 축원했다. 그러자 그가 넙죽 엎드렸다.

“감사합니다! 교주님!”

“잘해 봐. 성화교 그놈, 염화가 소식을 전해 준다고 생색을 얼마나 부렸는데.”

괴성이 한쪽 입술을 씰룩였다.

“필요한 게 있어?”

“그게…….”

의식을 받은 칠성교인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같은 시각, 섬서성 초입.

“슬슬 춥네.”

차가운 바람에 백무량은 외투를 꽉 잡아당겼다.

무림맹에 서책의 필사본을 넘기면서 얻은 옷이었다.

내공을 운용하면 아무렇지 않겠지만, 칠성교가 언제 찾아올지 몰랐다.

종남파의 존재도 조금은 신경이 쓰였다.

‘화산파로 향하려면 종남파 근처를 지나야 하는데…….’

연무지회에서 마주쳤던 목허도장.

그가 억지로 곤륜파를 밀어내려고 했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주먹이 꽉 쥐어진다.

숨을 깊게 내뱉은 백무량이 전방을 살폈다.

주막과 나룻배에, 수심이 제법 깊어 보이는 강이라.

‘이놈의 섬서성은 여전히 강이 많군.’

사실 어딜 걸으나 강을 한두 번쯤 건너야 했다.

백무량은 곧장 주막으로 걸어갔다.

사공을 찾겠다고 곧바로 나룻배로 향하는 건 얼치기로 보이기 딱 좋은 행동이었다.

‘사공이 평소에 어디 있는지도 모른단 뜻이니까.’

최소한 돈을 두 배로 줘야 한다.

주머니 안을 셈한 백무량이 낮술을 마시고 있는 노인에게 향했다.

“사공이십니까?”

“어음, 음. 건너러 왔나?”

입을 열자마자 맡아지는 진한 주향.

백무량이 인상을 찌푸리자, 노인이 히죽 웃었다.

듬성듬성 빠진 이빨이 흉측했다.

“이곳의 사공은 나밖에 없네. 그렇게 봐도 별도리가 없을 것이야.”

“기분이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이고, 도사님께서 나 같은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해야 쓰나!”

말은 그렇게 하지만 백무량에게 존댓말을 받은 게 영 기쁜 모양이다.

함박웃음을 지은 노인은 술값을 치르곤 나룻배로 향했다.

“섬서는 처음인가?”

“예.”

“어디로 향하시는가?”

“화산파입니다.”

“화산이라…… 좋은 곳이지. 종남도 괜찮은 곳이라네. 가 보았는가?”

“안 갈 겁니다.”

계속되는 단답에도 노인이 계속 말을 붙였다. 그가 품고 있던 외로움을 풀어내려는 것 같았다.

백무량에겐 조금 귀찮을 뿐이다.

한편으로는 긴장감이 느슨하게 풀리기도 했다.

‘이렇게 의미 없는 대화가 대체 얼마 만이지?’

무공을 수련하고, 마교에 대해 경고하고, 앞으로의 곤륜파를 위한 계획을 세우고…….

백무량은 늘 바쁘게 움직였다. 심지어 현종휘도 제자로서 대했을 뿐, 편하게 놓아준 적이 없었다.

‘이런 걸 늙은 사공과의 대화에서 알게 되다니.’

그렇게 노인의 질문에 대충 대답하던 그때.

콰르륵!

수면 어딘가에서 거친 소리가 들렸다. 몸을 단숨에 일으킨 백무량이 검을 쥐었다.

그걸 본 노인이 깜짝 놀랐다.

“어이쿠야! 내가 잘못했네!”

“그게 아닙니다. 머리 숙이십시오!”

노인이 황급히 머리를 숙이자, 그 위로 돌멩이가 스쳤다.

평범한 돌멩이는 아니었다.

‘겉에 무언가를 칠해 놨어.’

왜 그걸 노인에게 던졌을까?

