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104화 (104/275)

교단 (5)

“어디에서 주연호를 만났습니까?”

삼십 대 제자인 백무량이 이십칠 대 제자를 함부로 부르다니?

사실상 태사조를 이름으로 부른 게 아닌가!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입을 가렸다. 하지만 백무량은 자신의 실수를 자각하지 못했다.

그만큼 백무량의 내심이 뒤흔들리고 있었다.

“어서 말씀하십시오.”

“호, 호광성. 연무지회가 시작되기 며칠 전에 동정호에서 만났네!”

‘내 주변에 있었다?’

백무량은 인상을 한가득 찌푸렸다. 인연이 조금만 맞닿았다면 주연호와 마주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르게 생각하면, 주연호가 일부러 백무량을 피했다는 뜻이다.

연무지회에 백무량이 나갔다는 것은 만인이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생각을 마무리한 백무량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렸다.

‘이런, 사형의 종질이라고 너무 편하게 말했나.’

주변에서 경악한 시선을 보내자, 백무량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십칠 대 도사 중에 주연호라는 이름은 없습니다. 누군지는 몰라도 곤륜도를 사칭했으니, 엄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역시!”

“순간 잘못 들었나 했네!”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지자 백무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뒤이어 거한에게 전음을 보냈다.

[무슨 말을 했는지 글로 써서 보여 주십시오.]

“예?”

거한이 멍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백무량이 미간을 좁혔다.

[대답은 하지 말고.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만 알려 주십시오. 값은 제대로 치르겠습니다.]

그 전음에 거한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걸 확인한 백무량이 사람들에게 가식적인 미소를 보였다.

“멀리서 온지라 너무 피곤하군요. 이야기는 내일 다시 했으면 좋겠습니다.”

“편한 대로 하시게.”

“연무지회의 영웅이 아니던가! 하하하.”

온갖 아첨이 백무량의 귓전을 스쳤다.

백무량은 그들에게서 등을 들리고선 귀를 후볐다.

아무래도 대사형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직책인 것 같았다.

잠시 후.

좌우를 살핀 거한이 백무량의 처소에 찾아왔다.

“들어오십시오.”

“예!”

잔뜩 긴장한 거한이 품에서 종이를 꺼내고는 한 손가락을 폈다.

“여기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과 정성을 보아, 은원보는 받아야겠습니다.”

“은 오십 냥이나?”

백무량이 가볍게 묻자, 거한이 식은땀을 흘렸다.

“삼십 냥이어도 괜찮습니다만…….”

“괜찮습니다. 호광성에서 여기까지 발품을 팔았으니 그 정돈 받아야지요.”

백무량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사실, 송우현 덕택에 곤륜파의 재정은 겉보기보다 더욱 탄탄했다. 은원보만 하더라도 산하객잔 창고에 쌓여 있었다.

하나쯤 준다고 해서 티가 날 정도가 아니다.

‘사형과 연관된 정보라면 다섯 배를 줘도 아깝지 않아.’

백무량의 마음을 모르는 거한은 희희낙락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협!”

“이만 나가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히 나가겠습니다!”

영문 모를 말을 남긴 거한이 처소 밖으로 나갔다.

그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백무량은 종이를 폈다.

그곳에는 짤막한 말이 적혀있었다.

‘암자를 살펴라?’

곤륜산맥 전체에 걸쳐 수십 개는 있는 게 바로 암자 아니던가.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곤륜파가 멸문한 동안 관리하지 못한 암자가 대부분이었다.

진즉 무너졌을 폐가가 산더미다.

‘그래도 찾긴 해야겠지.’

과연 사형의 종질이 남긴 말에 무엇이 있을런가.

내일 할 일을 정한 백무량이 이부자리에 누웠다.

***

“하압, 하!”

무인의 기합성에 백무량이 눈을 번쩍 떴다. 창가에서 비춰지는 빛을 보아 정오가 가까웠다.

‘나도 여독이 꽤 쌓였었나.’

평소였다면 새벽에 일어나서 태청신공을 연공했을 터인데.

백무량은 자신의 게으름을 속으로 나무라고는 안채로 향했다.

그곳에 우상벽이 고용한 숙수가 대기하고 있었다.

“식사는 미리 준비해 두었습니다.”

“화식(火食)이겠지?”

