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무지회 (5)
“어찌 통천옹께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곤륜파 대신 구파일방을 꿰찬 해남파가 왜 그런 말을 하느냐.
목허도장의 저의는 뚜렷했다. 하지만 통천옹의 그릇은 그렇게 작지 않았다.
“곤륜파는 백련교와 싸우다가 횡액을 입은 문파네. 그리고 지금은 백련교의 잔당이 강호를 어지럽히고 있고. 곤륜파를 중용하지 않으면 대체 누굴 신뢰한단 말인가?”
“……그건.”
“해남파가 구파일방의 좌(座)에 든 것은 곤륜파를 모함하거나 시기해서가 아니야. 단지 자리가 남아서, 운과 때가 맞아서일 뿐이지. 반대할 이유가 하등 없네.”
통천옹의 깔끔한 언사에 목허도장이 침묵했다. 명분과 도의 모두 곤륜파에게 있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여기에 없었다.
심지어 독검군마저도 공동파와 우방이 아니냐며 비아냥거렸을 뿐, 곤륜파의 합류를 거리끼는 모습은 없었다.
백무량은 생각했다.
‘설마…… 백련교와 연관이 있는 건 아니겠지?’
정말로 설마에 불과한 생각이었다. 백련교도가 구파일방에 속하는 것으로 모자라, 장로까지 올라간다니.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대사행에 좌호법 이화겸이 있었다는 사실 또한 설마에 가까운 일이다.
백무량은 목허도장을 바라보았다. 그의 안색이 붉어진 것을 보아 창피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목허도장을 조롱하려면 무슨 말이 좋을까.
백무량이 고민하는 사이에 화산의 낙매신검이 입을 열었다.
“목허도장께서 무엇을 말하는지 알겠으나, 곤륜파는 본래 역사를 보면 지리적으로 외지인지라 강성한 적이 없소. 곤륜도가 가장 많았던 때가 속가를 포함해도 이삼백이었을 거요.”
‘곤륜파를 저렇게 잘 알다니?’
백무량은 깜짝 놀랐다. 보름의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곤륜파의 역사를 저렇게 잘 아는 장로가 있을 줄은 몰랐다.
하물며 낙매신검이 누구던가.
‘여기 모인 장로 중 가장 최고수.’
척준환처럼 강호십대고수라 불리는 화검의 고수다.
낙매신검의 말에 목허도장이 식은땀을 흘렸다.
“으음, 그건 잘 알지 못했소.”
“목허도장이야 사문의 일로 현재 바쁘시니, 타문의 역사를 모를 수도 있지요.”
낙매신검이 체면을 세워 주자 목허도장의 표정이 밝아졌다.
“현 장문인께 무례를 끼친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조금 불편할 뻔했던 걸 제외하고는 괜찮네.”
농담과 진담이 섞인 현노윤의 대답에 좌중이 껄껄 웃었다.
그것으로 마무리되려는 찰나에 백무량이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목허도장께서는 종남도셨지요?”
“그러네.”
“청성파에 팔았던 십우도 말입니다. 혹시 그것에 대해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음.”
백무량의 말에 목허도장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구파일방의 장로가 모인 자리에서 사문의 치부를 꺼내는 게 내키지 않은 듯했다.
이에 현노윤이 백무량의 말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곤륜파의 선배께서 남긴 그림이라서 그렇소. 부디 알려 줬으면 하오.”
“……어찌하여 종남으로 흘러들어 온 건지 남겨진 기록이 없소. 단지 그림이 좋아서 걸어 두었다가, 청성파에 넘겼소.”
백무량은 아쉽다는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불가사의한 능력을 보였던 주백천이라면 종남에 흔적 없이 그림을 남기는 것 정돈 쉽게 해낼 법했다.
백무량이 뒤로 물러나자 구파일방의 고수들이 현노윤에게 질문 세례를 던졌다.
“몸놀림을 보니 동공을 수련한 듯한데, 몇 살부터 시키신 겁니까?”
“심상 수련을 언제부터 시켰기에 저런 수준이오?”
“그건, 그게…….”
현노윤이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웃음으로 가득했다.
이미 연무지회의 결과는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백무량에게 남은 용건은 사형이 남긴 그림의 위치였다.
‘앞으로 화산파, 무당파, 보타암인가.’