의문을 품은 순간, 답이 나왔다. 백무량이 노인에게 외쳤다.

“노를 저으십시오!”

“왜, 왜? 죽으라고?”

“배에 구멍을 뚫으려고 할 겁니다!”

“미친! 이래서 무림인이란!”

욕지거리를 중얼거린 노인이 노를 황급히 저었다.

백무량은 안력에 내공을 집중했다.

거친 수면 아래.

한 인영이 돌멩이를 쥐고 있었다.

‘또 온다!’

쐐애액-!

한번 들킨 이상 이제 상관없다는 걸까.

세 개의 돌멩이가 노인과 배를 노렸다.

백무량의 시선이 돌멩이의 움직임을 분주히 좇았다.

콰지직, 쾅!

허공에 나타난 분광뇌운결이 돌멩이를 박살 냈다.

그걸 본 인영이 몸을 돌리고 반대편으로 헤엄쳤다.

‘포기인가?’

돌멩이로 급습했던 것치고는 빠른 포기다.

백무량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분광뇌운결로 부족해진 심력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역시 내 방식은 아니야.’

검에 뇌운결을 두르는 것보다 네 곱절은 피곤했다.

백무량이 배에 털썩 주저앉자, 노인이 괄괄한 목소리로 외쳤다.

“뭐 하는 사람이길래 그래! 내가 죽으면 책임질 건가?”

“미안합니다, 어르신.”

“도사라서 믿고 태웠더니만! 말도 그냥 적당히 무시하고 말이야!”

“하, 하하.”

백무량이 어색한 미소를 짓자, 이때를 노린 노인이 한 손을 펼쳤다.

“더 말은 않을 테니까 아까 술값만 내주게!”

“…….”

백무량은 어쩔 도리 없이 추가금을 치러야 했다.

“즐거운 화산행 되게!”

백무량은 노인의 인사를 뒤로 동쪽으로 걸었다.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심심하지는 않았다.

‘칠성교였을까?’

서책에 적혀 있기를, 칠성교의 무공은 중원의 것과는 달리 변칙적인 움직임으로 유명하다던가.

백무량이 미간을 좁혔다.

‘확신하긴 어렵지.’

사실 돌팔매질 자체는 대단치 않았다.

만일 그가 탄지공의 고수였다면 분광뇌운결이 아니라 백선신검을 휘둘렀어야 할 터였다.

물론, 그게 다행은 아니다.

‘앞으론 야영해선 안 되겠어.’

강 한가운데를 습격한 놈이 자는 순간을 놓칠 리가 없다.

백무량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딜 가나 적이 모여드는 꼴이 평안하게 살긴 글렀다.

‘동행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물론 그 사람은 백무량의 일에 말려들기 싫어할 것이다.

동행은 무슨, 백무량이 고개를 내저은 그때였다.

“어, 어어?”

백무량은 고개를 들었다.

삼십 보 거리에서 도사 하나가 종이와 자신을 반복해서 쳐다보고 있었다.

“누구시오?”

“혹시…… 곤륜신성이십니까?”

“내가 백무량이오만.”

“오! 이런 우연이!”

그렇게 말한 도사가 자신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를 반겼던 백무량이었지만, 가까워질수록 어째 이상했다.

‘목이랑 손이 깨끗한데?’

강호를 여행하다 보면 먼지 범벅이 되기 마련이다.

특히 비가 올 때 나무에서 떨어진 벌레 따위가 도복을 더럽히는 게 다반사였다.

한데 도사의 도복이 무척 깨끗했다.

‘젖진 않았으니 강에서 습격한 놈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상해.’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거리를 벌렸다. 언제든 반응할 수 있도록 오른손을 검에 가져갔다.

그 모습을 본 도사가 제자리에 우뚝 멈췄다.

“뭐야? 왜 그래?”

“어디 문파냐?”

“공동도다!”

“…….”