“장문인께선 탐탁지 않게 생각하십니다만…… 육체의 성장에는 도움이 되니까요.”

백무량의 얼굴에서 흡족한 미소가 감돌았다.

도사라면 선식을 중심으로 해야 하나, 무인의 완성을 위해서는 화식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화식을 고깝게 여겼던 현노윤도 점차 화식을 즐기는 모양새다.

무엇보다 백련교의 등장이 현노윤의 고집을 꺾는 데 주효했다.

“좋아.”

백무량이 자리를 잡자, 슬그머니 현노윤이 뒤따라왔다.

“사형께서 저를 업고 올라오셨다고 들었어요.”

“그러긴 했지.”

“그게, 너무 죄송해서요.”

“괜찮아. 네가 건강하면 됐지.”

눈앞에서 두 무인이 가슴을 찢고 천령개를 내리치는 광경을 보았는데, 정신이 멀쩡할 열세 살이 어디 있겠는가.

그것을 극복하고 일어난 것으로 다행이다.

백무량은 현노윤을 옆에 앉히고는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그러는 사이 잘 구워진 고기가 앞에 놓였다.

“잘 먹겠습니다!”

활기찬 목소리로 외친 현종휘가 고기로 손을 가져갔다.

화식을 허겁지겁 해치우는 모습에 숙수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백무량도 마찬가지였다.

‘잘도 먹는다.’

어린아이는 잘 먹고, 잘 크기만 해도 좋다고 하던가.

그런 점에서 현종휘는 아주 번듯하게 자라 주고 있었다.

특히 어려운 상황 속에서 삐뚤어지지 않은 채 올바른 성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가장 대견한 점이다.

백무량은 현종휘와 비슷한 속도로 점심을 먹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 현종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수련하실 건가요?”

“아니, 잠깐 곤륜산맥을 돌아다닐까 한다.”

“갑자기 왜요?”

호기심을 느낀 현종휘의 눈이 반짝거렸다. 백무량은 속으로 쓴웃음을 머금었다.

평소였다면 몰라도 칠성교도가 나타난 지금, 현종휘를 지킬 여유가 없었다.

백무량이 손가락을 입술에 대었다. 그러자 현종휘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가, 금세 활기를 되찾았다.

“저 혼자 하고 있을게요!”

“누가 나에 대해 물으면?”

“낮잠이라도 자고 있다고 하죠, 뭐.”

“하하, 녀석.”

현종휘의 머리칼을 어지럽힌 백무량은 연무장으로 나섰다.

이제 막 곤륜도가 되어 산취로 헤롱대는 제자가 있는가 하면, 억지로 눈을 부릅뜨며 수련에 임하는 제자가 있었다.

‘장문인이 없는 동안 철유가 잘 해냈구나.’

내심 이런 생각을 했다.

현씨 조손이 없는 동안 철유가 잘못된 마음을 품었다면, 조금이라도 게을렀다면 곤륜파의 분위기가 엉망이 되었을 터였다.

한데 백무량이 본 연무장의 분위기는 한산하기는커녕 기율이 탄탄했다.

‘어쩌면 철유에게 제자의 가르침을 맡기고, 종휘를 내가 직접 가르치는 게 낫지 않을까?’

백무량이 턱을 매만지는 사이, 멀리서 철유가 걸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대사형?”

“그냥 구경이나 할까 해서 왔다.”

“구경이라…….”

철유가 제자들을 흘낏 바라보았다. 그러자 수련에 열중이던 제자들이 순간 어깨를 움찔거렸다.

오늘따라 기강이 제대로 잡혔나 했더니, 백무량의 등장에 더욱 열심히다.

철유는 히죽 웃었다.

“아무래도 대사형의 눈에 들고 싶은 사제들이 많은가 봅니다.”

“왜?”

“그야, 대사형께서는 강호에서 유명한 후기지수이자 신진 고수잖습니까. 한 수 배우고 싶어 하는 도사가 한둘이 아닙니다.”

“……그으래?”

철유의 말에 백무량은 제자들의 행공을 유심히 살폈다.

어느 한쪽이라도 마음에 드는 제자가 있다면 자세를 고쳐 줄 요량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현종휘 이상 가는 제자가 없었다.

하기야, 삼 년 전에 입문한 삼십 대 제자 중 곤륜파의 정종 무공을 익힌 제자가 없기도 했다.