백무량의 시선이 낙매신검과 무의진인에게 향했다. 그들이라면 주백천이 남긴 그림에 대해 알 가능성이 컸다.
그 시선을 알아차린 무의진인이 물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가?”
‘여기서 물으면 곧바로 알 수 있겠지. 하지만…… 나도 많은 걸 밝혀야겠지.’
과연 이곳에 백련교도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백무량은 확답하지 못했다. 칠십여 년은 그만큼 길었다.
무엇보다 목허도장의 태도가 백무량의 발목을 붙잡았다.
“아닙니다. 그저 남존무당이라 불리는 무당파의 장로를 뵙게 되어 신기했습니다.”
“그런가? 허허.”
무의진인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야말로 놀라운 검무를 보여 준 후배의 칭찬이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낙매신검이 백무량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어린 후기지수가 옛 선배가 남긴 그림까지 신경 쓰니 곤륜의 홍복에 가득하오. 사문에 이런 후배가 있었다면 정말 든든했을 겁니다, 장문인.”
“제가 가르쳤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지요.”
백무량을 바라보는 현노윤의 표정에는 유쾌함이 가득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사조와 사손의 관계가 아니라, 장문인과 장문제자의 관계이니 우스울 만도 했다.
백무량이 피식 웃어 보이자, 현종휘가 환히 웃었다.
그때 한줄기 목소리가 연무장을 크게 울렸다.
“검무가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검왕이라 불리는 무인, 무림맹주 남궁진.
그의 등장에 구파일방의 고수들이 시선을 돌렸다. 오대세가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남자였다.
하지만 처음과 다르게 폄훼하거나 비아냥거리는 말이 없었다.
“여기 모인 장로들과 척 장문인은 곤륜파의 무공을 인정하는 바요.”
“……허.”
남궁진이 침음을 흘렸다.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저들을 압도하고, 인정을 받을 줄은 몰랐다는 어투였다.
‘하기야 자기한테 도움을 청하는 게 가장 좋은 그림이었겠지.’
백무량은 남궁진과 시선을 마주하며 입술을 씰룩거렸다.
당장은 우방이지만 상황에 따라 손바닥을 뒤집을 수 있는 남자였다.
그러나 구파일방의 고수들과는 다르게 남궁진은 백련교의 위험함을 아는 자였다.
“자, 그러면 백 후배에게 들어 볼 때가 됐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연무지회를 열면서 왜 모두를 불렀겠습니까?”
남궁진이 백무량을 가리켰다.
“저 후배가 직접 마주했던 백련교도들에 대한 정보, 그리고 무공을 파악해야 나중에 싸울 때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건 이미 서면으로 전달받았네만.”
“직접 입으로 들어야 아는 일도 있기 마련이지요.”
남궁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권위를 중시하는 그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하는 버릇이었다.
“후배의 검무를 보고 무공이 어떤 경지인지 봤으니, 그의 말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칫.”
독검군이 혀를 가볍게 찼다. 누가 듣더라도 자기를 겨냥한 말이었다.
무영개의 표정 또한 좋지 않았다.
“개방의 정보력을 무시하는 것이오?”
“사대사행에 개방이 침투해 있었다면 인정하지요.”
“…….”
무영개마저 입을 꾹 다물자 남궁진이 연무장의 벽을 가볍게 쳤다.
쿵, 하는 소리가 연무장 전체를 휘돌았다.
그걸 본 백무량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저들끼리 전음하고 있으리라 예상한 건가.’
과연 남궁진의 생각이 옳았는지, 고수 몇몇이 깜짝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뒤이어 남궁진이 말했다.
“자, 이제 말해 주게, 후배. 자네가 만난 백련교도는 어떠했는가?”
구파일방의 고수들과 무림맹주가 백무량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으로 백무량은 깨달았다.
이 자리의 주인공이 되었음을, 남궁진이 그것을 의도했다는 것을.
백무량이 과거의 일을 정리하는 사이 남궁진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빚이라는 건가?’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누가 오대세가 아니랄까 봐 도의보다는 손익에 도가 튼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처럼 백련교의 잔당이 있을 때 확실하게 나서 주는 모습은 좋다.
백무량은 남궁진에게 눈을 끔뻑거리고는 입을 열었다.
“백련교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는 정확합니다.”
“그게 무엇인가?”