백무량은 의심을 풀지 않았다. 가면을 쓰지 않았다지만, 왠지 모르게 도사가 의심스러웠다.

무엇보다 손등의 운룡에서 작은 빛이 흐르고 있었다.

“공동파의 무공을 세 개 말해 봐!”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나?”

“얼른!”

인상을 찌푸린 도사가 두 손을 들었다.

입술을 보아 백무량에 대한 욕을 중얼거린 듯했다.

“현천신장, 선풍인, 대주천복마검!”

‘……대주천복마검?’

고성진이 자신과 겨룰 때 펼쳤던 무공이 아니던가.

그것으로 백무량은 안심할 수 있었다.

“의심해서 미안하네!”

“그래. 용서해 주지!”

그 말에 도사가 백무량을 향해 달려갔다.

한데 그의 표정이 점차 조소로 바뀌는 게 아닌가!

백무량의 모든 신경이 도사를 향했다.

그가 먼저 선공을 취한다고 한들 곧바로 베어 낼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다섯 보를 남겨 두었을 때.

한 줄기 바람이 백무량 옆을 스쳤다.

[대주천복마검은 비인부전(非人不傳)의 무공이라네. 자네는 사형 때문에 알게 되었지만 말이야.]

푸욱!

도사의 몸을 벤 남자가 칼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어디서 말하고 다닐 무공이 아니라는 거지.”

“당신이 진짜 공동파의 도사다?”

백무량의 의심에 남자가 피식 웃었다.

“먼저 의심부터 풀자고.”

그렇게 말한 남자가 도사의 품을 뒤적거리다가 하나를 꺼냈다.

스윽.

얼굴 한쪽을 가릴 수 있는 가면.

그것을 본 백무량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칠성교……!”

“곤륜신성께선 이게 무엇인지 아는 모양이군. 자, 이제 나에 대한 의심이 풀린 것 같으니 이름을 밝히지.”

남자가 두 손을 모아 올렸다.

“공동파의 옥기린(玉麒麟) 양청교라고 한다네.”

“곤륜신성 백무량이네.”

소개를 마친 백무량은 도사의 시신으로 다가갔다.

그걸 본 양청교가 옆으로 자리를 피했다.

“참으로 신중하군.”

“칭찬 고맙네.”

양청교의 말을 흘린 백무량은 도복 안쪽을 살폈다.

완전히 젖어 버린 내의(內衣).

‘강에서 나를 습격한 놈이구나!’

이제야 확신이 든 백무량이 양청교에게 포권했다.

“미안하네. 요즘 마교랑 자주 얽히다 보니 의심할 수밖에 없었어.”

“뭐, 쥐뿔도 없는 내가 이해하지!”

양청교가 번듯한 얼굴로 실실 웃었다.

“장문인께서 자네와 친해지라고 해서 나왔네. 화산파로 간다지?”

“그렇네.”

“마침 잘됐군. 자네와 같이 다니면 경험을 많이 쌓을 수 있겠어.”

“그게 무슨 소린가?”

“마인과 싸울 기회 말일세. 길 한복판에서 습격해 오는데, 다른 때도 노리겠지.”

‘마교와 싸우는 걸 경험으로 생각하는 건가?’

백무량은 헛웃음을 흘렸다.

칠십여 년 전에 들었다면 곧바로 칼을 빼 들었을 텐데, 평화로운 시대를 지낸 후기지수라 생각하니 이해가 됐다.

하지만 경고는 해야 한다.

백무량이 양청교에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마교를 경험으로 여겼다간 목숨이 달아날 거야.”

“명심하지. 그나저나 칠성교가 뭔지 알려 주겠나?”

그 말에 백무량은 고개를 돌렸다.

아주 희박하게, 양청교에게서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놈이 왜 대주천복마검을 알고 있는지, 장문제자로서 신경이 쓰여서 미칠 것 같거든.”

양청교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