정확하게는 백무량이 가르치지 않았다.

‘종휘에 비하면 너무 부족해. 하긴, 종휘는 장문인에게 어린 시절부터 배워 왔으니까. 내가 너무 엄격한 건가.’

백무량이 연무장에서 시선을 떼자, 철유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은 사제가 있습니까?”

“삼 년 동안 지켜봤는데 지금이라고 다르겠느냐?”

“그거야 그렇지요.”

철유는 내심 백무량이 무공을 베풀었으면 했다.

입문한 이래로 삼 년.

그동안 철유를 비롯한 삼십 대 제자는 여러 가지 무공을 배웠지만, 구천화우검이나 태청신공은 구결조차 듣지 못했다.

이는 철유의 착각이기도 했다.

‘오성(悟性)이 다들 부족하구나.’

백무량은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를 가르치기가 귀찮아서 무공을 베풀지 않은 게 아니었다.

구천화우검과 태청신공.

장문의 직계 제자만이 익힐 수 있는 두 무공은 뛰어난 오성과 근골을 필요로 했다. 칠십여 년 전 백무량이 강호에 무명을 떨쳤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애초에 익힐 역량이 되지 않으면 허락되지 않는 두 무공.

그것을 백무량이 동시에 익혔기에 관심을 받은 것이다.

‘지금이야 곤륜파 무공을 아는 사람이 적으니까 관심이 덜하지만.’

백무량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예전처럼 곤륜파 무공이 강호에 잘 알려져 있었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관심에 시달렸을 터였다.

속으로 크게 안도한 백무량이 철유에게 말했다.

“내가 이번에 분광검에 대해 크게 깨달은 게 있으니, 나중에 너희들을 모아서 가르치마.”

“분광검을요?”

“그래. 곤륜파의 옛 가르침을 회수하고 나니, 분광검이 구천화우검 못지않은 검법이 되더구나.”

“정말입니까!”

철유가 진심으로 기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미안해졌다.

오성이 부족해서 안 된다고 하면 의욕을 잃을까 해서 말하지 않았는데, 철유가 느끼기엔 무관심으로 여겨졌을 터였다.

그것을 뒤늦게 깨달은 백무량이 철유에게 무공의 이름을 말해 주었다.

“분광검의 과거 형태. 분광뇌운결이라는 것이다.”

“분광뇌운결……!”

“네가 그래도 교두이니 먼저 보여 주마.”

백무량은 그 자리에서 분광뇌운결을 운용해서 일검을 펼쳤다.

초식과 형태가 있는 분광검과는 다르게, 분광뇌운결은 검을 형태가 없는 원석.

무형의 뇌기가 일검을 중심으로 퍼져 나간다.

그것을 본 철유의 눈이 커졌다. 분광검의 간략한 검로와는 달리 분광뇌운결은 시선을 붙잡는 화려함이 있었다.

“자랑을 하기 좋은 무공이지.”

“……멋있는 무공입니다.”

백무량이 던진 농담에 철유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언제부터 배울 수 있습니까?”

“내 할 일이 빨리 끝난다면?”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하겠습니다.”

백무량은 기다렸다는 듯이 품에서 곤륜산맥의 지도를 꺼냈다.

거기에는 수많은 암자가 표식 되어 있었는데, 백무량의 기억을 바탕으로 한지라 틀렸을 확률이 대단히 높았다.

‘곤륜산의 암자를 돌아다닌 게 열다섯 살이 마지막이었으니까.’

최소한 구십 년은 된 정보인 셈이다.

백무량에게 지도를 넘겨받은 철유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뭡니까?”

“암자의 위치를 알아보려고 말이야. 일단은 표시하긴 했는데, 위치가 정확하지는 않거든.”

“그럼 직접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겠군요.”

“그렇지.”

백무량의 대답에 철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들을 시킨다면 반발이 조금 있겠지만, 분광뇌운결을 배울 수 있다면 네 발로 기어서라도 갈 터였다.

“삼 인 일 조로 묶어서 탐색하겠습니다.”

“좋다, 좋아.”

백무량은 철유의 일 처리에 손뼉을 쳤다.

철유 덕택에 한 달은 걸릴 일을 열흘 안에 끝낼 수 있을 듯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