“백련교주. 그는 이곳에 있는 모두가 합공해도 이기지 못할 겁니다.”
그 말에 고수 몇몇이 발끈하여 외쳤다.
“……뭣이!”
“그게 무슨 말이더냐! 강호십대고수가 둘이나 있거늘!”
‘하지만 그게 사실이야.’
검해를 각성한 그때, 그리고 사형이 남긴 안배를 취했을 땐 백련교주와 가까워진 것으로 생각했다.
수련에 열중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경지가 오르면 오를수록 깨달았다. 백련교주가 가지고 있는 힘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낙매신검과 현천신검이 강하긴 하지만…… 상처 없이 내 사부를 이길 수 있는 수준은 아니야.’
오히려 주자령이 그들보다 강하다고 확신했다.
사대사행에서 얻은 선기로 인해 경지의 고하를 알아차리는 감각이 발달한 것이다.
한데 백련교주는 상처 하나 없이 사부를 꺾었다.
심지어 검해의 무공을 펼쳐도 상처 하나가 전부다.
‘순간적으로 강호십대고수를 능가한 일 초였었지.’
그야말로 괴력난신.
백련교주의 강함은 지금 생각해도 기이한 일면이 있었다.
그때 독검군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무 고평가가 아닌가?”
백무량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았다. 자기 사문을 멸문시킨 고수이니 그렇게 생각하겠지, 이런 식의 말이었을 터였다.
‘사고는 치지 않으려고 했는데.’
백무량이 독검군에게 비무를 신청하려는 찰나, 낙매신검이 그를 꾸짖었다.
“옛날부터 말을 아낄 때를 모르더니, 지금도 마찬가지요?”
“혼잣말도 못 하나.”
“내가 여기서 점창의 무공은 백련교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어쩌겠소?”
“비무를 신청하겠지.”
물을 것도 없다.
독검군의 단답에 낙매신검이 백무량을 가리켰다.
“저 후배를 보시오. 사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검에 손을 가져가고 있었소. 이제 아시겠소?”
“……무엇을? 선배에게 대든다고?”
“당신의 막말이 어린 후배와 곤륜파를 핍박하는 행동이었단 것을 말이오!”
낙매신검의 일갈에 독검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고도의 행공이 이루어진 사자후가 독검군의 고막을 강하게 때렸다.
그 모습에 백무량의 눈이 커졌다.
‘겉으로만 그런 줄 알았는데 진심이었구나.’
화산파의 최고수 낙매신검.
그에게 저절로 호감이 갔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거리는 머나 같은 도덕경을 수학하는 동문이 아닌가.”
그렇게 말한 낙매신검이 독검군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을 함부로 하는 도사는 꾸짖어야 마땅하네.”
“흥.”
독검군의 코웃음이 어째 마지막 자존심처럼 보여서, 백무량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것을 유심히 지켜본 남궁진이 백무량을 재촉했다.
“시간이 없으니 마저 이야기해 주게.”
“예. 제가 만났던 백련교는…….”
운산보 곤륜 지부에서 마주쳤던 마인부터 시작하여 사천당문과 사대사행.
세 곳에서 마주했단 말에 아홉 고수는 근심하고 혀를 내둘렀다.
“왜 하필이면 그때마다 후배가 있었는지 모르겠군. 위험했을 터인데…….”
“그러게 말입니다.”
백무량도 내심 이상함을 느끼긴 했다.
백련교도가 준동하거나 일을 벌이기 전에 항상 그곳에 도달하는 자신.
그게 주백천이 말한 천명이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백무량은 자신이 품고 있던 생각을 떠올렸다.
“지금 당장은 백련교가 몸을 웅크릴 겁니다.”
“왜인가?”
“오랜 시간 동안 굶주린 듯했던 이화겸을 제외하고, 강호에서 마주한 백련교도는 모두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곤륜 지부의 마인은 정체를 숨긴 채 운산보의 감옥에 갇혀 있었고, 사천당가는 두 마인이 집어삼키기 직전이었다.
전자가 무슨 목적이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공통점은 있었다.
“칠십여 년 동안 백련교는 강호 곳곳에 침투했다고 생각합니다. 구파일방도 거기에서 자유롭지 않을 겁니다.”
백무량의 한마디가 아홉 고수를 격동시켰다.